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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에서 분리가 강하다는 것은 평가의 목적이 학생들 사이의 서열을 정확히 매기는 데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학생들을 1등부터 꼴찌까지 석차를 매기는 형태의 상대평가가 분리가 가장 강한 유형의 평가에 해당한다. 이 경우 평가는 학생들의 서열을 정확히 매겨 이를 상급학교 진학의 도구로 활용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평가의 결과로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정보를 제공하지는 못하게 된다. 또한 학생들 사이 격차를 정확히 측정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평가의 난도는 높아지고, 단편적 암기 여부 등 양적으로 측정하기 쉬운 영역에 주로 관심을 갖게 된다.
평가에서 통제가 강하다는 것은 지식의 준거가 명확하여 정답의 개방성이 보장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유형이 선다형 평가, 단답형 평가다. 흔히 선다형 평가를 '객관식 평가'라고도 부르지만 이는 사실상 주어진 답안 가운데 정답이 아닌 것을 가려내는 능력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구성주의적 지식관에 따르면 지식이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에 따라 주체가 새롭게 구성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형의 평가는 '단편적 지식 위주의 교육과정', '주입식, 암기식 수업 방식'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또한 이러한 평가 유형이 널리 활용될수록 거꾸로 단편적 지식 위주의 암기식 수업이 강화된다. pp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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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레레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 코스를 가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경험한 내용'이다. '교육과정 재개념화'를 주창했던 파이너와 같은 학자들은 이러한 '쿠레레로서의 교육과정'을 중시한다. 이들은 계획된 교육과정이 수업에서 어떻게 구현되며, 그 속에서 학생들이 실제로 무엇을 배우는지를 비판적으로 이해해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의도된 계획'으로서의 교육과정보다 학생들에게 실제로 '실현된 경험'으로서의 교육과정을 중시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의도된 교육과정'과 '실현된 교육과정'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학생들이 학교에 출석은 했지만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거나, 참여하려고 노력하더라도 실제로 배운 것이 거의 없다면 '의도된 교육과정'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pp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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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비고츠키 이론에서 가증 중요한 개념인 '근접발달영역'이 도출된다. 그는 교육이 발달을 선도한다는 전제 하에 교사나 동료 학생의 도움으로 인간의 의식이 비약적으로 발달할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근접발달영역이란 '실제적 발달 수준과 잠재적 발달 수준 사이의 거리'로, 여기서 말하는 잠재적 발달 수준은 학생이 자기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지만 교사 혹은 자기보다 능력 있는 또래와의 협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도를 말한다. 따라서 수업에서 중요한 과제는 교사 및 동료 학생과의 협력을 통한 근접발달영역을 창출하는 것이다. p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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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교육과정-수업의 혁신은 평가의 혁신과 맞물리게 되는 것이다. 평가의 혁신 없는 교육과정-수업 혁신은 '수업은 협력적인 방식으로 진행하였으나 평가는 경쟁적인 방식으로 시행하는' 모순을 낳게 된다. 특히 한국과 같이 평가가 교육과정-수업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 현실에서는 오히려 평가의 혁신이 교육과정-수업의 혁신을 선도한다고 볼 수 있다. p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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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유독 '시험의 공정성'이라는 신화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대학 입학 여부를 '선착순'이나 '추첨'으로 결정한다면 이에 동의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반대로 대학 입학 여부를 '수능'이라는 시험 하나로 결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 제기가 없다. 지금도 일부 지역이 고등학교 비평준화로 남아 있는 것도 이러한 '시험의 공정성'에 대한 사회적 신뢰 때문이다.
