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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교육 관련

안녕하십니까 학교입니다 | 권재원 ㅡ 교육현장을 왜곡시킨 '수요자 중심 교육'

by 릴라~ 2018.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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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저를 진보 성향으로 분류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른바 민주, 진보 정권이라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교육정책에 매우 부정적입니다. 심지어 그 시절의 교육정책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집니다. 특히 김대중 정부에서 끌고 들어와 유행어처럼 정착시킨 '교육 수요자'라는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립니다.

 

교육 수요자라는 말은 마치 교사를 교육이라는 상품의 판매자처럼, 학부모는 그것을 구매하는 소비자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습니다. 학부모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는 교사는 돈 낸 사람 뜻에 따라야 하는 것 아니냐, 대략 이런 식의 천박한 논리가 널리 퍼졌습니다. 이 논리를 따라 '선택권 강화'라는 말이 학교에 스며들었습니다. 시장에서 여러 생산자가 서로 경쟁하고 소비자가 그중에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듯, 교육도 여러 종류가 제공되면 소비자가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틀린 관점입니다. 교육에 수요자, 공급자라는 말을 쓰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학부모는 결코 교육의 수요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용어를 굳이 써야 한다면, 학부모 역시 교육의 공급자입니다. 왜냐고요? 교육을 받는 사람은 학생이지 학부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 내가 원하는 대로 가르치고 싶으니 결국 내가 교육 수요자 아니냐?"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 봉건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억압적인 생각입니다. 학생은 도리어 부모에 맞서 자신의 선택권을 주장할 겁니다. 부모에게 "내 인생인데 왜 엄마 아빠가 하라는 것만 해야 하느냐?"라고 항변하면서 말입니다. 이때 부모는 으레 "다 너 잘되라고 시키는 거야."라고 대답할 겁니다. 이 말 속에는 자녀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잘 알지 못하며, 부모가 대신 알아서 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는 정말 자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는 종종 자녀에게 필요한 것과 자신이 희망하는 것을 혼동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제3자가 필요하며, 그들이 바로 교사입니다. 교사는 훈련받은 교육 전문가이며 경력이 2~3년만 지나도 벌써 수백 명의 학생을 경험합니다. 경력 10년을 넘어가면 학생의 성향, 적성, 소질을 부모보다 더 잘 파악합니다. 부모아 달리 학생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교사는 섣불리 '희망'으로 포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교사가 학생의 진로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교사가 학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독일식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사람을 자유로운 시민이라 하겠습니까? 노예나 농노, 혹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 같은 삶 아니겠습니까? 민주정치의 이상은 페리클래스가 말했듯이 "모두가 타고난 재능을 빛낼 수 있는" 사회입니다. 따라서 교육을 행하는 주체의 뜻에 따라 전적으로 좌우되는 교육은 폭력적이며 억압적입니다. 그 주체가 교사이든 부모이든 간에 말입니다.

 

