청소년들의 자아를 향한 여정의 동반자로서의 문학의 가치와 문학수업의 사례들을 보여주는 책이다. 오디세이아, 신곡, 햄릿, 템페스트, 파우스트, 워즈워드와 휘트먼의 시 등 인간과 세계의 깊이를 한껏 탐구하도록 이끌어주는 작품들과 함께 청소년기를 보내는 발도르프의 교육이 부러웠다. 아니, 그런 고전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문학수업에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수업방법이나 스킬이 아니라 작품을 잘 고르는 것이다. 작품이 직접 말하게 하는 것, 작품의 소리를 듣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우리도 청소년기의 각 단계마다 학생들의 성장에 영감과 자극과 치유의 동반자가 될 수 있는 작품들의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 작품과 청소년기의 성장에 유익한 작품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햄릿이나 파우스트, 오디세이아, 신곡처럼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작품을 우리 문학에서 우선적으로 고르되 외국 문학을 참고할 필요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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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 가르쳐주고 싶어, 헬렌, 세상에 가득한 그 모든 것들을. 지상의 모든 것은 잠깐 동안만 우리 것일 뿐, 곧 사라져버린단다. 우리란 존재도 그래. 언어란 건 말이야, 우리는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또 숨기기도 한단다. 언어를 통해서 너는 5천 년 전 일도 볼 수가 있고, 느끼고 생각하고 알고 있는 모든 걸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가 있어. 그러면 우리 영혼은 어둠 속에 이지 않아 무덤에 들어간 뒤에도 영영 사라지지 않게 되지. 난 알아,
정말로 난 알아, 단 한마디면 돼. 그저 한마디면 난 너의 손 위에 세상을 가져다 줄 수 있어. 그게 뭐든지 간에 말이야. (윌리엄 깁슨 '기적을 행한 사람')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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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생의 시련을 슬기롭게 극복한다는 면에서 컴퓨터 세대의 아이들이 과거의 청소년들보다 오히려 준비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사이버 세상에서는 마음 먹은 대로, 생각하는 속도대로 아무런 제약 없이 누비고 다닐 수 있지만 현실 세계에선 절대 그럴 수가 없다. 클릭 한 번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 꽉 막힌 도로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을 어떻게 침착하게 견딜까?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며 보낸 시간들이 학교에서 진지한 토론을 하거나 직장에서 창의적인 생각을 펼칠 힘을 길러줄 수 있을까? 직접 얼굴을 맞대지 않고 하는 인터넷 채팅과 문자 메시지가 현실의 인간 관계에서 일어나는 부대낌과 어려움을 잘 풀어나가게 도와줄 수 있을까?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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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첨단기술로 인해 많은 것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청소년들의 내면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과거에 비해 집중 시간이 짧고 의지력이 약해졌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오늘날 청소년들의 마음속에도 이전 세대 상급 학생들과 다를 바 없는 갈망이 깃들어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원한다.
- 자신의 삶에서, 그리고 더 큰 세상 속에서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 주변 사람들 및 더 큰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과 유의미한 관계를 갈망한다.
- 자신에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음을 느끼고 싶어 한다.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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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상급에 올라온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추상적인 접근은 적절하지 않다. 내가 택하는 방식은 '문학작품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이다. 수십 년 동안 발도르프 과학교사들은 관찰 가능한 구체적인 실험에서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해왔다. 추상적인 이론을 먼저 세워놓고 그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현상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현상 그 자체가 말할 수 있도록 조용히 지켜보는 실험이 훨씬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아이들에게 세상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문학작품에서 우리가 관찰하려는 '현상'은 바로 종이 위에 적힌 단어들이다. 그 속에 담겨 있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해석상의 결론을 추측하는 것보다 원전 자체에 충실한 편이 교육적으로 훨씬 이롭다. 이야기나 시의 구조가 어떻게 의미를 확장시키는지를 알아보고 극의 시작부터 결말까지 등장인물의 성격에 어떤 변형이 일어나는지 도표로 만들어보기도 한다. p41-42
