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충수업(방과후 수업)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8월 중순, 한여름의 더위가 채 물러가기 전이었다. 3월 첫날부터 방학 바로 전날까지 보충수업을 하고 2주간의 여름방학을 지나 8월 3일 개학하여 다시 보충수업을 시작했을 때, 나는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육체적 한계라기보다는 '심리적 한계'였다. 정규수업 7시간을 마치고 피곤한 상태의 학생들에게 8, 9교시 2시간 동안 수능 문제를 푸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했다.
보충수업은 두 가지 방식으로 운영된다. 학생들이 원하는 과목을 선택하는 경우와 정규 수업처럼 일률적으로 배정된 시간표를 그대로 따라야 하는 학교도 있다. 2002년 학생들에게 아침을 먹이자는 밥차 운동이 시작되면서 고교 0교시 보충수업은 폐지되었지만 이후로 각 학교는 편법을 썼다. 0교시를 없애는 대신에 1교시 시간을 앞으로 당겨서 4시 반 정규 수업 이후에 8교시, 9교시 두 시간의 보충수업 시간을 확보한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문계 고교는 7시 50분 또는 8시에 일과가 시작된다.
선택형을 하는 학교는 그나마 학생들이 좀 생기가 있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강좌가 마감되면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자습하거나 다른 강좌를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긴 하다. 선택형이 아니라‘배정형’으로 운영하고 있는 K고는 문제가 심각했다. 학생들의 어떤 수요도 고려하지 않은 채, 수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2시간의 보충수업이 강제로 배정된 시간표에 따라 획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주당 8시간, 5주면 40시간이며, 이 40시간짜리가 한 학기에 3번 운영되었다.
2학년은 국어 교사가 네 명이어서 시간 배정이 좀 여유가 있었지만 1학년은 세 명이어서 내가 한 분기인 5주간 맡은 시수는 전체 40시간 중에 30시간이었다. 8, 9교시 수업이 대부분 있었다. 30시간을 10반에 나누어 들어갔기 때문에 5주 동안 한 반에는 겨우 세 시간 수업이 있었다. 1반에 오늘 들어갔다가 열흘 후에 들어가는 식으로 시간표가 덤벙덤벙 짜여 있어서 수업의 연계가 전혀 안 되었다. 말 그대로 시간만 채우는 격이었다.
그것도 기말 시험이 끝나면 중단해야지 40시간을 맞추려고 방학 전날 혹은 전전날까지 보충수업이 이어졌다. 3월 첫날부터 방학 전날까지 이렇게 기계적으로 운영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 분기에 35시간이면 어떻고 37시간이면 어떤가. 왜 꼭 40시간을 맞추려고 하는지 이해가지 않았다. 교사들에게 일정 금액의 수당을 맞춰주려고 이러나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내 수업이 필요치 않은 학생에게 강제로 문제지를 풀리는 것이었다. 보충수업을 긍정하는 분들은 아이들이 수능을 따로 공부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시간에 수능 대비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사교육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는 필수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지금도 입시에서 수시 비중이 70퍼센트까지 차지하는데, 당시에도 K고 학생들의 절반 정도는 입시에서 수능이 필요하지 않은 학생들이었다. 원하는 학생들 위주로 수업을 편성하면 진도도 좀 더 많이 나갈 수 있을 텐데, 하기 싫은 학생들까지 억지로 끌고 가려니 한 시간에 다룰 수 있는 분량도 많지 않아 능률도 떨어졌다.
학생들도 대다수가 불만을 갖고 있었다. 취약 과목은 사람마다 달라서 특정 과목은 들을 필요가 없는 경우가 많고 자신이 부족한 과목을 집중적으로 듣고 싶은데, 지금처럼 학교가 편성해준 모든 과목을 겉핥기식으로 다 듣느니 그 시간을 자습에 사용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보다 연배가 높은 교사 중 한 분은 이 문제는 대구 지역의 50대 이상의 교사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하셨다. 그 분들이 이런 종류의 시스템을 원한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어떤 체제도 구성원 전원이 반발하면 유지되기 어렵다. 이 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한 축은 교사들이었다. 대개 보충수업은 교사들보다 관리자가 희망하기 마련인데, K고의 경우는 문제가 조금 달랐다. 교장은 선택형을 원하고 있었지만 학생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교사들이 반발하여 배정형을 고수하고 있었다.
체육 교사인 최선생은 자신은 학생부 업무를 비롯하여 다른 교사들이 기피하는 일을 아무리 많이 해도 수입이 일정한데, 국영수 담당 교사들은 학교 일과는 상관없이 수업 시수에 따라 수당을 챙겨가서 위화감이 든다고 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아무튼 나는 단 한 학기만에 이 시스템에 깊은 피로를 느꼈다. 사람은 때로는 그냥 신나게 이야기하고 싶은 때도 있는 법이다. 수업 시간에 조금 열정적으로 말한 날이면 저녁에 녹초가 되었다. 하루 6시간 이상의 수업은 체력 안배를 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렇게 일상을 관리하는 것이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정규 수업의 질을 위해서 보충수업은 그만두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주위에 조언을 구하니 아픈 게 최고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래서 교장을 찾아가 건강상 문제로 보충수업에 강사를 쓰고 싶다고 요청했다. 교장은 교감 선생님과 의논하라는 답을 주었다. 두 번째 찾아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찾아갔을 때 마침 피곤해서 잠깐 눈을 붙이다가 일어난 교장 선생님은 그렇게 힘드냐고,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예상치 못한 성공이었다. 교감은 좋은 강사를 구해야 한다는 조건을 다셨다. 관리자 입장에서는 외부 강사보다는 학교 교사가 더 믿을 만하다는 이야기였다. K고의 교장과 교감 두 분 모두 교사 의견에 수용적인 분들이라 가능했던 것 같다. 그렇게 전교에서 내 보충수업만 교육청 인력풀을 동원해 뽑은 시간 강사로 대체되었다.
국가교육과정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국가교육과정의 시수는 그만큼은 꼭 가르쳐야 한다고 법적으로 규정한 시수이다. 일주일에 국어가 네 시간 편성되어 있는데 그것으로 부족하다면 국가교육과정상에서 시수를 늘려야 한다. 그 밖의 배움은 철저히 학생의 수요에 맡겨야 한다. 다시 말해 국가교육과정에서 규정하는 것 이상의 배움을 학생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좋은 내용의 배움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학생들에게 자율을 주었더니 아이들이 그 시간을 활용하지 않고 피시방을 가거나 의미 없이 보내서 보충수업을 하는 것이 낫다는 동료들도 있다. 일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내 답은 자율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율에는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고등학생이라면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관리하는 능력을 키워주어야 한다. 이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며, 그것은 시험 문제 이상으로 중요한 능력이다. 농땡이들 몇 명을 공부시키기 위해 모든 학생을 학교에 잡아둘 필요는 없다.
내가 보충수업을 하느니 마느니 했던 그때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보충수업을 선택적으로 운영하는 고교가 많아졌다. 학교 운영 방침에 변화가 왔다기보다는 학생들이 보충수업 시간에 대거 도망가거나 방학 중에 등교하지 않아서 선택형으로 바뀐 경우가 많다. 학생들을 강제로 잡아두는 데 한계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아직 여전히 많은 학교에서 강제로 운영되고 있다.
남보다 조금 앞서기 위해 원칙을 버리는 일이 학교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비록 대부분의 사회가 과정보다 결과만을 대접하는 것이 현실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교육에서는 ‘과정’의 정당함이 결과보다 우선하면 좋겠다. 공교육이 추구하는 모든 배움의 종착역은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이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율성과 책임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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