부모와 교사는 모두 교육의 공급자입니다. 공적인 교육의 공급자가 학교라면 사적인 교육, 소위 가정교육의 공급자는 부모입니다. 그런데 다만 돈을 냈다는 이유로 부모 스스로 교육 공급자가 아니라 수요자의 위치로 자리매김하는 순간 부모는 교육자가 아니라 교육기관에 가서 따지고 요구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집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함께 협력하여 아이가 바르게 성장할 수 있게 책임지는 교육자가 아니라 학교에 이것저것 해 달라고 요구하고 안 되면 항의하는 그런 존재 말입니다. 흔히 가정교육이 무너졌다, 밥상머리 교육이 문제다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기 자신을 '교육 수요자'라고 말하는 순간 가정교육이 어디 있고 밥상머리 교육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가르치고 부모는 돈만 내면 끝나는 게 됩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막으려면 부모들은 절대 교육 수요자라는 말을 입은 물론 머리에도 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교육 수요자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사회도 있습니다. 학생은 자기 삶의 주인이며,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에서 틀림없는 교육의 수요자입니다. 그런데 사회라고요? 사회 역시 앞으로 닥칠 여러 도전적 상황을 너끈히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사회의 질서와 규칙을 잘 지키며, 다른 구성원과 협력하는 사람들이 계속 공급되지 않으면 존속이 불간으합니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사람의 DNA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 역시 교육의 수요자입니다. 공동체의 자원 상당수를 교육에 할당하는 건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학교는 학생들이 장차 살아갈 때 필요한 능력과 소양, 그 중에서도 학생에게 맞는 능력과 소양을 길러 주어야 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과 소양을 갖춘 학생을 길러 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수요자에 대한 학교의 의무입니다. 부모 역시 자녀가 장차 살아갈 때 필요한 능력과 소양을 갖추는 일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또 사회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품성과 태도를 갖춘 시민을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학부모님 역시 교육의 공급자로서 수요자인 학생과 사회에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학생들이 공부하는 까닭은 미래를 준비하는 데 있지, 부모님들이 걸어왔던 길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교육이 고려할 것은 학생들의 필요이지 부모님들의 필요가 아닙니다. (중략) 교사는 학부모의 교육관과 타협하고 협상할 필요는 있을지언정, 학부모의 요구에 따를 이유는 없습니다. 교육 파트너의 관계이지 공급자 - 고객의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학생의 입장을 너무 강조하는 것 역시 문제가 많습니다. 왜곡된 "학생 중심 교육"이 그렇습니다. 일부 교육청에서는 "학생이 원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서 학생들의 교육 선택권을 강화해야 한다고까지 말합니다. 특히 이른바 혁신학교와 이를 추종하는 분들이 이런 주장을 많이 합니다. 학생들의 선택권 강화, 학생 중심 교육 등의 주장에 깔린 배경은 결국 학생의 요구에 따라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며, 학생들의 요구가 다양하기 때문에 학교는 이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해서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시장 논리입니다. 다양한 소비자의 기호에 맞춰 다양한 상품을 준비해서 어떤 소비자가 오더라도 판매할 수 있게 하자는 논리, 학교마다 교사마다 특색 있는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을 들고 나와서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하면 특색 없는 학교와 교사들은 시장에서 퇴출될테니 교육의 질이 높아질 것이라는 논리 말입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교육의 본질과 한참 떨어진 논리입니다. 물론 교육의 다양성은 중요합니다. (중략) 하지만 획일적 교육을 극복한 교육 다양성은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학생들이 각자 자기에게 맞는 서로 다른 교육을 받을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뜻이지, 학생들이 자기가 원하는 교육을 골라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즉, 필요와 요구를 구별하자는 말입니다. (중략)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원하는 소비자는 이른바 합리적인 소비자입니다. 그러나 실제 상품 시장은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당장 지난 3개월 동안 구입한 상품 중에 '필요'했던 것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따져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소비자로서 욕망했던 것과, 실제로 필요했던 것 사이에 꽤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중략) 이렇게 우리는 필요한 것만 요구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전혀 필요없는 것을 요구하며, 매우 긴요한 것은 오히려 멀리하기도 합니다. (중략) 


학생 중심 교육이 곧 학생이 선택하고 학생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교육이 될 수 없습니다. 힘들고 지루한 과목은 다 안 하겠다고 들 테니 말입니다. pp5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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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이 금지되었던 시절, 그래서 모두 공교육으로만 경쟁해야 했던 시절, 대입 경쟁은 오히려 요즘보다 더 치열했습니다. 누가 사교육을 더 많이 시키느냐가 아니라 누가 '자습'을 더 길게 시키느냐가 승부를 갈랐습니다. 긴 시간 자습하고 싶은 학생은 거의 없기 때문에 자율학습은 항상 무력으로 강제되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그 시절의 대학 입시는 요즘보다 훨씬 살벌했습니다. 한 번 경쟁에서 탈락하면 끝장이었습니다. 우선 10월에 학생부 종합 전형에 도전해 볼 수 있고, 거기서 실패하면 11월 이후에 수능 정시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원서도 여러 학교에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상위권에 있는 학생이라면 자기 욕심에 차지 않더라도 어느 대학이든 하나는 진학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10퍼센트 안에 드는 학생이라면 소위 인서울 대학 어딘가는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에는 학력고사, 요즘으로 치면 수능 정시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11월에 학력고사 보고, 그 점수 받아서 대학에 원서 내서 합격/불합격을 가리는데, 교차 지원도 안 됐기 때문에 단 한 장의 원서만 쓸 수 있었습니다. 2중으로 지원하면 두 학교 모두 불합격 처리되었으니 원서 접수 마지막 날까지 눈치 싸움을 하다가 건곤일척의 심정으로 원서를 던져야 했습니다. 이 눈치 싸움 때문에 지레 겁벅고 서울대 법대가 미달되어, 묻지 마 지원을 한 하위권 학생이 합격한 일도 있었습니다. (중략)


