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진실을 잊고 산다. 해미는 어릴 때 우물에 빠지지만 해미의 가족들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잊혀지고 사라진다. 해미의 집이 헐린 것처럼. 성인이 된 해미의 삶도 우물에 빠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해미는 카드빚을 안고 있으며 햇빛이 들지 않는 좁은 방을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두운 우물에서 위를 보면 저 멀리 환하고 동그란 하늘이 보이는 것처럼 해미는 초월을 꿈꾼다. '그레이트 헝거'처럼 자유롭게 날아가기를 꿈꾼다. 가진 돈을 몽땅 털어 아프리카를 다녀오지만, 그녀는 여전히 날 수 없고 어느날 연기처럼 사라진다.
종수의 어릴 때 기억은 어머니의 옷을 태운 것이다. 걸핏하면 분노를 터뜨리는 종수의 아버지는 그것 때문에 아내가 집을 나가자 종수에게 자기 아내의 옷을 태우게 한다. 아이에게는 잔인한 경험이고 어머니를 잃게 만든 아버지에게 무의식적 분노를 품을 수도 있는 사건이다. 하지만 종수는 아버지처럼 자존심이 강하기는 하지만, 분노를 표출하는 인물은 아니다. 해미처럼 초월을 꿈꾸지도 않는다. 종수는 자존심 때문에 알바 면접장에서 뛰쳐나가기는 하지만 아직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종수는 성실하지만 용기가 없다. 문예창작과를 나와서 소설을 쓰기를 바라지만 무엇을 써야 할 지 모른다. 그에게 세상은 수수께끼이다.
종수는 해미를 좋아하고 해미의 고양이에게 꼬박꼬박 밥을 주지만 해미가 얼마나 외로운 상태인지,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종수는 해미를 구원할 힘이 없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녀의 우물 이야기를 떠올린다. 주위 사람들에게 그 우물이 진짜 있었는지 묻는다. 그리고 벤에게 의심을 돌리기 시작한다.
벤은 취미로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포르셰를 모는 부유한 남자다. 젊은 나이에 많은 재산을 지닌 그는 세상이 심드렁하다. 그래서 해미와 같은 부류의 여성에게 호기심을 갖고 있지만 애정은 없다. 그는 물질주의적이고 타인에게 진정한 관심이 없다. 겉은 고상하지만 속은 텅 비어 있다. 그는 해미가 사라져도 아무렇지도 않다. 대마초를 피우며, 두 달에 한 번씩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며 쾌감을 얻는다.
벤을 의심하는 종수는 평소에는 관심 없던 자기 주변의 비닐하우스들을 하나하나 샅샅이 살핀다. 벤은 최근에 종수의 집 근처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웠다고 말했지만 종수가 보기엔 사라진 비닐하우스는 없었다. 그렇다면 벤이 태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벤은 해미를 죽였을까, 그저 은유였을까.
벤이 없앤 것이 비닐하우스였든, 해미였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해미는 자살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벤과 같은 사람들이 혹은 벤과 같은 얼굴을 한 사회가 이 세상에서 해미와 같은 사람들을 삭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미는 감성적이고 열정이 있지만 아직은 미숙한 모습으로 벤과 같은 사람이 주인인 세상에 위태롭게 발을 딛고 있다. 사람들이 비닐하우스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해미가 사라져도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다.
계속 벤 근처를 얼쩡거리던 종수는 어느 날 답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자위를 했던 해미의 방에서 자위 대신에 소설을 쓴다. 다음 장면은 눈비가 내리는 날, 종수가 벤을 죽이고 포르셰를 태우는 장면으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나는 이 장면을 종수가 쓰는 소설 속 이야기로 보는 게 더 맞지 않나 생각했다. 해미가 실종된 데 대한 분노를 종수가 벤에게 표출하는 장면으로 보지 않고, 벤을 추적하던 종수가 비로소 해미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벤으로 상징되는 물질주의 세상을, 혹은 자기 안의 벤에 대한 동경을 죽여버림으로써 비로소 글을 쓸 수 있게 된 이야기로 읽었다.
종수가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착각하고 벤을 죽이는 것이라면 이 영화의 결말은 파국이다. 하지만 종수는 벤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옷을 속옷까지 몽땅 벗어 벤과 함께 불태우고 알몸으로 자신의 차에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그 장면을 종수의 개인적 복수라기보다는 종수가 벤으로 대변되는 세계에 분노하고 그 세계를 죽이는 장면으로 읽었다. 종수가 벤을 죽이는 이유는 해미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이창동의 전작 영화 '시'가 시를 쓸 수 없었던 미자가 시를 쓰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면, '버닝'은 소설가 지망생 종수가 세상을 읽어가는 이야기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어쩌면 예술이란 무언가를 잃고 나서 그 잃음에 대한 보상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이 영화는 한 번 더 봐야 감이 올 것 같다. 오랜만에 메타포로 가득한 영화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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