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에 대한 역사적/철학적/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한 책. '시험'이 '교육'을 대체한 한국 현실에서 시험과 교육이 각각 제자리를 찾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뒤틀린 현실을 정확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뻔하지 않은' 관찰과 분석으로 독자들에게 그런 귀한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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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안이건 밖이건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생애의 교육과정이 하나 있다면 단연코 '시험'이다. 시험을 통해 배웠고, 시험을 통해 지식을 선정했고 시험을 통해 인생의 순간을 결정했다. 천 년 세월 동안 과거 시험으로 인해 만들어진 양반의 삶과 국가권력, 일제시대를 통해 사회적 일상공간에까지 뿌리 내리게 된 다양한 경쟁시험, 그리고 해방 이후 객과닉 위주의 시험방법이 학교와 사회를 장악하게 된 시간.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인들에게 시험은 통제의 좁은 수로에 갇히게 하는 수단이자 그 수로를 타고 상승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좁은 수로 속ㅇ서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세상에 적응하고 보상받거나 시험에 실패해 사회에서 버려졌다. 시험으로 인해 좌절하고 희망했던 역사만큼, 우리들은 시험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요란스럽게 반응하지만, 동시에 시험이 중요하기 때문에 당황스러울 만큼 손쉽게 시험주관자의 요구에 제압된다. 시험순응적인 몸과 의식이 되었고, 시험이란 일단 잘 쳐야 하는 국민 공통과제였다. pp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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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귀족계급은 귀족이라는 이유로 공통으로 도것하고 암기하고 해석하고 문장을 짓고 논의해야 할 교재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귀족은 공통의 학문세계를 가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귀족은 소유와 권력, 혈통과 세습을 말한다. 귀족에게 가톨릭이 압도적 정신이었다고 해도, 가톨릭 정신이 귀족계급을 규정하는 핵심기준은 아니었다. 계급으로서 귀족에게 공통된 문화는 존재할 수 있어도, 귀족이 공통된 교육과정 또는 학습내용, 그에 따른 교육적 학습적 성취를 나타내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시험을 실시한 조선과 중국에서 양반과 사인은 양반계급으로서의 권력과 자산을 세습하지만,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조선에서 양반이라면, 공통적인 학문세계인 유학을 공유하고 있어야 했다. 이 세계를 공유하도록 만드는 제도적 장치가 적어도 고려시대 이후부터 존재했고 그 제도가 양반들의 삶을 규정했다. 그것이 과거시험이었다. 유학이 압도적인 정신적 가치관이었더라도, 과거제도가 없었다면 유학을 학습하고 유학으로 양반계층들이 의사소통하고 유학 중심의 학문세계 구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과거제도가 양반 또는 사족을 동일한 유학적 가치관으로 집단화할 수 있었다. p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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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하는 능력의 타당성, 운영의 공정성은 문제였다. 단순히 몇 가지 기술적인 측면을 고쳐 사용하면 된다는 입장도 있었지만, 진작부터 과거제 외의 다른 선발방식의 도입과 혼용, 나아가서는 과거제 폐지 주장도 있었다. 조광조가 유능하고 뛰어난 인재를 천거해서 채용하는 현량과를 도입했고, 이이, 박제가, 정약용 등도 과거 이외의 인재등용 방식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심지어는 과거시험 답안지에 과거제도를 비판하고 다양한 선발방식을 제안하는 이도 있었다. 과거시험 논쟁은 시험의 종류, 과목, 방식, 채점 등을 둘러싸고 다양하게 전개됐다. p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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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과학자 다니엘 리젤에 따르면, 어린 시절에 도덕적 질문을 더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어린 시절에 한가하게 도덕적 질문을 마주할 시간이 없다. 성장기 내내 도덕적 문제에 직면할 시간이 없고 그 도덕적 문제조차도 간단히 정답처리하는 시험문제로 대신한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시험문제와 정답으로 만난다. p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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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컨닝 방지를 위해 책상 위에 올려두던 책가방이 2008년 초등학교에서는 규격화된 종이 가림막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가림막 속에서 시험을 친다는 것은 응시자 모두에게 시험이 고립된 개인 능력을 잰다는 사실을 고지시켜 준다. 아이들은 면벽 수도승처럼 가림막 속에 갇혀 시험문제지하고만 대결한다. 