그 시절 명문대학에 입학했다는 것은 곧 이후 인생의 항로가 바뀐다는 뜻이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의 학생이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교과서를 씹어 먹을 기세로 공부해서 명문대학에 진학하면 그다음부터는 그 집안 전체가 일어서는 것이니, 거의 조선시대 과거 급제나 다름없었습니다. 반대로 이미 성공한 부모의 자녀는 또 그 신분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입시 경쟁에 올인해야 했습니다. (중략)


이 무언의 경쟁 압력이 주는 스트레스는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주었습니다. 고3병은 물론 고3어머니병 역시 매우 심각했습니다. 성적 비관 자살 소식도 요즘만큼이나 빈번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꽃다운 청소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가장 많은 이유는 개미지옥 같은 입시경쟁이었습니다. 그래도 1980년대가 지금보다 나았던 것은 사교육이 금지되어 있었던 덕분에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은 덜했다는 점입니다. 학교에 납부하는 보충 수업비, 자율 학습비 정도가 경제적 부담이라 할 수 있는데, 중산층 이상 학부모에게는 별로 큰 부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그 시절 입시 경쟁의 고통을 가장 많이 받던 당사자는 다름 아닌 학생 본인이었습니다. 한창 꿈을 키우며 꽃피어야 할 청소년들이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붙잡혀서 지루한 학습 노동을 강요받고, 단 하루의 시험을 위해 무한경쟁을 강요받았던 것이 바로 1980년대 입시 지옥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만약 그 시절을 지금보다는 훨씬 여유로운 시절로 바라보는 분들이 있다면, 학생이 아니라 학부모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요즘이 그때보다 더 가혹해졌다고 한다면, 경쟁 자체가 더 치열해지거나 입시 교육이 더 가혹해졌다기보다는 입시 경쟁의 연령이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살인적인 입시 경쟁은 고등학생, 그것도 인문계 고등학생의 이야기였습니다. 중학교 이하는 비교적 입시에서 자유로웠습니다. 200점 만점의 고입 시험에서 150점 이상 맞을 수 있는 학생이라면 특별히 점수를 높이기 위해 경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특목고나 자사고 따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후 3시면 학교가 끝났고, 달리 가야 할 학원도 없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이라면 집에서 시간을 정해 두고 예습, 복습, 문제풀이 연습 등을 스스로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1980년대 중학생들은 지금보다 훨씬 여유로운 '저녁이 있는 삶'을 누렸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 합격선에서 간당간당하는 석차 40~60퍼센트 선상의 학생들만 다소간의 성적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초등학생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죠. 요즘에는 그런 방송이 사라져 버렸지만, 그 시절에는 밤 9시가 되면 TV에서 "어린이 여러분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라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또 밤 10시 되면 사랑의 종이라는 것이 울렸습니다. "청소년 여러분 집에 들어갈 시간입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요즘은 어떤가요? (중략) "고등학교 3년 동안 꾹 참고 노력하자"가 "고등학교 때는 다 열심히 하니 미리 준비해야 한다"로 바뀌었습니다. 일단 이렇게 "미리 준비하자"가 들어온 이상, 그 "미리"의 시간은 점점 경쟁적으로 앞당겨지고 있습니다. 이게 경제학에서 말하는 위치재 경쟁입니다. 선행학습이라는 것은 남보다 먼저 시작했다는 이득을 노리는 것인데, 남들이 다 같이 시작하게 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남보다 더 앞서서 시작하기 위해 경쟁하고, 결국 터무니없이 어린 나이부터 입시 경쟁을 시작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고등학교 3년 눈 질끈 감고 고생하자"라는 말은 쉽게 던질 수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초등학생에게 "앞으로 10년만 꾹 참자"라는 말은 쉽사리 던지기 어려운 말입니다. 눈 질끈 감기에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며, 이미 어느 정도 성장이 완료된 고등학교 3년과 신체적,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큰 변화가 일어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의 3년은 그 질도 다릅니다. 


