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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교육 관련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엄기호

by 릴라~ 2018.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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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이른바 '열린 교육'이라는 것을 받고 자란 세대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열린 교육'이 한 번도 제대로 열린 적이 없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폭압적인 교육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열린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혼돈이 가득한 교육이 아이들의 삶을 괴롭혔다. 학생들의 의사와 배움의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하였지만 그 교육은 또 하나의 강요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은 무책임하기까지 했다. '열린 교육'에서는 가만히 있을 시간이 없었다. 무조건  손을 들고 뭔가를 해야 했다. 역설적으로 이들이 경험한 '열린 교육'은 조용히 있을 자유, 혹은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하였다. 한 학생은 "스스로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는 수업"을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요" 받았다고 말한다. 수업이 있는 날이면 부모들이 교실 뒤편에서 앉아 자신들이 수업하는 모습을 참관하는데, 자기 아이가 수업 내내 아무 말도 안 하기라도 하면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아이를 질타한다고 한다. "너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아?" 폭압적인 교육이 학생들에게 입 닫고 가만히 있을 의무를강요했다면, 열린 교육은 무조건 말해야 하는 의무를 강요한 셈이다. 


대안학교에서 열린 교육의 문제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얼마 전 방문한 대안학교에서 어떤 학생이 자기는 체험학습을 가기가 너무 싫다고 고백하였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임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너는 나가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였다. 그럼 무엇이 문제냐고 했더니 이 학교에서는 다 좋은데 뭘 체험하기만 하면 무조건 그것에 대해서 글을 쓰라고 해서 너무괴롭다고 털어놓았다. 자기는 정말 "재밌었다!" 네 글자 말고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데 억지로 이것저것을 쓰라고 하니 미치겠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래서 글쓰기를 할 때마다 거의 매번 마음에도 없는 말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주절거린다고 한다. 대안학교에서는 공교육과 달리 학생들에게 사물을 꼼곰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자기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서였겠지만, 학생들에게는 고통일 뿐이었다. p10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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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가 교육의 본성과 한계에 대해서 더 솔직해져야 한다는 것을 <P짱은 내 친구>에 대한 학생들의 말과 글 속에서 깨달았다. 훈육이 아닌 교육이 가능할까? 공교육이건 대안교육이건, 혹은 홈스쿨링이건, 혼자서 배우는 과정이 아니라 누군가와 만나 주고받는 가르침과 배움을 교육이라고 한다면 거기서 훈육을 배제하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만약 훈육이 아닌 교육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세상에 폭력적인 교육과 폭력적이지 않은 교육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 그 자체가 폭력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폭력적인 교육과 비폭력적인 교육을 구분할 게 아니라 불가피하고 감수할 수 있는 폭력과 그렇지 않은 폭력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교육은 폭력적이지 않다는 주장에 대해 학생들은 '그것도 폭력이예요'하고 맞받아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실제로 대안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다. 공교육은 폭력이지만 대안학교의 교육은 사랑이라는 주장에 대해 학생들은 냉소하고 지겨워한다.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교사들에 의해서 토론이나 글쓰기를 강요받고 있다고 반발하는 사례가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그들은 '사랑' 역시 강요와 폭력으로 경험하고 있다.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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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가족이 위기에 빠진 이유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노동'을 하지 않고 그저 쉬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족이 편안하게 쉬는 곳이지 노동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감정노동'을 대신하는 것이 '소통'이다. 물론 소통도 감정노동의 일환이다. 그러나 그 '소통'이 내가 애써서 해야 하는 노동이라고는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소통이 있어야 정상적이고 화목한 가족이라는 말을 규범적으로만 하였지 그 '소통'이 수고로운 노동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소통이 '노동'이 되는 순간 모두가 피곤해한다. 동시에 소통이 제대로 혹은 활발하게 일어나지 않는 자기 가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또한 그 문제의 일부분이라는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모두가 그렇게 집에서 쉬려고만 할 때 그들이 쉬기 위해서 집을 편안하게 만들고 그들의 정서를 돌봐주는 일은 순전히 엄마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감정노동을 하는 '노동자'는 엄마뿐이다. 가족의 화목과 화합이라는 이름 아래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오로지 엄마만이 스스로를 희생하며 온갖 노동을 수행한다. 그래서 엄마가 빠진 가족에서는 친밀성을 만들고 유지하는 노동 또한 사라진다. 모두가 칭얼거리면서 엄마의 서비스를 받기만 하였지 더불어 어떤 노력을 해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일방적으로 어머니가 감정노동을 수행하면서 가족을 떠받쳐왔다. 이런 점에서 감정노동은 가장 착취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의 감정노동에만 의존하는 가족에는 어머니를 착취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어머니의 한탄과 같은 문제가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중산층의 세련된 엄마들이야 그것이 자신이 수행하는 전문가적인 '매니지먼트'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머지 엄마들에게는 오로지 자신만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다. 다른 가족들이 감당해야 하는 감정노동은 엄마의 한탄을 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한대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너무나 피곤한 일이다. 어머니가 있으면 있는 대로 어머니와 자식들 간의 신경전이 끊이지 않고, 어머니가 없으면 가족 자체가 깨지고 만다. 따라서 감정노동이 민주화되지 않는 이상 가족 간의 문제는 사라질 수가 없다. p13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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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리포트와 토론에서 나는 공식 교육과정에서 습득하게 되는 언어와 담론의 힘이 얼마나 큰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우리는 흔히 고등학교까지의 교육이 아이들의 삶을 겉돌 뿐이라고 생각한다. 현상적으로 보면 맞는 이야기이다. 학교에서 배운 언어와 지식이 자신에게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절감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그 '의미 없다고 하는 고등학교 교육'이 가진 강력한 힘이다. 학생들은 공교육에서 배운 것을 결정적인 순간에 정말로 '진리'라고 믿거나 아니면 그것을 '진리'로 이야기한다. 수업시간에 졸았든 땡땡이를 쳤든 공식 과정에서 배운 것이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진리'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정말로 학생들이 그것을 진지하게 진리라고 믿는 경우이다. 두 번째는 그것을 진리라고 믿지도 않고 살아가는데 중요하다고 여기지도 않지만, 그 '진리' 말고 다른 언어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라고 말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진리의 내용에 대한 승인이냐, 형식에 대한 승인이냐의 여부를 떠나 이 진리가 가진 힘은 강력하다. 어느 쪽이든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것'과 '그 말에 따라 행동하고 자신과 남을 평가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곳은 믿음이 아니라 행동이다.