응시자는 온전히 홀로, 어떤 인적, 물적 지원도 금지당한 채 답을 찾아내는 능력을 요구받는다. 어떠한 협력도 부정이고 비리이다. 시험에서 요구하는 지식은 고정불변이고, 그 지식은 숱한 가짜들 속에 숨어들어 있으니 가려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빠르게 변하고 집단지성을 통해 공유되고 재구성되며 확장되는 지식을 날마다 만나고 있는 이 시대에 고정불변의 답을 찾는 일제고사는 낡아빠진 게임이다. 세상은 점점 더 협력해서 지식을 생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제고사는 과거에 매몰된 채 있다. p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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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험 결과를 책무성으로 치환하는 논리에 대한 비판이 영미 교육학계에서부터 제기되었다. 시험이 책무성을 높이고 학생의 지적 성장을 돕는다는 믿음은 숫자에 대한 환상에 불과하며, 시험 점수를 안다고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를 절대 알 수 없다고 학자들은 비판했다. 대니얼 코레츠의 실험에 따르면, 성적이 많이 오른 학교에 재시험을 실시한 결과 점수는 그렇게 오르지 않았다. 성취도 향상은 환상에 불과했다. 그리고 시험 공부로는 수준 높은 생각을 하는 학습자를 만들어낼 수 없고, 교사의 창의성과 자율성도 억압하게 된다. 시험문제지의 반복풀이만으로도 점수는 충분히 높일 수 있다. "사회적 의사결정에 양적 지표들이 많이 사용될수록 평가과정은 타락하고 왜곡될 가능성이 크며, 제대로 평가돼야 할 사회적 발전도를 왜곡하고 부패"시킨다는 캠벨의 법칙은 학교에서도 틀리지 않았다. 시험결과로 대체된 책무성은 우리나라에서도 동일한 문제를 일으켰고 비판을 받았다. p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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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생이 된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기본적으로 삶의 유예를 의미한다. 가족관계에서는 효도를 유예하고, 개인 심리에서는 모든 충동과 취향을 유예하고, 사회적 인간관계에서는 인간관계를 미뤄두는 것이다. 유예했던 그 시간을 시험이 끝난다고 돌이킬 수 없다. 다만 시험결과가 보상해주거나 더 깊은 좌절에 빠트린다. 삶을 유예하고 얻은 시험 준비기간. 그 시간의 효율적 사용을 위해 온갖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고 목적 달성에 적합하게 시간을 배치한다. 유혹 차단의 첫 단계는 흔히 관계의 단절이다. 성인들은 스스로 암자, 독서실, 고시원 같은 곳으로 자신을 유폐하거나 군중 속에서 홀로 지낸다. 그래서 시간을 최대로 확보한다. pp286-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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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개인에 관한 저인망식 기록을 하는 현재 학교생활기록부 양식을 바꾸어야 한다. '전인, 다양한 능력, 종합적 평가'라는 이유로, 학교생활기록부는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기록하도록 변해왔다. 교육적 내용, 교육적 필요가 우선하지 않고, 걸려드는 건 뭐든지 기록한다든가 사회적 필요가 있으면 뭐든 기록을 추가하는 방식은 저인방식의 기록방식이며, 망라형 기록방식이다. 기록되는 모든 것이 교육적일 것이라는 생각, 더 많이 기록하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 지금 보기에 필요하다 싶은 모든 것을 망라해 기록하면 장차 필요할 것이라는 시각, 이는 한 인간의 삶을 기록 속에 집어넣어 기록 속에 가두어버리는 행위이다. 양심의 자유를 위반하는 행위이며, 적극적으로 양심에 개입하여 평가하는 행위이다. 과연 학생들의 봉사활동과 독서활동 상황까지 모두 기록하여 국가가 준영구적으로 그 기록을 보관해야 할 타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개인의 전면적 발달을 지원해주는 기록이 전면적 발달을 검열하고 오히려 더 많이 발달한 이에게는 더 많은 기회를 주고, 발달의 기회를 충분히 얻지 못한 이에게는 발달 기회를 박탈하는 도구가 될 위험성이 있다. 이것이 기록이 지닌 폭력성이다. 결과 기록이 도움이 아니라, 삶의 기회를 규정해버리는 한, 차라리 모든 기록을 지워야 하지 않을까. 일제시대 학적부 기록이 반일사상자를 검열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 역사를 반성해보면, 교육적 기록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교육적 기록이 인간 삶의 기회를 더욱 확장할 수 있는 자원이 되지 못한다면, 기록은 그 순간 폭력이 된다. p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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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한국사회에서는 완전한 인간을 요구하고 있다. '전인'이라는 명분으로 모든 완전한 것을 갖추기를 요구하고 그 완전성이 진입 단계에서 검증된다. 대학 입학을 위해 봉사도 많이 했고, 공부도 잘 하면서 자신이 정한 목적에 따라 계획성 있게 도전과 모험을 하는 창의적 삶을 살았으며, 인성도 좋고...... 취직을 할 때도 이 온전한 인간을 요구한다. 사실 그토록 완전한 인간이라면 굳이 교육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모든 인간의 발달 가능성을 믿는다면, 덜 완전한 존재에게 더 많은 기회가 필요하다. 완전한 인간을 선발했다고, 완전한 조직이 되고 완전한 사회가 되는가. 실제로 최고의 인간을 뽑았다고 하는 대학 안에서, 조직 안에서 늘 많은 문제들이 벌어지고 있다. 완전성은 영원한 추구이며 과정일 뿐이다. (...)