비극과 희극을 공부할 때 아이들은 자기들도 내면에서 그 양극적인 감정의 부대낌을 매일 같이 겪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시작된 주관적 세계와 외부의 객관적 세계에 대한 관심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나마 인식한다. 발도르프 교육의 중심 원리 중 하나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과학실험을 하고, 희곡을 읽을 때 그 속에서 양극성을 자주 경험할수록, 미숙한 채로 세상에 끌려 다니다가 자신을 잃거나 파멸할 위험이 적어진다는 것이다. 수업 속에서 수많은 양극성을 체험하면서 이미 일종의 마음의 평정, 중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p46-47
9학년들에게 뭔가를 정확히 잘 보라고 요구하는 것은 물통을 지고 연못에 들어가 깨끗한 물을 떠오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을 뜨려고 걸어 들어가는 자신의 움직임 때문에 바닥이 휘저어져 흙탕물이 되어버리는데 어떻게 맑은 물을 길어올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9학년 아이들에게는 주변 세상을 가능한 한 엄밀하고 정확하게 관찰하라고 요구한다. 관찰을 위해선 내적으로 고요하면서 깨어있어야 한다. 화학 수업 시간에는 물이 담긴 비커에 열을 가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순서대로 꼼꼼히 관찰한다. 예술사 시간에는 그리스 조각이나 르네상스 시대 작품을 그 비할 데 없는 우아함과 아름다움까지 똑같이 표현하려 애쓰면서 모사하고 조각한다. 인간 형상의 아름다움을 공부하는 것은 대중매체가 청소년들에게 쏟아내는 저급하고 영혼 없는 성적 이미지에 대한 좋은 해독제가 된다. p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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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물질주의 세계관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물질세계에 튼튼히 자리잡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관찰 훈련은 아이들이 '세상에 뿌리 내리기'를 도와주고, 상상력 훈련은 '내적인 유연성'을 키워준다. 9학년들에게 키워주려는 세 번째 자질은 '자신감'이다. 세상이 어떤 법칙에 따라 진행되어 간다는, 그리고 자신이 그 법칙을 이해할 힘을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을 말한다. 인간에게 문법은 그 확신에 이르게 하는 완벽한 수단이다.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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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장점과 특징을 집약한 작품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서정시 같은 문장과 극적인 감정교류, 서사시적 시야까지 모든 요소를 갖춘 소설은 흔치 않은데다, 아직은 우주적 주제나 문학적 기교가 너무 많은 작품을 소화하기 힘든 9학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작품을 찾기란 더욱 어려운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 끝에 9학년 소설 수업을 위해 몇 년 동안 선택했던 작품은 다름 아닌 허먼 멜빌의 걸작 '모비 딕'이다. 다른 학교 교사들은 이 말을 듣고 농담하지 말라며 이렇게 말했다. "모비 딕은 길이가 방대하고 내용도 어렵고 심오하기 때문에 적어도 11, 12학년 이상은 돼야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9학년밖에 안 된 아이들에게 그렇게 무거운 책을 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요구입니다."
하지만 '모비 딕'은 많은 점에서 9학년에게 딱 맞는 작품이다. 이 책에는 9학년에게 꼭 필요한 세 가지 요소가 있다. (1) 최고의 모험소설이자, 집을 떠나 거대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원형적인 여정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2)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에이허브 선장, 버림받고 정신이 이상해진 가련한 흑인 소년 핍, 품위 있는 '야만인' 퀴퀘그, 선장을 그림자처럼 보필하는 조로아스터교 신자 페들러, 작가 멜빌의 겸손한 분신이자 작품의 화자인 이슈마엘, 그리고 거대한 흰 고래가지 등장인물마다 강려란 매력을 지니고 있다. (3) 멜빌은 심오하고 추상적인 사색과 포경업에 대한 생생한 묘사의 균형을 멋지게 맞춘다. 구체적 현실 속에 탄탄하게 자리 잡은 사고를 필요로 하는 9학년들은 19세기 기술로 고래 기름을 채취하는 장면의 살아 있는 묘사에 깊이 매료되곤 한다. p64
9학년들에게 결말이 불행한 이야기를 수업에 써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처절하고 비참한 결말이라면 '오이디푸스 왕' 같은 작품이 어디 있고, 가슴 아픈 비극이라면 '로미오와 줄리엣'을 능가할 작품이 어디 있는가? 게다가 이 나이는 인생의 '어둠'을 탐닉하는 때다. 이런 '영혼의 고통'을 통해 세상의 고뇌를 자신의 것처럼 아프게 공감하는 능력이 자라는 법이다. 실제 삶에서 그런 어둠을 안고 사는 것보다는 책을 통해 간접 경험하는 편이 훨씬 낫다.
