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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교육 관련

가르칠 수 있는 용기 | 파머 파커 ㅡ 교사의 개인적 정체성이 가르침을 좌우한다

by 릴라~ 2018. 4. 24.

 

몇 년에 한번은 다시 들쳐보게 되는 책이다. 이 책은 교육방법론도, 현장에서 교사가 겪는 어려움에 대한 심리적 처방도 아니다. 가르침이라는 행위가 일종의 테크닉이 아니라 교사의 심원한 내면에서 비롯되는, 교사의 자아 의식과 정체성과 연결된 과제임을 이야기고 있고, 그런 점에서 거의 유일한 책이 아닐까 싶다. 가르침이 자기 자신에게로 더 깊이 다가가는 일이 되지 못할 때 교사의 내면은 분열되고 페르소나만 남는다. 가르치는 자의 내면을 파고드는 통찰이 돋보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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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어본 모든 얘기 속에서 훌륭한 교사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강렬한 개인적 정체성이 그 수업에 배어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이렇게 말했다.


"A 교수님은 수업을 할 때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 같아.""B 교수님은 자신의 학과를 정말 사랑하더군.""C 교수님께는 이 과목이 자신의 목숨이나 다름없어."


나는 한 여학생이 훌륭한 교사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따. 왜냐하면 훌륭한 교사라고 해도 그 스타일은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나쁜 교사는 일률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들 모두에게는 비슷한 나쁜 점이 있다는 것이다.


"나쁜 선생님의 말은 그들의 얼굴 앞에서 둥둥 떠다녀요. 마치 만화에 나오는 대화같이 말이에요."


그녀는 하나의 멋진 이미지로 모든 상황을 적절히 요약해 주었따. 나쁜 교사는 그들이 가르치는 과목과 자신을 격리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과도 멀어진다. 반면 훌륭한 교사는 자신의 자아, 학과, 학생을 생명의 그물 속으로 한데 촘촘히 엮어 들인다. pp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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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진정한 인간의 행동이 그렇듯이, 가르치는 행위도 좋든 나쁘든 인간의 내면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다. 나는 가르치면서 학생, 학과, 나와 학생이 함께 엮여지는 방식에 나의 영혼을 투영한다. 내가 교실에서 경험하는 이런 엮임은 나의 내면적인 생활의 엮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가르침은 자신의 영혼에 거울을 들이대는 행위이다. 만약 내가 그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거기서 나타난 풍경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면, 나는 자기자식을 얻을 수 있다.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학생과 학과를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훌륭한 가르침의 필수사항이다. pp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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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무한히 신축적이지는 않다. 잠재력이 있는 반면 한계도 있다. 만약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에게 성실성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 그 일, 우리가 그 일을 제공하는 사람 모두가 피해를 입게 된다. 앨런의 자아는 교직으로 확대되었고, 가르치는 일은 그에게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에릭의 자아는 교수직으로 위축되었다. 그러므로 다른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그에게는 잃어버린 성실성을 회복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간디는 자신의 생애를 '진리와의 실험'이라고 불렀다. 그는 우리의 생활과 관련되는 복잡한 역장에서 그런 실험을 벌임으로써 우리의 성실성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어떤 관계에서는 성공을 거두고 또 다른 관계에서는 실패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배우게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력을 주는 인간관계를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성실성을 높이는 반면, 우리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관계를 허락함으로써 우리의 성실성을 해치는 것이다.


