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교과서가 국정에서 검인정으로의 전환을 앞두고 있던 2009년의 일이다. 다음 해에 가르칠 23종의 교과서가 도서실에 속속 도착했다. 그간 국정교과서만 사용하다가 교과서를 처음 선정해보게 되어 마음이 조금 설렜다. 교과서 선정 절차는 동교과 교사들로 이루어진 교과협의회에서 3종의 교과서를 우선 추천하면 학교운영위원회가 이 중에서 최종 결정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교과부장(여타 업무부장과 달리 이름만 부장으로 국어과에서 필요한 사항을 결정하는 직책이다)을 맡고 있어서 교과서 선정의 책임자는 나였다.
교과협의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최선생이 K사의 교과서로 정하자고 몇 번 말을 했지만 그다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어 교사가 6명이고 어짜피 전체 협의를 거쳐서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몇 종의 교과서가 바탕글이나 편집 면에서 좀 참신하게 느껴졌는데 가장 눈에 띈 것은 유명 출판사인 C사의 교과서였다. 교과서라기보다는 대중서의 느낌이 들 만큼 삼화도 세련되었다. 국어 교사 6명은 회의를 거듭하여 각 교과서의 장단점을 분석했다. 그리고 C사의 교과서가 제일 낫다는 결정을 내렸다. 나보다 경력이 많던 중견 교사인 최선생만 K사에 손을 들어주었지만 다른 교사들이 다 C사를 선택하여 C사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일로 결재 받을 일이 있어 교장실에 들렀는데(당시는 전자결재 시스템이 도입되기 직전이었다), K교장이 지나가는 말로 교과서 선정은 잘 되어가고 있냐고 물었다. 교장도 국어과 출신이어서 관심이 있구나 싶어서 편안하게 말했다.
"창비로 선정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교장의 표정이 싹 변했다. 그리고 매우 언짢은 기색으로 말을 툭 던졌다.
"C사는 좌파 교과서라서 안 되는데."
C사를 선택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는 그런 분위기였다.
나는 매우 당황했다. 23종의 교과서는 모두 교육부 심의를 통과한 책들이었다. 법적으로 사용 가능한 책인 것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근거로 자신의 판단이 교육부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C사의 교과서가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직접 교과서를 한번 모시라고 말씀드렸다. 주변 교사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물어보니 교장단 회의에서 C사 교과서를 배제하자는 그런 말이 돌았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얼마 뒤 다시 결재를 할 일이 있어 교장실을 방문했더니 김교장은 C사 교과서에 나오는 박완서의 소설이 청소년들에게 부정적인 가치관을 심어준다고 했다. 가난한 현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나. 너무 황당하여 아무 말도 못했다. 문학의 정신이 무엇인가. 소외된 삶의 자리를 조명하면서 인간의 가치를 새롭게 생각해보는 것이 아닌가. 독서 활성화에 대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신지식인상'도 받은 김교장의 박완서 소설에 대한 평가가 너무 조악해서 놀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것은 김교장 개인의 사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교장이 교과서 선정 과정에 개입하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교장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원칙에 따라서 교과협의회 결과대로 C사의 교과서를 1순위로 제안하는 기안을 작성했다. 본격적인 문제는 그 다음부터 발생했다. 교감 라인에서부터 결재가 나지 않은 것이다. 몇 번을 찾아가도 교감은 결재를 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그저 결재판을 물리쳤다. 이유를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교장실을 찾아가 직접 물어보았다.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께서 기안 결재를 안 해주시는데요. C사의 교과서는 안 된다는 말씀인가요?"
그러자 교장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재협의를 할까요?"
"교과서를 다시 정할까요?"
무엇을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때 알아차렸다. 교장이 직접적으로 어느 회사의 교과서가 안 된다고 말하면 관련 법규상 문제가 되므로 알아서 바꾸라는 것이었다. 혹시나 교사들이 걸고 넘어질까봐 그런 것 같았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발을 동동 굴렀지만, 지시도 없는데 교장 입맛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눈치껏 알아서 행동하라는 그 암묵적인 지시가 더 속상하고 화가 났다. 친분이 있던 선배 교사에게 조언을 구하니 동료 교사들과 논의하여 결정하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결정이 나지 못했다. 최선생은 K사로 정하길 원했고, 다른 교사들도 문제 해결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일주일 가량의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채로 학교운영위원회가 열리는 날이 왔다. 나는 그 날이 운영위원회 날인 줄도 모르고 출장을 갔다. 누구도 내게 운영위에 대해 언질을 주지 않았다. 그 날 대학교 한 해 후배인 오선생이 일 때문에 학교에 남아 있다가 내가 없다고 대신 운영위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결재가 나지 않은 기안문을 들고 말이다. 오선생은 같은 대학을 나온 한 해 후배였다. 얼김에 운영위원회에 참석한 오 선생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운영위원들이 우리가 제안한 3종의 교과서를 모두 탈락시켰기 때문이다.