하지만 비참하고 충격적인 것을 갈망하는 사춘기 아이들의 영혼의 허기를 과도하게 자극하지는 말아야 한다. 아무런 희망도, 구원의 가능성도 없이 독자를 좌절과 절망에 몰아넣고 끝나는 책이 얼마나 많은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도 그런 작품에 속한다. 우리는 9학년들에게 이런 책은 될 수 있으면 주지 않으려 한다. 아직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감수성이 예민하고 여리기 때문이다. 인간적 기쁨과 슬픔을 모두 담은 이야기, 절망도 있지만 그것을 치료할 믿음도 함께 담고 있는 이야기를 찾아야 한다. p7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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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은 세상의 모든 불공정과 고통을 바로잡으려는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동시에 자신의 편협함과 삐딱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들이다. 이들에겐 닮고 싶은, 이상의 살아 있는 본보기가 필요하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애티커스 핀치는 백인 여자를 강간했다는 혐의로 억울하게 기소된 결백한 흑인 남자를 변호하기로 한다. 핀치는 뿌리 깊은 편견 앞에서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도덕적 강직함과 신념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p79
'안네의 일기'로는 9학년들과 다양한 각도에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 첫째, 이 책은 9학년들에게 매일 일기 쓰는 습관의 장점을 알려준다. 또 비밀 벽장에 숨어서 보낸 몇 년의 세월을 당사자의 눈으로 보여주는 일기를 읽으면서, 아이들은 상상도 어려울 만큼 참혹했던 역사적 사건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현대 미국을 사는 10대의 삶이 아무리 버겁다 해도 안네의 시련 앞에선 작아보이기 마련이다. 아이들은 안네 역시 평범한 청소년이었음을 느낀다. 안네의 글에는 또래 아이들이 쉽게 감정 이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춘기의 갈망과 낯설지 않은 자아도취, 앞으로 펼쳐질 인생의 가능성에 대한 부푼 기대가 뒤섞여 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살려주신다면 난 엄마의 삶보다 많은 일을 해낼 거야. 나는 절대 시시한 사람으로 살진 않을 거야. 나는 세계와 인류를 위해 일할 거야."
"가끔 난 좀 특이한 짓을 해.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나 자신을 바라보는 거야. 그럴 때면 나는 '안네'라는 어떤 아이에게 일어나는 일을 편안하게 바라봐. 아무 상관 없는 사람처럼 그 아이 삶을 가볍게 책장 넘기듯 보는 거지."
"나는 젊고 내겐 숨겨진 보석이 많아. 나는 젊고 강하고 엄청난 모험을 살고 있어. 나는 아직 그 모험 한가운데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 긴 하루를 푸념으로 보낼 순 없지. 나는 받은 게 참 많아. 천성적으로 밝고 활기차고 쾌활하지. 매일같이 나는 내가 내적으로 성장하고 잇고 자유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껴. 자연이 정말 아름답다고, 내 주위 사람들이 정말 좋은 이들이라고, 그리고 이 모험이 정말 흥미진진하다고 느껴! 그런 내가 왜 절망에 빠지겠어?'" p7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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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다시 한 번 10학년들은 오디세우스의 상태에 공감한다. 아동기와 성인기의 중간 단계를 힘겹게 건너는 와중에 어린 시절에 누리던 귀한 '선물'을 잃어버려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 선물은 세상과의 일체감, 끝없는 놀이를 가능하게 했던 넘치는 상상력, 시간에 대한 망각, 자의식 부재로 인한 자유로움이었다. 이런 타고난 능력이 시들면서 아이들은 고향의 어느 후미진 골짜기에서 정신을 차린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이 버림받고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다.
하지만 사춘기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다. 시련을 이겨내고 '본향'으로 돌아가는 긴 항해를 마친 오디세우스처럼, 아이들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 건강한 자아에 이르게 된다. 빛나는 어린 시절을 기꺼이 뒤로 하고, 내면의 폭풍우를 다스리고 세상의 시련에 맞설 새로운 능력을 연마해야 한다. 더불어 호메로스는 그 어두운 절망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청소년들을 ㅜ이해 늘 그 자리에 서서 방향을 일러줄 존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오랜 세월 한마음으로 기다려주는 아이들만의 페넬로페이며, 자신의 순수하고 높은 자아에 대한 상이다. 페넬로페는 자아 탐색의 길 위에 선 모든 오디세우스를 두 팔 벌려 기다린다. 그녀의 따뜻한 품은 길고 험난한 여정을 이끄는 힘의 원천이며, 여정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귀중한 보물이다.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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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청소년들과 함께 살거나 가르치는 사람은 그들의 시에서 어떤 계시나 감추어진 재능이 드러날 수 있음을 항상 염두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으려면 교사 스스로 상상력, 영감, 직관의 힘을 갈고 닦아야 한다. 지금의 모습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상상력, 내뱉는 말뿐만 아니라 투덜대고 비판하는 말 속에 감추어진 내밀한 갈망을 들을 수 있는 영감, 그들과의 간극을 연결하고 바쇼가 말했던 '내면의 희미한 빛'을 진정으로 경험할 수 있게 아이들의 고뇌, 분투에 눈높이를 맞추어줄 직관력이 필요하다.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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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학년이 되면서 새로운 힘에 눈뜨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하나둘 등장한다. 그들은 더 넓게 볼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써보고 싶어 안달한다. 이런 아이들에게 도전 과제로 제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문학작품, 인류가 거쳐온 거대한 여정 전체를 보면서 창조부터 종말까지 시간의 극한으로 시야를 확장해보게 할 수 있는 작품이 있다. 바로 성서다. p105
발도르프학교의 다른 수업에서처럼 교사는 신이 나서 아이들에게 설교하고 해석해서 교훈을 주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수많은 성서 속의 이미지와 주제들이 스스로 말하도록 내버려두는 '현상학적' 접근은 교사의 어떤 설교보다 훨씬 풍성한 수확을 낳는다. 10학년들은 자기들이 지금 겪고 있는 사춘기와 그에 상응하는 성서 속 사건들을 나란히 비교하기를 원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삶이 외부의 강제에서 내면의 자유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감지한다. 더욱 자신다워지는 과정에서 11, 12학년 즈음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될 내면적 충돌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긴 해도 말이다.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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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10학년 때는 그리도 자신만만하던 아이들이, 바로 몇 달 전만 해도 기세등등하게 으스대고 잘난 척하고 큰 소리 뻥뻥 치던 아이들이 왜 11학년이 되면서 갑자기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부를 법한 이상한 증상을 보이는 걸까?