그런데 센델은 시험의 공정성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그는 "하버드대학에 합격한 학생은, 하필이면 19세의 나이에, 하필이면 하버드대 입시가 요구하는 특정한 능력을 가진 학생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바꾸어서 만약 하버드대가 다른 능력을 요구했다면, 혹은 20세의 나이에 그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면 그 학생은 하버드대에 입학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pp27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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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유독 평가에 대한 신화가 강한 편이다. 이는 한편으로 볼 때 긍정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한 사람의 선천적인 지위(신분, 가문, 계급)보다 능력의 결과를 중시하는 능력주의 원리를 중시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원리를 중시하다 보니 우리 사회에는 '표준화된 시험에 따른 성적'을 가장 공정한 경쟁의 방식으로 선호하는 문화가 정착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신화에서 벗어날 대가 되었다. 흔히 이야기하듯 이제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지났다고 할 수 있다. 시험 성적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기보다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 자체에 문제를 제기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또한 전통적인 평가 방식이 교육과정 및 수업에 미치는 폐해가 너무 크다. '일제고사 방식의 상대평가'는 '강한 분리, 강한 통제'의 평가 방식을 낳을 수밖에 없고, 이는 교육과정과 수업을 획일화하며, 그 속에서 배움이 느리거나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계층의 학생들을 소회시킨다. 그리고 학생들은 일상적인 교육과정과 수업에서 불평등의 논리, 억압의 논리를 내면화하게 된다. p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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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어과의 경우 예전부터 논술형 문제를 많이 냈어요. 예를 들어 <전우치전>을 배우고 나서 "전우치가 오늘날 나타나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상상해서 써 보세요."라는 문제를 출제했는데, 이는 사실 교육과정에서 제시한 성취기준에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에요. 성취기준에 억지로 맞추는 문제를 낸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문제라고 볼 수도 없고, 오히려 교사들이 새로운 발상으로 문제를 출제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어요. p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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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학생들은 수행평가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긍정적인 인식을 나타냈다. 이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학생들이 수행평가에 대해 상대적으로 부담감을 적게 느끼고 있을 뿐 아니라 수행평가를 "공부 못하는 애들도 열심히만 하면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시험"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필 평가가 "공부 잘하는 애들에게만 좋은 시험"이라는 인식과 상반된 것이다. 학생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수행평가는 "참여만 하면 어느 정도 점수를" 받을 수 있으며, "선생님이 설명한 대로 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 잘하는 애나 못하는 애나 이것저것 하는 것", "국어처럼 글쓰기나 만들기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학생들이 선호하는 수행평가가 지필 평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리 및 통제가 약한 평가라는 점을 알려준다. 지필평가는 기본적으로 주어진 문항을 얼마나 맞혔는가에 따라 점수가 부여되는 양적 평가다. 따라서 절대평가 체제라 할지라도 학생 간 비교와 서열화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반면에 수행평가는 학생들이 주어진 과제를 얼마나 열심히 참여하여 해결했는가를 중심으로 점수가 부여된다. 또한 지식의 습득 정도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실제적인 활용을 중시하며, 글쓰기나 발표, 창작, 협력 등 다양한 요소를 반영할 수 있기 때문에 지필 평가에서는 점수가 좋지 않은 학생도 수행평가 영역에서는 자신의 또 다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부여된다. (...)
위의 교사 인터뷰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교사들은 수행평가를 통해 상대적으로 분리 및 통제가 약한 평가를 치르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의 참여도나 지식 이외에 다양한 역량을 중시하는 수행평가에서는 학생 간 서열 격차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인지적 영역에서 다소 학습 능력이 부족한 학생들도 비인지적 영역에서는 다른 측면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보장받게 된다. 학생들은 대체로 이러한 방식의 수행평가를 선호한다. 반면 "수행평가 비중이 높으면 지필 평가에서 점수를 잘 받는 학생이 상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생각을 하는 학생도 존재하는데, 이는 오히려 수행평가가 분리 및 통제가 약한 평가 방식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수행평가를 시행할 때는 가급적 학생들간 점수 급간 차이를 크게 두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 학생들의 사고나 창의력, 학업에 대한 태도 등을 촘촘하게 점수로 변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00점 만점이 관행으로 되어 있는 지필 평가와 달리 수행평가는 학생들 간 급간을 줄이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수행평가의 영역은 10점 만점으로 정하고 이에 따라 9점, 8점 정도로만 점수를 부여하며, 그 대신 학생들 간 상호 평가나 교사의 피드백에 따라 학생들의 다양한 잠재력을 확인하는 평가 방식을 취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스웨덴에서 3단계 평정 척도(통과, 우수, 매우 우수)에 따라 등급을 부여하고, 언어적 척도에 따라 학생들의 다양한 특징을 서술식으로 통지하는 평가 방식을 취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그래야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보상을 주어 학생들이 더 잘할 수 있도록 독려할 수 있다.
그런데 수행평가를 강조하다 보면 자칫 다른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수행평가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이 풍부한 학생들, 예를 들어 어려서부터 독서나 문화 활동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학생들이나 동료 집단에서 리더로 인정받아 오면서 사회적 의사소통 능력을 키워 온 학생들에게 유리한 평가 방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 끝내는 학습활동', '학교에서 끝내는 수행평가'다. 만약 수행평가가 수업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과제 부여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이는 학생들에게 추가적인 학습 부담을 부과하는 것이자 사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거나 가정 여건이 좋은 학생들에게만 유리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또한 교사가 모둠 활동을 진행하는 경우에도 별다른 교육적 개입을 하지 않거나 명확한 역할을 부여하지 않은 채 학생들에게만 과제 해결을 맡기는 경우 이미 동료 학생들로부터 리더로 인정받고 있는 학생들만 학습활동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배움이 느린 학생들은 소외될 수 있다. (...)
이렇게 볼 때 평가에서 중요한 것은 '평가 방식이 사회경제적으로 불리한 학생들, 배움이 느린 학생들도 배려하고 있는가?', '평가의 결과로 모든 학생이 자신들이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야 학생들이 평가 결과에 따라 집단 속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와 역할이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자신의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받으면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pp32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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