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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이야기/수업 이야기

문학교육의 정체성을 묻다 _ 발도르프 학교의 문학교육

by 릴라~ 2017. 5. 28.

5교시 문학시간, 교실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충분한 시간을 주었지만 아이들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K고 이과반 서른 두 명의 학생들은 '아니 선생님,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욧?' 하는 듯한 표정으로 눈만 멀뚱멀뚱 뜬 채 나를 쳐다보았다. 몇몇은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 같았다.

, 이건 아닌데. <메밀꽃 필 무렵>이 이렇게 지루한 소설이 아닌데......’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침몰하는 배의 선장이 된 기분으로 어떻게든 이 배가 졸음의 바다 속에 가라앉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마침내 반가운 마침종 소리를 들었다.

문학수업은 교사가 작품의 어떤 면에 초점을 두는가에 따라 수업내용이 많이 달라진다. 내가 처음에 이 소설에서 주목한 부분은 주인공 허생원의 상반된 두 가지 모습이었다. 낮의 허생원은 초라한 중년의 사나이다. 외모도 시원찮고 가진 재산도 없으며 장터의 아이들에게조차 놀림을 받는 왼손잡이 반늙은이다. 가족도 없이 반평생을 이 마을 저 마을 떠돌며 생계를 이어간다.

반전은 메밀꽃 핀 밤길에서 일어난다. 허생원은 그곳에서 딴 사람처럼 활기를 되찾고 삶의 희노애락을 아는 온전한 한 인간으로 회복된다. 이 소설에서 메밀꽃 핀 밤길은 주인공 허생원이 삶의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는 공간이자 본연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공간이며, 인간적인 대화가 이어지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등장한다.

나는 우리 삶에도 그런 초월적인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허생원이 속해 있는 두 개의 세계를 대비하면서 우리는 어떨 때 일상적인 모습을 넘어 본연의 자아, 즉 더 깊고 넓은 의미의 자신을 느끼게 되는가 하는 질문을 제시했다. 우리 모두에겐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인간미를 회복할 수 있는 그런 시공간이 필요하다고, 그곳은 우리가 잊고 있던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그런 곳일 거라고.

결론은 침묵이었다. 학생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교실 분위기는 좍 가라앉았다. 어찌어찌 수업을 끝내고 나서야 수업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청소년기와 중년기는 삶의 과제가 다르다. 융 심리학에 따르면 청소년기가 외부 세계에 적응하며 관계 맺는 법을 배우는사회화의 단계라면, 중년기는 사회적 역할에 집중하느라 돌보지 못했던 자신의 다른 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개성화의 단계이다. 문학작품에서 내 마음을 흔드는 부분이 아이들에게 똑같이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막 중년에 접어든 내가 세상과 일정 부분 거리를 두고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고자 한다면, 아이들은 이제 세상 속으로 힘차게 발을 내딛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고등학교 1학년의 성장단계에 맞는 화소가 뭐가 있는지 다시 곰곰 들여다보았다.

시대를 불문하고 사랑 이야기만큼 보편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의 하룻밤 이야기에서 수업 말문을 열어보기로 했다. 자칫하다가는 지루한 철학교사가 되기 십상이라고 자신을 나무라면서 나는 다음 반에서부터 화제를 바꾸었다.

여러분은 이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밤중에 멱 감으러 갔더니 동네에서 제일 예쁜 성서방네 처녀가 집이 망해서 떠나게 되어 울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같이 잘 수 있을까요?”

한 남학생에게 마이크를 주니 당황하며 말했다.

, 안 돼죠, 선생님. 잘 달래서...”

잘 달래서?”

, 집으로 돌려보내야죠.”

정말?”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다.

그 옆 친구에게 마이크를 돌렸다.

저도 돌려보낼 거예요. 저 나름 젠틀맨이라구요.”

이번엔 수업시간에 매일 딴짓을 하곤 하는 농땡이 녀석에게 마이크를 돌렸다.

성서방네 처녀를 발견했어요. 어떡할 거예요?"

......”

녀석은 한참 뜸을 들이더니 신나게 말했다.

아주 좋은 기회죠, 선생님.”

여학생들이 우우~” 하고 야유를 보낸다.

여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허생원에게는 그날이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성서방네 처녀에게도 과연 그럴까요? 아이까지 배어서 마을을 쫓겨났다고 하는데요. 여러분이라면 처음 보는 남자와 잘 수 있어요? 그럴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스물 몇 명의 여학생들 중에서 딱 한 명이 손을 든다.

처음 보는 사람과 가능할까요?”

선생님, 정우성처럼 생겼으면 가능할 것 같아요.”

아이들 사이에서 ~” 하는 공감의 반응이 쏟아진다. 서너 명의 여학생이 손을 더 든다.

선생님, 정우성이면 저도 가능할 것 같아요.”