정말로 실험은 위험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 우리에게 생명력을 가져다 줄지 또 어떤 것이 해를 입힐지 미리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성실성에 대해 진정으로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먼저 실험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실험 결과를 보아가며 기꺼이 선택해야 한다. p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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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에 만난, 일방적으로 강의하던 그 교수는 나에게 나 자신의 지적 재능을 돌아보게 해 준 스승이었다. 내가 그 분의 강의에 흥분했던 것은 강의 내용-물론 재미있었다-이라기보다는 잠자고 있던 내 정체성의 한 측면을 발견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분이 집단학습과정의 원칙을 무시했다거나 적절한 대인관계의 규칙을 위반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분이 자신의 마음을 내게 펼쳐 보임으로써 지적 재능이 대단히 멋진 것임을 발견하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p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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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생활 30년째이지만, 아직도 공포는 내 주위에서 어른거린다. 교실에 들어갈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공포가 고개를 쳐든다. 내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는데 마치 못할 짓이라도 요구한 것처럼 학생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온갖 공포가 나타난다. 내가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가령 바보 같은 질문이 나왔을 때, 말도 안 되는 갈등이 벌어졌을 때, 내가 헤매기 때문에 학생들도 헤매는 강의를 할 때 공포는 어김없이 찾아온다. 껄끄러운 강의를 가까스로 마친 날은 강의가 끝난 지 한참 후까지도 나는 여전히 공포를 느낀다. 나쁜 교사라는 의식에 나쁜 사람이라는 느낌마저 추가된다. 이처럼 나의 자아의식은 내가 하는 일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p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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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객관론은 전제주의 및 폭력과 담합하는가? 처음부터 객관론적 충동은 진리 탐구 이상의 목표를 갖고 있다. 그것은 근대 이전의 세계를 위험스럽게 만든 주관론을 너무 지나치게 억압하려고 했다. 객관론은 주관론의 확대를 미리 예방하는 조치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객관적 진리를 확보하기 위해 '자아'의 씨를 말리려 했다. 독재자들이 '공안'을 확보하기 위해 반대자를 죽이는 것처럼 혹은 전사들이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적을 죽이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했다.


'자아의 씨를 말린다'라는 것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객관론을 표방하는 핵심 문헌들에서 발견된다. 객관론이 활짝 꽃피어났던 1세기 전, 철학자 칼 피어슨은 '과학의 문법'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객관적 지식을 옹호하는 고전적인 주장ㅇ르 펴면서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 느낌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사실을 근거로 판단을 내리는 습관이야말로 과학적인 마음의 특징이라고 할 만하다." 
불행하게도 피어슨은 자신의 고전적 주장을 펴면서 프로이트적인 말 실수를 했다. "과학적인 사람은 자신의 판단을 내릴 때 그 무엇보다도 자아의 배제를 추구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애매모호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피어슨의 말을 하나의 예언이라고 생각한다. 피어슨이 그 책을 펴내고 1세기가 지는 지금, 객관론은 자아의 배제라는 목표를 꽤 많이 달성했다. 그리하여 어떤 대학생은 자신의 지나온 이야기를 쓰면서 과연 '나'라는 말을 써도 되는지 질문할 정도가 되었다. 


객관론에 반대하는 나의 입장은 지금껏 규범적인 것이었다. 자아와 사물을 둘 다 두려워하는 객관론은 자아와 세상을 단절시키고, 그리하여 학과, 학생, 우리 자신 사이의 왜곡시켰다. 그러나 객관론에 대하여 좀더 강력한 반대 주장을 펴자면, 객관론은 지식이 실제로 어떻게 발생하는지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과학자도 이 세상을 멀찍이 떼어 놓는다고 해서 이 세상을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식하는 자와 인식 대상 사이에 객관론적인 장벽을 설치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벽에 대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과학은 이 세상에의 참여를 요구하고, 또 인식하는 자와 인식 대상 사이의 생생한 만남을 요구한다. 그러한 만남에는 때로는 객관적인 거리도 필요하겠지만, 친밀함의 순간이 없다면 생생한 만남이 될 수 없다.