'진리'가 가진 힘은 강력하다. '진리'는 더 이상 의심하거나 생각해볼 필요가 없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사유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걸림돌이 된다. 나아가 이 '진리'는 세상만사를 해석하고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공식적' 언어가 된다. 이런 점 때문에 나는 공교육에 대한 비판은 대단히 정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교육에서 가르치는 지식은 아이들의 삶을 겉돈다. 그러나 그 겉도는 지식이 아이들의 세계관을 거의 절대적으로 지배하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학교가 이러한 '진리의 공간'이라는 점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학교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간과하는 중요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학교와 교과서는 여전히 '심각하게' 중요하다. 이것이 몸과 언어를 만든다. p255-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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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적 주체들은 절대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새로운 가치들이 단명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냉소적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속물이 되고 모든 가치는 속물의 언어가 된다. 사랑이니 혁명이니 열심히 떠들지만 알고 보면 그것들은 다 자기 이해의 위장된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가치를 믿지 않는 사람, 가치의 이면에는 ㅎ아상 추악한 자기 이익 추구가 있다고 믿는 사람, 그래서 남이라면 누구도 믿지 않는 이 사람들을 우리는 속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들에겐 냉소주의만이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본 장비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맨 정신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사실 이들이 말하는 본질이 틀린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기성세대가 말했어야 하는 것은 '그러면'이라는 막연한 희망의 언어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실천의 언어였어야 한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세상이 잘 될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의 말이 아니라 정치란 본질적으로 부패하고, 민주주의란 그 자체로 양날의 검이자 혼돈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어야 한다. p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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