이번엔 다행히 성공이었다. 아이들의 반짝반짝 하는 눈빛은 50분을 버텨냈다.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의 로맨스에서 시작된 대화는 허생원과 동이가 함께 걸어갔던 봉평에서 대화에 이르는 환상적인 밤길로 이어졌다.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폭력 혹은 무책임한 일탈이었을까. 그 물음에서 시작한 우리의 이야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이 있고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들리는 그곳, 작가가 작정하고 마련해놓은,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고 싶은 그 지점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문학수업 준비를 할 때는 고민이 많다. 수업방향도 고민이지만 청소년기에 문학을 통해 탐구할 수 있는 것이 고작 교과서에서 제시하는 단편적인 목표 수준에 불과한가 하는 의문이 항상 따라온다. 김소월의 <진달래꽃>반어적 표현, 채만식의 <이상한 선생님>풍자를 익히기 위해 존재하는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정해진 지식과 가치는 호소력이 약하다. 심리학자 사이토 가이토는 스스로 느끼기도 전에 미리 가치와 의미가 정해진 세계에서는 누구든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경험에서 자신의 감정대로 자연스럽게 느낄 때 가장 잘 배우게 된다. 따라서 미리 준비된 의미나 가치는 문학이 독자에게 미치는 잠재적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은 언제나 해석이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다. 문학작품을 표준화된 수업 시나리오에 따라 배우게 되면 작품과의 생생한 만남에서 비롯되는 긴장과 감동으로부터 멀어진다.

문제 출제가 쉽다는 이유로 시험에 자주 등장하는 문학적 수사 역시 작가가 삶에 대한 자기 인식, 즉 주제를 구현하기 위해 동원한 장치일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문학적 수사를 통해 드러나는 이 세계의 진실한 모습과 그 안에 담긴 작가의 세계관이다. 작가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한 진술로 전달하지 않고 이야기 속에 숨겨 놓는다. 그래서 문학은 언어예술이다. 예술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주는 것이다. 훌륭한 이야기는 언제나 독자에게 그에 버금가는 훌륭한 질문의 화살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인간 세상을 강렬하게 묘사한 작품을 통해 생생한 감정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샘솟는다. 문학만큼 다양한 논쟁이 가능한 장르는 잘 없다. 언어능력은 작품이 내게 주는 감성적 충격과 의문을 자유롭게 횡단하는 과정에서 세련되는 것이지, 작품에 대한 정해진 해석의 길을 밟아서는 얻을 수 없다. 학교교육과정에서 문학과목에 접근하는 방식이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슬론의 <청소년을 위한 발도르프 학교의 문학교육>은 문학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문학교육의 훌륭한 사례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문학은 입시의 주요 과목도, 정형화된 해석의 대상도 아니다. 그들은 문학을 청소년들의 자아 찾기 여정의 훌륭한 동반자로 인식한다. 문학의 교육적 가치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발도르프 학교의 아이들은 오디세이아, 신곡, 햄릿, 템페스트, 파우스트, 워즈워스와 휘트먼의 시 등 인간과 세계의 깊이를 한껏 탐구하도록 이끌어주는 작품들을 읽으며 청소년기를 통과한다.

발도르프 학교의 9학년부터 12학년까지의 문학수업 내용을 살펴보면 그들이 아이들의 발달 단계와 각 작품의 주제와 성격을 얼마나 세심하게 고려했는지 알게 된다. 9학년은 아직 우주적 주제를 다루거나 문학적 기교가 너무 많은 작품을 소화하기는 벅찬 나이다. 발도르프 학교는 이 나이의 아이들에게는 막연한 상상력보다는 물질주의 세계관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물질세계에 튼튼히 자리 잡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관찰 훈련을 중요시한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보여주는 <모비 딕>, <안네의 일기>, <앵무새 죽이기>9학년을 위한 작품이다.

<모비딕>은 집을 떠나 거대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모험 소설로 에이허브 선장, 흑인 소년 핍, 야만인 퀴퀘그, 화자인 이슈마엘, 그리고 거대한 흰 고래까지 등장인물이 매력적일 뿐 아니라 인생에 대한 심오한 사색과 포경업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균형을 이루는 작품이다. 19세기 기술로 고래 기름을 채취하는 생생한 묘사에 매료되면서 9학년들은 구체적 현실 속에서 사고하는 법을 배운다.

<앵무새 죽이기>9학년에게 이상의 생생한 본보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백인 여자를 강간했다는 혐의로 억울하게 기소된 결백한 흑인 남자를 변호하는 애티커스 핀치가 학생들의 좋은 모델이다. 그 나이의 청소년들은 세상의 모든 불공정과 고통을 바로잡으려는 열정으로 불타오르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편협함과 삐딱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핀치는 뿌리 깊은 편견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도덕적 강직함과 신념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인물이다.