 

그 어떤 지식이든 관계적인 것이고, 지식은 인식 대상과 깊은 일체감을 이루려는 욕망에 의해 얻어진다. 왜 역사가는 '죽은' 과거를 연구하는가?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서 그것이 얼마나 살아 있는지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왜 생물학자는 '말 없는' 자연계를 연구하는가? 우리가 생명의 생태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말해 주는 자연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이다. 왜 문학가는 '허구'의 세계를 연구하는가? 객관적 사실은 상상력과의 소통에 의해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지식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타자와의 일체감을 이루는 방식이다.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자꾸만 달아나는 실체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지식은 관계를 추구하는 인간적인 방식이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만남과 교류를 경험하게 되는 방식이다. 가장 깊이 있는 수준에서 볼 때, 지식은 언제나 상호연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pp11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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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감과 고독을 동시에 원하는 우리의 역설적 필요를 한번 생각해보라. 인간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풍요롭고 자양분 넘치는 상호연결망이 없다면, 우리는 시들어서 죽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가 결핍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병도 잘 걸리고 또 회복도 늦다는 것이 임상적 사실이다.


동시에 우리는 고독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다양한 인간관계로 그물이 짜여져 있지만, 인간의 자아는 다른 사람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촘촘한 내면성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우리가 이런 궁극적인 고독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시들어서 죽게 될 것이다. 인생의 어떤 단계 혹은 어떤 역할에서 타자 지향성은 나름대로 도움이 된다. 그러나 커다란 신비를 향하여 여행하면 할수록 우리는 자신의 본질적인 고독 속에서 집에 온 느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건강한 전인이 된 느낌을 갖게 된다. 


우리가 고독과 일체감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는 것은 분명 커다란 역설이다. 이 양극이 서로 분리될 때, 생명을 주는 존재의 양극적 상태는 무시무시한 유령 같은 상태로 타락해버린다. p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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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중심의 교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그것은 아주 실제적이고 생생하고 뚜렷한 제3의 것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교사와 학생들은 자신들의 발언과 행동에 책임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교실에서는 무기력한 사실들은 있을 수가 없다. 위대한 사물(주제)이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학생은 선생을 의식하고 선생은 학생을 의식하면서 위대한 사물의 이름으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게 된다. 여기에서 교사와 학생은 그들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힘을 갖게 된다. 그 힘은 자기도취적인 지향을 거부하고 또 실제로 발생하는 자기도취를 초월하는 주제의 힘이다. (...)


주제 중심의 교실에서 교사의 핵심적인 과제는 위대한 사물에 독립적인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교사의 목소리와는 뚜렷하게 다른 주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다. 위대한 사물이 스스로 발언할 때 교사와 학생은 진정한 학습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


지식의 대상을 중시하는 듯한 객관론이 실제로는 교사 중심의 교실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객관론은 지식의 순수성을 보호하는 일에 너무 몰두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자신의 주관으로 지식을 오염시키는 일은커녕, 지식의 대상에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학생들이 아는 것은 반드시 교사를 통해 매개되어야 한다. 이때 교사는 대상을 대신하고, 대상의 대변인이 되며, 학생들의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인물이다. (...)


학생 중심의 교실이라는 아이디어는 교사 중심 모델의 부작용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델 역시 그 자체의 부작용이 있다. 학생 중심의 교실에서는 때때로 어이없는 상대론을 지향하게 된다. "너를 위한 진실, 나를 위한 진실, 이 둘의 차이는 신경 쓸 필요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학생들을 동그마리의 중심에다 놓는다면 선생은 지도력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게 된다. 학생들이 기준선을 잡을 경우에는 학생 개인이나 집단의 무지와 편견을 지적해 주기가 쉽지 않다. (...)


주제 중심의 교실은 학생들이 무시되는 그런 교실이 아니다. 그 교실은 학생들이 중시하는 사항을 존중한다. 학생들은 자긴의 경험이나 자아보다 더 큰 세상, 자신의 개인적인 경계를 확장시켜 주고 자신의 커뮤니티 의식을 넓혀 주는 세상, 이런 세상을 만나는 것을 최고로 중요시한다. 바로 이 때문에 학생들은 위대한 스승을 가리켜, 그들이 들어 보지 못한 사물들을 '소생시키는' 사람, 학생들에게 삶의 진실을 일깨워주는 타자성과 만나게 해 주는 사람 등으로 지칭하고 있다. pp218-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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