(...) 마크는 최근 자신의 상태를 '두렵다, 뿌연 안갯속에 있는' 것 같다는 말로 설명했다. 그러더니 11학년들의 심리상태를 기가 막히게 표현하는 짧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전 지금 제 안에 있어요."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기는 지금 자기 안에서 헤매고 있다고 했다. 마크는 자기 내면에 지금껏 몰랐던 많은 방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관심을 두기 시작하고 있었다.
유명한 발도르프 교육 강사이자 내 오랜 동료인 더글라스 거윈은 이 시기 청소년들의 상태를 이런 말로 설명한 적이 있다. 16세, 17세 아이가 넓은 집안을 돌아다닌다고 해보자. 아이는 익숙한 방들을 천천히 지나면서 창밖으로 어려서부터 보아오던 거리 풍경을 내다본다. 그러다가 문 하나를 발견한다. 열어보니 지금껏 있는지도 몰랐던 별채가 나온다. 낯설고 어두침침한 복도를 따라 들어갈수록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갑자기 발밑에서 바닥이 우지끈 무너진다. 정신을 차려보니 지하 감옥같이 생긴 캄캄한 지하실이다. 사방엔 온통 기괴한 그림자에다 낯설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린다. 많은 11학년이 자신의 '영혼 풍경'을 이와 비슷하게 느낀다. 어둡고 기분 나쁜 방으로의 갑작스런 추락, 어떤 무서운 진실을 마주하게 될지 모르지만 어쩐지 자꾸 자기들을 손짓하여 부르는 방. (...)
이런 이유로 해서 전 세계 발도르프학교에서는 11학년들에게 죽은 자들이 거하는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불안한 발걸음을 옮기는 순레자 단테를 소개한다. 또 11학년들은 아서 왕의 원탁에서 쿤드리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는 파르치팔과 정의로운 행동의 방향에 대한 번민으로 괴로워하는 햄릿도 만난다. 이 세 인물이 11학년 문학 수업의 핵심으로, 한편으론 '변형', 다른 한편으론 '관계성'이라 부르는 주제를 구현한다. p11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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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치팔은 자신의 혈통이나 바깥 세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말을 탄 기사 세 명이 파르치팔 곁을 쏜살같이 지나간다. 햇빛이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이는 갑옷에 넋을 잃고 그들이 신이라고 생각한 파르치팔은 자기도 기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어머니께 그 결심을 고한다. 말려봐야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헤르체로이데는 마지못해 허락하지만, 아들에게 어릿광대 의상을 만들어 입히고 일부러 얼토당토 않는 조언을 한다. 세상 사람들이 아들을 홀대하고 업신여기게 만들어서 더 큰 불행을 만나기 전에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이 장면에서 헤르체로이데의 그릇된 양육 태도를, 자녀를 과잉보호하는 부모들이 다 큰 아이들을 '온실 속에 가둬' 키우려는 태도와 비교하며 열변을 토하곤 한다. 부모님이 열두 살까지 영화를 단 한 편도 못 보게 했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가 지금 영화 중독이 됐다는 학생도 있었고, 어떤 남학생은 누구네 집에 놀라간다고 하면 하나하나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엄마 때문에 미치겠다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반면 헤르체로이데의 방식이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사실 아들을 세상의 위험에서 보호하려 했던 것 아니냐며 그녀의 입장을 변호하는 학생들도 있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들을 아무런 원칙도 없이 마냥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풀어놓아서는 안 된다는 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그럼 직접 부모의 입장이 되어서 골치 아픈 자녀 양육의 원칙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내가 부모라면 우리 가정의 TV 시청 방침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나라면 열살짜리 아이에게 인터넷 사용을 무제한으로 허용할 것인가? 몇 살부터 음주, 마약, 섹스를 허락할 것인가? p15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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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가 청소년들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파르치팔이 첫 시도에서 실패했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는 실패를 대단히 불명예스럽게 여긴다. 아무도 실패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실패를 맛보지 않으려 기를 쓴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연약한 우리의 자아의식과 자존감에 금이 가기 때문이다. 실패는 의심을 낳는다. 하지만 그 의심에서 진정한 질문이 자라난다면(모든 질문에는 탐색이 내포되어 있다), 실패는 가장 큰 성장을 위한 기폭제가 될 수 있다. p160