비밀 벽장에 숨어서 보낸 몇 년의 세월을 기록한 <안네의 일기>는 아이들에게 상상하기도 어려운 참혹한 역사적 사건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평범한 청소년이었던 안네의 시련은 아이들에게 삶의 진짜 고난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안네가 표현하는 사춘기의 갈망, 자아도취,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대한 부푼 기대도 9학년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또한 매일 일기 쓰는 습관의 장점도 알려준다.

10학년을 위한 작품은 상징성이 좀 더 풍부한 <오딧세이아><성서>이다. 아이들이 오디세우스의 여행에 쉽게 공감하는 이유는 아동기의 성인기의 중간 단계를 힘겹게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과의 일체감, 끝없는 놀이를 가능하게 했던 넘치는 상상력, 시간에 대한 망각, 자의식 부재로 인한 자유로움이라는 어린 시절에 누리던 축복에서 멀어진 아이들은 고향의 어느 후미진 골짜기에서 정신을 차린 오디세우스처럼 자신도 버림받고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다.

하지만 시련을 이겨내고 본향으로 돌아가는 긴 항해를 마친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통해 아이들은 배운다. 자신들 또한 빛나는 어린 시절을 기꺼이 뒤로 하고 내면의 폭풍우를 다스리면서 세상의 시련에 맞설 새로운 능력을 연마해야 한다는 것을. 이 시기를 거치며 아이들은 건강한 자아에 이르게 된다. 오디세우스를 오랜 세월 한마음으로 기다려준 페넬로페처럼 자아 탐색의 길 위에 있는 자신들에게도 그들 자신만의 페넬로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자신의 순수하고 높은 자아에 대한 상이며, 여정의 끝에서 만나는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그리고 <성서>는 인류의 운명에 대한 아이들의 시야를 창조부터 종말까지 우주적으로 확대해준다.

11학년을 위한 작품은 두 가지 성격을 지닌다. <단테><햄릿>처럼 인간 내면의 어둠을 좀 더 심오하게 다룬 작품과 그 어둠을 위로해주는 자연의 위대함과 경이를 노래한 <워즈워스>이다. 11학년은 10학년 때 그리도 자신만만하던 아이들이 갑자기 변하는 시기다. 몇 달 전만 해도 잘난 척하고 큰 소리 뻥뻥 치던 아이들이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부를 법한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전 세계 발도르프학교에서는 11학년들에게 죽은 자들이 거하는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불안한 발걸음을 옮기는 순레자 <단테>를 소개한다.

<햄릿>은 아이들이 11학년 수업에서 가장 동질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자그마치 400년 전 이야기지만 햄릿은 이 시대 아이들과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자의식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들과 똑같은 고민을 한다. 인생의 의미, 죽음의 의미, 죽음의 문지방 너머에 놓인 신비 같은 문제를 다루며 아이들은 자신들 모두가 햄릿이며, 과거의 망령이나 타인의 지시가 아니라 이 세상을 자신의 힘으로 살아야 하는 처지임을 깨닫는다.

11학년 나이의 아이들은 고차원적 힘을 가진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이때 자연에 인간의 도덕성을 고양시키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다는 워즈워스의 시는 아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워즈워스는 자연이 인간을 명상과 같은 상태에 들어가게 해주며, 그 속에서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볼 힘을 갖는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10대 청소년들은 그런 상태를 경험하지 못하지만 인간과 자연이 근본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생각 자체는 청소년들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준다.

12학년에 만나는 작품은 에머슨, 소로, 휘트먼, 디킨슨, 솔제니친처럼 강한 개성과 주관을 지닌 작가들의 글이다. 12학년은 지금까지 겪은 사춘기를 객관적으로 반추할 힘이 생기는 시기이다. 학생들은 그 짧은 몇 해 동안 자신들이 얼마나 성숙해졌는가를 인식한다. 자신감 없이 눈치 보며 남을 흉내 내던 시기도 있었고, 어딘가 소속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또래 집단에 합류했던 시기도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입는 옷을 입고, 10대들의 은어, 말투를 따라하고, 집단이 승인한 대상에게 반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혼돈의 시기를 거쳐 진정한 자기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한 12학년은 자기만의 고유성을 더 귀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지금까진 반에서 별로 인기가 없던 괴짜나 유별난 취향을 가진 아이들이 이제는 진짜 자신의 색깔을 가진 인간으로 대우받는다. 이런 아이들에게 독창성을 추구하라는 권고가 귀에 쏙 들어온다. “그대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에머슨은 진정한 자아를 향한 아이들의 내밀한 갈망을 건드린다.