전해 들은 말로는 오선생은 운영위원들로부터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삽화가 좋고 편집이 잘 되어 있는 것이 C사 교과서의 장점이라고 말하면 "삽화만 좋으면 되나요?" 하면서 비꼬는 식이었단다. 오선생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한잠도 못 잤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노조를 통해서 바로 교육청에 질의서를 내는, 감히 내가 엄두를 내지 못했던 용기를 발휘했다. 곧이어 장학사가 실태 조사를 위해 학교를 방문했고 교과부장인 나와 질의서를 제출한 오선생이 조사에 응하게 되었다.
담당 장학사는 안면이 있는 합리적인 분이었지만 교사 편은 아니었다. 이 모든 게 위에서 결재를 해주지 않아서 벌어진 일인데, 장학사는 "왜 결재를 끝까지 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는가" 하는 식의 질문을 이어가면서 교사의 책임을 계속 추궁했다. 우리는 우리가 피해자라고 생각했지만 조사의 방향은 생각했던 것과 아주 달랐다. 한 시간 넘게 질의에 응하고 조사서를 길게 작성하느라 그날은 점심도 먹지 못했다.
다행히 결과는 우리 편이었다. 학교장이 결재를 해주지 않은 것이 분명했고, 결재가 나지 않은 상태에서 운영위원회가 열리는 것 또한 규정에 어긋나므로 교육청은 이 사건이 결국 교장의 책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야 교과서 사건이 마무리되는구나 했는데 오선생이 다른 문제로 내게 의논을 해왔다. 김교장의 이런 식의 독단이 다른 학교에서부터 계속 누적되어왔기에 이 기회에 고발 조치하는 것이 어떠냐는 노조의 의견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와 오선생은 잠시 고민했지만 그간도 충분히 힘들었기 때문에 더이상 일을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교과서 문제만 정상화되면 괜찮겠다고 생각했기에 교장의 사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김교장은 매우 건조한 목소리로 교과서 기안을 결재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우리가 순진했다는 것이 곧 밝혀졌다. 교과서 선정을 위해 2차 운영위가 열렸지만 C사의 교과서는 결국 채택되지 못했다. 교장이 운영위원들을 미리 회유했던 것이다. 학교운영위원들은 C사의 교과서를 탈락시키고 우리가 2순위로 제안했던 B사의 교과서를 최종 선정했다. 대개 운영위원들은 교사들이 1위로 올린 교과서를 선정하기 때문에 예외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오선생은 "교사가 자기가 가르치고 싶은 교과서 하나 마음대로 못 정하냐?"며 눈물을 보였다.
열의가 넘치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나라면 "교과서가 다 그게 그거지 뭐." 하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으리라. 어느 교과서가 채택되든 크게 신경쓰지 않았을 것 같다. 검정교과서 체제 이후 여러 종의 교과서를 채택해보았고, 우리나라는 교육과정 지침이 워낙 세부적으로 꼼꼼하게 편성되어 있어서 특별히 참신한 교과서가 나올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교육과정의 지침을 반영하다 보면 어느 교과서나 단원의 수나 주제가 대동소이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는 여러 종류의 교과서를 보는 것이 처음이었고 내가 가르치고 싶은 교과서를 직접 골라보고 싶은 신성한 욕망이 있던 시절이었다.
김교장이 자신이 수업할 것도 아니면서 왜 그리 교과서에 집착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 일은 내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 사건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작년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면서이다. 지난 정부는 수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압적으로 역사교과서 국정화사업을 밀어붙였다. 멀쩡한 역사 교과서를 좌파 교과서라고 몰아세우던 사람들과 C사의 국어 교과서를 아무 이유 없이 좌파 교과서라고 싫어하던 김교장의 논리는 같았다. 그들은 학계의 객관적 판단 준거를 무시하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무조건 '좌파' 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런 비합리적인 행태가 해방 70년이 지나서도 우리 교육에 버젓이 남아 있음을 나는 비로소 인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 학교가 시끄러워지지 않고 조용히 일이 마무리되기를 바랐던 내 태도 또한 나이브한 것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었다. 김교장은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형식적인 사과만을 했을 뿐 조금도 반성하지 않았다. 우리의 인내력이 부족하여 끝까지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사업도 마찬가지다. 오류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법적 책임을 단호하게 물어야 한다. 그래야 개인의 존엄한 삶과 한 사회의 미래를 떠받치고 있는 교육 문제가 권력자의 개인적이고 독단적인 호불호에 따라 결정되는 일이 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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