파르치팔처럼 11학년들은 의심이 삶에서 진실의 빛을 찾아 헤매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온몸으로 경험한다. 파르치팔의 의심은 삶을 쌓아올린 토대에 균열이 생기면서 시작된다. 그 균열이 넓어지면서 그의 영혼에 새로운 앎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열린다.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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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의 고뇌는 상반되는 감정에서 기인한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복수해달라는 아버지의 명령과 모든 행위에 합리적 근거를 찾고자 하는 근대적 의식의 맹아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라고 느낀다. 학생들은 햄릿의 딜레마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특히 삶이 무엇이냐는 실존적 문제를 느끼기 시작한 아이들과, 정답이 없는 문제를 놓고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의 아이들이 그렇다. p167
아이들은 '햄릿'에 나오는 많은 행동의 밑바탕에는, 진짜든 위장이든 일종의 광기가 깔려 있음에 주목한다. 어떤 아이들은 그렇게 음험한 세상에 살면서 자신을 보호하려면 미치는 것 말고 방법이 없지 않겠냐고 말한다. 오필리아는 너무 의지가 약하고 순종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아이들은 그녀가 제정신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었던 심정을 이해한다. 햄릿의 '광기'는 오필리아의 경우와 다르다. 햄릿이 최후의 결투를 벌이기 전, 오필리아의 무덤 옆에서 그녀의 오빠 레어티즈에게 자신의 난폭한 행동에 대해 용서를 구하면서 하는 말을 우리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p171
햄릿은 복수나 배신, 광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의식의 출현에 대한 이야기이며,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개인의 이야기다. 아이들은 11학년 수업에서 만난 인물 중 햄릿에게서 가장 많은 동질감을 느긴다. 자그마치 400년 전 이야기지만 햄릿은 이 시대 아이들과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자의식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들과 똑같은 고민을 한다. 인생의 의미, 죽음의 의미, 죽음의 문지방 너머에 놓인 신비 같은 문제를, 아이들은 자신들 모두가 햄릿이라는 사실을, 더는 과거의 망령이 내리는 지시나 명령에 순종하며 살 수 없는 존재임을, "하늘과 땅 사이를 기어 다니면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야 하는 처지임을 깨닫는다. 햄릿처럼 발 딛고 서서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한 행동을 주체적으로 펼칠 수 있는 테라 페르마(육지)를 찾는다. 그것은 어쩌면 거친 바다에 솟아오른 작은 섬일지도 모른다. 셰익스피어는 매혹적인 마법으로 가득 찬 최후의 작품 '템페스트'를 통해 아이들에게 그 섬을 선사한다.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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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학년들은 자연이 신이 만든 작품이라는 말에 코웃음을 치기도 한다. 사실 이 나이에 아이들은 고차의 힘을 가진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빠진다. 그러나 자연에는 인간의 도덕성을 고양시키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다고 하는 워즈워스의 말 자체를 완전히 허무랭랑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한 발 더 나아가 워즈워스는 자연이 인간을 명상과 같은 상태에 들어가게 해주며, 그 속에서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볼 힘을 갖는다고 믿는다.
'낙원'과도 같았던 어린 시절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10대 청소년들은 '만물의 생명을 꿰뚫어보는' 상태를 경험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이 근본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생각' 자체는 청소년들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준다. 자연의 근본이 신성하다는 말에 공개적으로 단호한 반론을 제기하는 아이들도, 지금껏 동서고금의 위대한 인물들이 두터운 장막을 걷어 자연의 정신적 토대를 밝혀주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p19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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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과 자기혐오는 10대들에게 굉장히 익숙한 감정이기 때문에 교사는 굳이 이를 아이들의 상태와 비교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저 뱃사공의 고통을 표현해보라고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저주가 풀리는 순간이 언제인지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가슴 찢는 고뇌를 이기고 뱃사공이 '자기 밖으로' 눈을 돌렸을 때, 그 눈길이 물속을 오가는 피조물의 아름다움에 미쳤을 때, 비로소 그의 내면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음을 아이들은 금방 이해한다.