발도르프 학교는 12학년에게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쓰게 한다. 에머슨과 소로, 호손, 휘트먼, 디킨슨은 모두 인간 본성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갖고 있다. 그들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아이들은 다면적 사고 능력을 갈고 닦을 최적의 기회를 얻는다. 에머슨의 사상이 관념적, 추상적인 반면 소로의 월든이 보여주는 세계는 아이들에게 튼튼한 현실감을 갖게 해준다. 소로는 삶을 단순하게 하고 또 단순하게 하라고 간곡히 호소한다. 수없이 많은 전자기기가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휴대전화나 아이팟 없이 잠시도 보내보지 않은 요즘 아이들에게도 소로의 이런 외침은 새로운 각성과 감동을 준다.

많은 학생들이 대학입학 전형에 얽힌 복잡한 문제로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시점에 소로를 만나는 것이 특히 의미가 있다. 아이들은 타인의 기대를 외면하라, 미래를 위해 즐거움을 유보하지 말라, 사회가 말하는 성공을 좇지 말라는 소로의 말이 자신의 마음을 대변한다고 느낀다. 소로는 유명한 시민 불복종은 독립을 쟁취하고자 분투하는 젊은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며, 그들을 더욱 대담하게 만든다.

아이들은 이 시기에 19, 20세기 러시아 작가들도 만난다. 바로 대학에 진학하여 고소득 직장과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지름길에 오를지, 여행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면서 인생의 의미와 목표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지 길을 찾는 학생들에게 솔제니친이나 도스토옙스키 같은 러시아 작가들은 동시대 미국 작가들과 다른 비전을 보여준다. 누구든지 삶에서 어느 정도의 고통은 피할 수 없으며, 개인의 아픔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있고 자비와 연민을 베풀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것이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다.

발도르프 학교는 4년에 걸친 문학수업을 통해 아이들에게 우리 누구나 겪고 헤쳐가야 하는 삶의 길을 보여준다. 9학년들은 모비딕, 앵무새 죽이기, 안네의 일기를 통해 세상의 진실한 모습을 배우고, 10학년들은 오딧세이아와 함께 내적 모험을 떠나며 11학년은 어둠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 단테와 햄릿을 만나고 워즈워스가 노래한 자연의 세계로 초대된다. 마지막으로 12학년 때는 강한 개성과 독창적 인생관을 지닌 소로우, 에머슨, 솔제니친, 휘트먼 등을 생각을 읽으며 자기만의 길을 찾는다. 이들 작품은 아이들에게 원형적인 인간의 조건을 가르쳐주고 그 조건을 뚫고 나가는 인물들의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해 삶에 대한 다양한 전망과 시각을 제시한다.

현대사회에서 이것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이 작품들이 모든 사람이 거쳐야 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변모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원시 사회에서는 몸에 상처를 낸다거나 할례를 베풀거나 하는 사춘기 의례가 있었고 이 성인식을 통하여 아이는 유아기의 인격과 정신을 버리고 책임 있는 어른의 세계로 진입했다. 그것이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 청소년들에게는 다음 단계의 삶을 이끌어줄 내면의 길잡이가 필요하다. 발도르프 학교는 위대한 이야기가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작품 안에서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추상적 해석을 끌어내기보다는 원전 자체의 내용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들은 이것이 청소년들에게 훨씬 교육적이라고 여긴다.

우리 문학교육은 청소년기라는 특별히 소중한 발달단계를 얼마나 배려하고 있을까. 우리는 아이들의 성장에 영감을 주는 작품을 선정하고 있는가. 단지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을 순서와 맥락 없이 그냥 가르치는가. 문학교육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수업방법이 아니라 작품을 잘 고르는 것이다. 문학사적 가치를 어느 정도는 고려해야겠으나 청소년들은 국문과 전공자들이 아니다. 아이들의 정신적 성장에 영감을 주고 치유의 동반자가 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해야 한다. 스토리와 캐릭터가 탄탄하고 힘이 있는 동시에 삶에 대한 폭넓은 사색을 담은 작품이 좋다. 위대한 작품은 스스로 말을 건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문학교육의 핵심이다.

개정 교육과정에 따르면 고등학교에서 문학 과목을 한 학기만 다루게 되는데 이것도 문제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과목이 독서, 국어, 심화 국어, 언어와 매체로 세분되어 있지만 이 중 크게 의미 없는 내용도 많다.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배움의 큰 줄기를 세워서 학생들의 마음에 평생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날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한국문학 뿐 아니라 세계문학 작품도 더 폭넓게 다루면 좋겠다.

훌륭한 이야기는 우리 마음을 형성한다. 문학은 구체적인 인물과 이야기의 매력으로 우리 마음을 관통해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감정이 녹슬지 않게 지켜주고 삶의 희로애락에 열린 시각을 갖게 하며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만든다. 부와 권력이 지닌 힘에 비하면 그것은 한없이 미약해 보이지만 어떨 때는 그 가녀린 빛이 기적처럼 삶을 구하기도 한다. 문학교육의 가치는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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