요즘 학생들은 1980년대와 달리 고3병이란 말도 잘 쓰지 않습니다. 고3이라 해서 딱히 다른 게 없는 겁니다. 어쩌면 고3이 가장 편한 학년일지도 모릅니다. 이때쯤 되면 이미 승자와 패자가 거의 가려졌고 10~20퍼센트 정도의 학생들만 그 안에서 다시 순위를 가리기 위해 노심초사할 뿐, 나머지 학생들은 도리어 느긋한 모습을 보여줄 정도니까요. 어차피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10년간 고3처럼 살아왔으니, 진짜 고3은 오히려 이 생활의 종점이 다가온 차라리 속 시원한 학년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찢어진 것처럼 아픕니다.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정말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교육열이 아니라 일종의 아동 학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점에서 '사교육 문제'라는 말은 이 고통의 근원을 가리는 말입니다. 이 고통의 근원은 초장시간의 학습노동, 과중한 경쟁 및 성취 압력, 그리고 이 학생들의 몸과 마음의 건강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습니다. "아이들 잠 좀 자게 하자. 아이들 밥 좀 먹게 하자." 이런 목소리보다 "사교육비 때문에 맞벌이를 해야 할 지경이다. 웬만한 중산층 가정도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투잡을 해야 한다, 가계 부채가 심각하다, 허리가 휜다" 등등의 목소리만 엄청나게 증폭되어 들릴 뿐입니다. 아이들 건강보다 돈 이야기가 더 크게 들리는 현실이 몹시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화가 납니다.


1988년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때도 학생들은 입시 경쟁과 성취 압력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지만, 적어도 어른들이 그 고통을 제대로 봐 주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없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물론 어른들이 바라본다고 해서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른들은 그저 "고등학교 3년만 꾹 참고 견뎌라. 그럼 대학 가서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다"라는 말로 어르고 달랠 뿐이었습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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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거의 10년 이상을 이 악다구니 같은 경쟁판에서 보내야 합니다. 현실론을 이유로 악으로 깡으로 견디기에는 너무 긴 시간입니다. 더구나 아직 몸과 마음이 제대로 여물지 않은, 어리고 예민한 시기를 포함한 10년입니다. 자라는 과정에서 그런 강제적인 고생을 하게 되니 몸과 마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자라고 망가집니다. 그것도 부모의 적극적인 강요나 방조 아래 말입니다. (중략)


이제 아이들을 안타깝고 자애로운 시선으로 돌아봐야 합니다. 그런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본다면 방과후학교를 강화해, 돌봄 교실을 밤 10시까지 연장해서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부 방침에 부글거리는 분노가 치솟을 겁니다. 아이들이 늦게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건 바뀌지 않았는데, 학원에서 비싼 돈 들여가며 아이들 혹사시키던 것을 학교에서 저렴하게 혹사시키는 걸로 대체하면서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구는데 어떻게 용서가 되겠습니까? 


이 시점에서 무엇이 진짜 고민해야 할 점인지, 그리고 "사교육이 문제야"라고 말할 때 학부모님들의 마음속에서 진정 심각한 문제로 여기고 있었던 점이 무엇이었는지 되짚어 보고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들의 과중한 학습 노동이 문제인가요? 아니면 학부모의 사교육비 부담이 문제인가요? (중략)


대체 우리 어른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냉담해졌습니까? 저는 오히려 그게 더 놀랍고 안타깝습니다. 어른들 마음속에서 아이들에 대한 측은지심을 되살려야 합니다. 교육에 대한 이런저런 논의는 우선 아이들에 대한 측은지심을 살리고 난 다음의 문제일 것입니다. pp145-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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