이는 또한 청소년들에게 꼭 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정말 중요한 교훈을 준다. 흔히 인정하다시피 이 나이 아이들은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몰두하곤 한다. 사실 인생 전체를 통틀어 자기도취 또는 자기몰두의 절정기라 할 수 있다. 물론 자기 고유의 내면세계가 꽃피기 시작하면서 그 깊이와 차원을 넓혀가는 시기임을 생각하면 그래야 마땅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강박적일 정도로 자기에게만 매달리다가 세상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자신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고립이 우울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너무 흔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뱃사공은 구원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것은 마침내 고통을 겪은 자의 눈으로 자연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간의 비통함이 그의 내면에 공감의 씨앗을 뿌렸다. 앞서 길가메시나 파르치팔, 프로스페로처럼 뱃사공 역시 자비의 미덕을 배운다. 하지만 그의 경우에는 이유 없는 살상이라는 무분별한 행위 뒤에 그것을 얻는다. 그는 자연을 훼손했고, 초자연적인 세계가 그 행위에 응답했다. 뱃사공은 축복에 이르는 길을 스스로 찾아내면서 저주를 견뎌내야 했다. p197-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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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학년들은 '되어가는' 존재라는 말의 의미를 절감한다. 지금까지 겪은 사춘기를 객관적으로 반추할 힘이 생기면서, 그 짧은 몇 해 동안 자신들이 얼마나 성숙해졌는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감 없이 눈치 보며 남을 흉내내던 시기도 있었다. 어딘가 소속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또래 집단에 합류했다. 다른 아이들이 입는 옷을 입고, 10대들의 은어, 말투를 따라하고, 집단이 승인한 대상에게 반항했다. 하지만 진정한 자기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한 지금은 자기만의 고유성을 더 귀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지금까진 반에서 별로 인기가 없던 괴짜나 유별난 취향을 가진 아이들이 이제는 독특한, 하지만 진짜 자신의 색깔을 가진 인간으로 대우받는다. 이런 아이들에게 독창성을 추구하라는 권고가 귀에 쏙 들어오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대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그대 마음에서 진리라고 생각한 것이 모든 사람에게 진실임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천재성이다." 에머슨은 진정한 자아를 향한 아이들의 내밀한 갈망을 건드린다. p209-210
나는 12학년들에게 에머슨의 자아 찬양과 맥을 같이하는, 짧지만 대단히 어려운 과제를 내준다. 이름하여 '독창적인 생각' 써보기다. 지금까지 이런 생각을 말로 표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확신하는 내용을 써보는 것이다. 처음엔 불가능한 과제라는 둥, 새로운 생각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모두 알고 보면 옛것을 고쳐 쓴 것에 불과하다는 둥 온갖 불평을 다투어 쏟아놓지만, 곧 나름대로 진지하게 과제에 몰두하곤 한다.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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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슨과 소로, 호손, 휘트먼, 디킨슨의 작품을 읽고 그들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아이들은 다면적 사고 능력을 갈고 닦을 최적의 기회를 얻는다. 이 작가들 모두 인간 본성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갖고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발췌해 읽으며 아이들은 '자립'에 대한 에머슨의 철학적 주장을 소로를 통해 타협 없는 행동 원칙으로 전환되는 것을 본다. 관념적, 추상적이었던 에머슨의 사상을 이해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던 많은 학생들이 소로의 세계에서 튼튼한 현실감을 발견한다. 어떤 학생들은 일상의 이야기를 소박하게 적는 소로의 문체와 에머슨의 '사상을 편안하게 풀어놓는'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에머슨보다는 소로가 의지와 실천을 좀 더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소로는 삶을 '단순하게 하고 또 단순하게 하라'고 간곡히 호소한다. 수없이 많은 전자기기가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깨어있는 낮 시간에 휴대전화나 아이팟, 텔레비전, 컴퓨터 없이 8시간 이상을 보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요즘 아이들은 소로의 이런 외침을 통해 새로운 각성과 감동을 얻기도 한다.
12학년들이 소로의 사상을 만나는 것은 많은 아이가 대학입학 전형에 얽힌 복잡한 문제로 머리와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아이들은 타인의 기대를 외면하라, 미래를 위해 즐거움을 유보하지 말라, 사회가 말하는 성공을 좇지 말라는 소로의 말이 자신의 마음을 대변한다고 느낀다. "사랑보다, 돈보다, 명예보다, 내게 진실을 달라." 에머슨처럼 소로도 아이들의 내면에, 미래뿐 아니라 바로 오늘을 의식적으로 살아가는 힘을 스스로 일깨우고 붇돋운다.
