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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우 내가 알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소위 '학습 환경'이라 부르는 곳에서 배운 적도 없다. 즉 뭔가를 배우려는 목적으로 의도된 경험에서는 배운 적이 없다는 뜻이다. 나는 '뭔가를 배울 목적으로'는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
'배움의 경험'에 관해 말할 때 생기는 어려움은 그 말이 모든 배움을 두 종류, 즉 뭔가를 배우게 되는 경험과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경험으로 나눌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는 경험이란 없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온갖 일, 우리에게 일어난 온갖 사건, 또 우리에게 가해진 온갖 행위로부터 뭔가를 배운다. 우리의 배움은 우리를 보다 박식하게도 무지하게도, 지혜롭게도 바보스럽게도, 강하게도 약하게도 만들 수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항상 뭔가를 배운다. 그 배움의 내용은 그 경험에 달려 있고, 무엇보다도 그 경험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책의 주된 요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관심을 두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없는 경험으로부터는 어떤 훌륭한 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호기심이란 절대로 게으른 법이 없다. 호기심은 진정한 관심과 진정한 필요성으로부터 자라난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강제된 경험으로부터는 어떤 훌륭한 배움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강제된 경험이란 타인의 유혹과 위협과 속임수에 넘어가 하게 되는 일을 말한다. 우리는 대개 그런 경험으로부터 분노와 후회, 무엇보다도 자조와 자기 혐오를 배우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떠밀리고 이용당하도록 자기를 내어준 데 대해, 거부하고 거절할 만큼 충분히 명민하고 강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일상의 삶 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지만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사람들은 뭔가를 배운다.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일에 대한 혐오를 배운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때로는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들에 대한 증오를 배운다. 교통이 혼잡한 도로에서 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다른 운전자나 행인을 불쾌한 존재, 장애물, 심지어는 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자신이 목적지에 좀 더 빨리 도착하는 것을 방해하는 그런 존재로 말이다. (pp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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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이라는 단어 속에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잘못된 통념은 하기와 배우기는 종류가 다른 활동이라는 생각이다. 몇 년 전 나는 첼로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첼로라는 악기를 좋아하고 하루에 몇 시간씩 그것을 연주하며 열심히 연습해서 언젠가는 멋지게 연주하고 싶다. 사람들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첼로 연주 배우기'라 말할 것이다. 영어에는 그런 행위를 일컫는 다른 말이 없다.
하지만 이런 말은 첼로 연주 배우기와 첼로 연주라는 두 개의 아주 다른 과정이 존재한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게 한다. 이 말은 내가 첼로 연주를 완전히 할 때까지는 첫 번째 과정을 계속할 것이고 완벽하게 할 수 있게 되면 그 과정을 끝내고 두 번째 과정을 시작할 것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나는 '연주를 완전히 익힐' 때까지는 '연주 배우기'를 계속할 것이며 그때에 가서야 '연주'를 시작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두 개의 과정 따위는 없다. 오직 하나가 있을 뿐. 우리는 그것을 함으로써 그것을 하는 방법을 배운다. 다른 방법은 없다. 뭔가를 처음 할 때 필경 잘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계속하다 보면, 또 따라할 만한 훌륭한 모델이 있어 필요할 때 도움이 될 충고를 얻는다면, 그리고 늘 최선을 다한다면 더 잘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아주 잘할지도 모른다. 이 과정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pp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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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들은 항상 읽기 기능, 쓰기 기능, 대화 기능, 듣기 기능에 이르기까지 '기능'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려운 일을 잘하려면 누구나 다양한 기능을 구사해야 한다는 뜻에서 기능이라는 말을 쓴다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이 어떤 어려운 활동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것을 가능한 한 여러 개의 분리된 기능으로 쪼개서 하나하나 차례로 가르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는 뜻은 아니다. 언젠가 화이트헤드가 말했듯이 하나의 행위에 포함된 여러 기능과 그 행위를 분리할 수는 없다.
아기들은 말하기 기능을 먼저 익힌 후 그것을 말하는 데 활용하는 식으로 말하기를 배우지는 않는다. 또는 걷기 기능을 배운 후에 걷는 식으로 걷기를 배우지는 않는다. 아기는 말을 하면서 말하기를 배운다. 그리고 걸으면서 걷기를 배운다. 아기가 맨 처음 머뭇거리며 발길을 떼어놓을 때 아기는 '연습 중'인 게 아니다. 아기는 채비를 갖추는 중도, 나중에 어디에선가 걸으려고 걷는 법을 배우는 중이 아니다. 아기는 지금 당장 걷고 싶기 때문에 걷는 것이다. 아기는 이미 걸음마에 대해 생각했고, 마음속에서 해답을 냈고, 어떻게 걸어야 할지를 알고, 또 걸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제 걸음마를 하려는 것이다.
기능과 행위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그 둘을 분리하려고 시도할 때 우리는 파멸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말하기는 하나의 기능도, 기능의 집합체도 아니다. 단지 하나의 행위이거나 '하기'이다. 그 행위의 뒤에는 하나의 목적이 있다. 두 살짜리 아기이건 92세 노인이건 마찬가지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대상이 있기 때문에, 말하고자 하는 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영향을 끼치고 싶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다.
말하기를 시작하는 아기는 말이라고 구별해낼 수 있는 소리를 내기 훨씬 전에, 아니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자신의 예리한 관찰력으로 자기보다 큰 사람들이 입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소리가 다른 일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안다. 아기들이 볼 때 큰 사람들의 말은 어떤 일이 일어나게 만든다. 아기는 정확하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아기는 말하는 어른들의 무리에 끼고 싶다.
마찬가지로 걷기는 기능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행위이다. 큰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아기도 걷고 싶다. 그들처럼 빨리 그리고 능숙하게.
읽기 역시 기능이 아니라 행위이다. 아이는 주위를 온통 둘러싸고 있는 글자들을 본다. 아이는 자기보다 나이 든 사람들이 그 글자를 읽고 쓰고 그 글자에서 뜻을 알아낸다는 것을 안다. 그 글자들은 일이 일어나게 만든다. 어느 날 아이는 그 글자들이 무엇을 말하고 뜻하는지 찾아내고 싶어하며 스스로 찾아내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바로 그 순간 아이는 읽기 시작한다. 읽기를 배우는 게 아니라 읽기 시작한다. 물론 처음에는 잘하지 못한다. 한 글자도 못 읽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하기'를 계속하도록 해주면(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 아이는 짧은 시간 내에 제대로 읽게 된다. 불과 채 몇 달도 걸리지 않는다. pp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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