소로는 유명한 '시민 불복종'에 관한 글에서 이를 한층 더 발전시킨다. 여기서도 소로의 글은 독립을 쟁취하고자 분투하는 젊은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며, 그들을 더욱 대담하게 만든다. p213-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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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먼은 모든 형식을 가차없이 파괴했다. 그의 시를 읽은 학생들은 왜 그가 '현대시의 아버지'라 칭송받는지 대번에 이해한다. 휘트먼은 글이라는 형식에서 지금껏 아무도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자유로운 방식으로 노래한다. 행은 아무 제약 없이 길게 이어지고, 오직 높아졌다 낮아지는 어조에만 음악적 느낌이 담긴다. 휘트먼은 새로운 시 형식의 개척자일 뿐 아니라, 에머슨이 '시인'이라는 수필에서 찾고자 했던 '우리 시대와 사회적 상황을 노래'할 수 있는 시인이었으며, 단테처럼 감히 자신의 자서전 속에 보편성을 다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p222
휘트먼이 12학년들의 마음에 크게 공명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시야가 광대무변하다는 데 있다. 삶의 가능성이 내면에서 솟구쳐 오른다고 느끼는 아이들의 심정을 대변하듯, 휘트먼은 모든 인간 존재 내면에 감추어진 방대한 깊이와 우주적 그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p223
이 작품으로 수업할 때 나는 어떤 단어가 가장 강한 인상을 주냐고 묻는다. 학생들의 읙녀은 대개 '밸브'로 모인다. 이 단어의 멋진 이중적 의미 때문이다. '심장 판막'도 밸브라고 하지만, 차갑고 영혼 없는 기계에도 밸브가 있다. 이 두 의미가 시 전체에서 공명한다. 눈앞에서 문이 쾅 닫히는 느낌이 들 만큼 무뚝뚝하게 끝나는 마지막 문장은 시어의 배치가 내용을 강화시킨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한다.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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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줄어들 줄 모르는 테러와 폭력, 세계를 좀먹는 기아와 고통, 악에 깊이 물든 오늘날 세상 속에서도 많은 상급 학생이 자기들에게 그런 문제를 풀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낙관한다. 위대한 문학의 샘물을 맛본 청소년들은 냉소주의나 절망에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청소년들은 본래 인생의 한계보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바라보고, 부풀어오르는 이상에 짓눌리기보다는 거기서 힘과 용기를 얻고 길을 찾는 존재들이다. '파우스트'를 읽은 12학년들은 인간 영혼 속에 깃든 어둠의 힘과 그 어둠에 맞설 수 있는 자아의 힘 모두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파우스트'는 순간의 선택에 엄청난 의미가 담길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자신뿐 아니라 개개인이라는 모든 원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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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르프학교 12학년 학생들에게 동화는 지적인 과제인 동시에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감상적인 여정이 된다. 아이들 대부분은 저학년 때 모든 수업의 근간을 이루던 동화를 따뜻하게 기억한다. 글자를 처음 배울 때, 숫자, 형태그리기 모두 이야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이제 12학년이 된 아이들은 동화에 담긴 심오한 의미를 알고 싶어한다.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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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 이 상태의 당신들의 사회가 우리 러시아가 변혁해나가야 할 이상향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러시아는 극심한 시련을 겪으며 높은 정신의 발달을 이룩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고갈된 현재의 서구 사회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인간이 점점 약해지고 있지만, 동양에서 인간은 갈수록 강하고 굳건해지고 있다는 것은 반론의 여지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서구 사회의 경험을 훨씬 앞지르는 정신적 훈련을 겪어왔습니다. 삶의 복잡함과 죽음의 무게는, 표준화된 서구의 복지 속에서보다 훨씬 강하고, 깊이 있고, 흥미진진한 특성을 갖게 했습니다. (솔제니친, 분열된 세계)"
솔제니친은 이 문제에 대해 권위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서방으로 추방되기 전, 10년 동안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 생활과 유배로 험난한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역경과 노력보다 안락과 편리함을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자란 청소년들은 서구의 가치관에 대한 솔제니친의 비판을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솔제니친이 민주주의의 근본을 공격했다고 오래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의 비판은 탐욕스런 대중매체와 지나친 소비주의,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본주의처럼 자유 사회에 있을 수 있는 일부 극단적인 모습에 해당된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선언하는 인본주의가 옳다면 인간은 죽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심을 갖고 태어났다면 지상에서 인간의 과제는 분명 더욱 정신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매일의 삶은 한도 끝도 없이 즐기는 것일 수 없습니다. 물질적 재화를 손에 넣을 최선의 방법이나 거기서 한푼이라도 더 끌어내려고 기를 쓰는 것일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과제는 영원하면서도 진지한 의무를 완수하는 것이 되어야 하며, 그랬을 때 한 인간의 인생 여정은 도덕적 성장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시작했을 때보다 조금은 더 나아진 인간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분열된 세계)."
솔제니친의 연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12학년들이 품고 있는 많은 질문의 핵심에 정면으로 칼을 겨눈다. 상급과정을 마치자마자 대학이나 음악학교 아니면 요리학교로 직행해서 고소득 직장과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을 향한 지름길에 오를 것인가? 여행을 하거나 농장이나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기관을 찾아 일하면서 인생의 의미와 목표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것인가?
문학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길 안내를 찾을 때, 19, 20세기 러시아 작가들은 동시대 미국 작가들과 다른 독특한 관점을 제시한다. 두 나라 작가를 비교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글의 종류이다. 미국 작가들은 수필, 저널, 서간문, 시, 단편 소설, 장편 소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글을 쓰는 반면,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은 거의 시와 소설밖에 없다. 왜 그럴까? 차르 시대와 뒤이어 등장한 소비에트 연방 시절 모두 검열이 철저했던 러시아는 정권에 비판적인 발언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 작가들은 자신의 견해를 시와 소설 형식 속에 감출 수밖에 없었다. p250-252
이반 일리치가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 통찰은 12학년 학생들이 지금껏 주변 사람들과 문학작품을 통해 늘 만나왔던 진실을 재확인시킨다. 누구나 어느 정도의 고통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아이들은 일찍부터 배운다. 고통은 인생이 자아의 변형가 성장을 위해 마련한 장치이며, 개인의 아픔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면 그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있고 자비와 연민을 베풀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지옥 같은 몇 년을 보내고 평생 동안 간질발작에 시달리는 삶을 살면서도, 푸시킨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연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고통이 가진 이런 변형의 힘에서 기인한다. "진정한 러시아인이 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형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p258-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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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12학년들은 상급과정을 총망라하는 수업으로 메리 짐머만이 오비디우스의 고전 신화 '변신 이야기'를 각색한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처음엔 아이들 대부분이 현대와 너무나 동떨어진 작품이라며 탐탁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본을 정독하고나서는 짐머만이 선택해서 현대극으로 각색한 이야기들 모두 오늘날의 현실과 통하는 점이 많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탐욕 때문에 딸마저 황금 동상으로 만들어버린 '마이다스' 이야기는 오늘날 기업과 정부의 탐욕 때문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건들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p259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것은 이야기의 중심마다 담겨 있는 '변형'이라는 요소다. 죽음이 연인을 갈라놓지만 두 사람 모두 물새로 변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신들에게 오만방자하게 군 죄로 배고픔의 벌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마지막 식사가 된다. 게다가 실제 연극을 진행하는 동안 배역을 맡았던 젊은 배우들에게는 막이 바뀔 때마다 역할을 통째로 변형시키는 과제까지 주어졌다. 신화 속 인물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엄마였다가 어린 소녀가 되었다가, 신이었다가 거지가 되었다가, 인간이었다가 물이나 나무, 금덩어리가 되는 식으로 자신을 바꾸어야 했다.
변화의 폭이 클수록 연습 과정 중 깨닫게 되는 진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신의 존재와 도움을 믿건 아니건 아이들은 이 연극을 통해 변형이 가진 힘을 온몸으로 체득한다. 변형은 인간에게 주어진 크나큰 선물임 동시에 인간이기에 치러야 하는 크나큰 대가다. 한 12학년 학생의 말을 빌자면 삶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성장할 기회를 준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며, 나쁜 소식은 우리가 그 성장의 기회를 자주 불신하고 때로는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이들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할 때, 지금의 이 절망이 절대 사라지지도 상황이 절대 변하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죽을 것 같은 마음의 고통을 겪는다. 불쌍한 어린 딸 미르는 아버지를 꾀어 잠자리를 같이한 뒤 가슴이 찢어질 듯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을 안고 평생을 살아간다. (...)신에게 간곡히 기도한 뒤, 그녀는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녹아 없어진다. 삶을 부정하는 도피, 이것 역시 일종의 변형이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고통 앞에서 자살은 너무나 매혹적인 대안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연극 전체의 흐름은 삶을 가장 긍정하는 형태의 변형으로 끝을 맺는다. p260-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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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12학년들이 배우는 마지막 교훈이다. 사실 인간의 조건을 그린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다. 안네 프랑크, 오디세우스, 길가메시, 파르치팔, 프로스페로, 늙은 뱃사공, 이반 일리치, 그밖에 많은 인물처럼 아이들도 사랑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변형의 힘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인간의 가장 저급한 물질 욕구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마이다스 역시 '변신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 담긴 진실에 이른다. 자신 때문에 갇히게 된 딸을 황금 감옥에서 풀어주고자 그는 별빛이 비치는 연못을 찾아 세상 끝까지 걸어간다. 그 연못에서 지치고 겸손해진 그는 몸을 굽혀 손을 씻는다. 그 순간 기적처럼 딸은 다시 생명을 얻는다.
하늘의 빛이 반사되는 지상의 연못과도 같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이들 역시 생명을 얻는다, 가끔씩은. p262-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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