평가는 인간의 완전성을 판가름해서 상벌을 주는 행위가 아니다. 평가를 통해 누가 누구를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인간이기에 애초에 불가능한 프로젝트이다. 평가는 평가하는 자와 평가당하는 자 모두가 현재의 실천에 스스로 참여하고 변경하고 연대하는 활동이다. 평가를 통해 타인들과 소통하고 더 잘 소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며, 자신의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완전하지 않기에 스스로 평가하고 남의 평가에 귀 기울이며 부당하는 평가에는 저항하고, 평가를 통해 자기 삶과 사회를 변화시켜 간다. pp356-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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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은 질문의 향연이어야 한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를 시험에서 만나 세상을 읽고 다시 해석하며 세상을 재창조할 꿈을 꿀 수 있다면 좋다. 질문의 향연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다. 질문을 통해 다른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시험이 있을 수 있고 이런 물음에 답해 보려 안간힘을 써보고 다른 사람들과 생각도 나눠보며 생각이 커지는 앎의 축제 같은 시험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시험을 지향해야 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는지, 사랑과 정의가 무엇인지...... 철학자들은 한가해 보이는 이런 질문들을 던졌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들은 인류의 삶에 새로운 길을 냈다. 가드너는 이런 질문들을 "큰 질문"이라고 했다. 큰 질문이란 제한된 답이 있는 질문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근본에 해당하는 질문이다. 가령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질문, 마냥 신비해보이는 우주 생명체에 대한 질문은 큰 질문이다. 시험은 흔히 채점의 어려움 때문에 이런 큰 질문은 하지 않는다. 큰 질문들 앞에서 시험은 대체로 무력하다. 그래서 무력함에 솔직하지 않은 채, 큰 질문들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편견부터 드러내기 십상이다. 그러나 인간의 평가는 큰 질문 앞에 공동으로 맞서 협력하는 데 더 큰 가치가 있다. 큰 질문을 붙들고 답을 찾고 상호평가를 통해 답을 재구성할 수 있다.
큰 질문일수록 해석의 다양성은 언제나 있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이 당대의 지적 권위자 볼테르에게 맹비난을 받았듯이, 어떤 집단은 당대 사회나 집단이 전혀 수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서야 빛을 발하는 경우들이 있다. 시대를 앞선 해석에 시대의 채점자들은 주저 없이 내쳐버린다. 그렇다고 그 탐구는 무의미한가? 금서가 되고, 찢겨 버려졌던 답들이 역사 속에서 부활하여 의미를 되찾았던 숱한 사례들을 떠올린다면, 답의 다양성이 열려 있어야 한다. 다양성이 존중받을 수 있을 때, 무의미한 무한경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
큰 질문의 회복과 새로운 답을 찾기 위해서는 기존의 정답만 쫓아다니는 쪼잔한 인간들 대신에 세상에 참여하고 의미를 추구할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레베카 솔닛은 재난의 폐허 속에도 인간들은 공적 생활에 참여하면서 기쁨을 느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큰 재난에 이웃들은 집에 처박혀있기보다 공적 공간으로 나와 서로 돕고 통제하는 수평적 권력을 누리게 된다.
공적인 공간에서 적극적인 실천과 참여할 기회가 생기면, 인간은 성장한다. 인간들에게는 밀실의 자유만큼이나 광장에서의 정의와 광장에서의 공적 실천이 필요하다. (...)
평가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참여와 평가는 어느 하나가 선행하고 다른 것이 후행하는 분리된 활동이 아니다. 참여의 근본 속성이 평가를 동반하며, 평가는 새로운 참여와 활동을 구체화한다. 평가는 더 자유롭게 모험하고 비판하며 새로이 창조하는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이다. 참여의 현장 속에서 서로 협력하는 활동이며, 자신의 기준을 높이고 성찰하는 활동이다. 평가를 개인의 통제와 서열화에 사용하면 인간은 작아지지만, 인류의 앎을 향유하고 재창조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더 넓은 세상 속에서 더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을 만날 수 있다. pp362-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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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케인이 <콰이어트>에서 주장했듯이, 현대 사회는 외향적인 사람들이 평가받는 데 유리하다. 남들 앞에서 화려하게 과정과 결과를 선보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수행평가가 유리하지만, 떠들썩한 곳을 피해 조용히 사색에 잠겨 몰두하기를 좋아하는 내향적인 사람들에게 수행평가는 유리하지 않다. 수행평가가 다양한 형태의 평가를 내세워 토론하고 논박하고 타인들 앞에서 과시하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성과로 만들어내지 못한 내면적 변화는 무의미한가? 학생 내면의 앎과 가치관에 변화가 있어도 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시간적 제약이 있는 제도 속에서 가시적 성과의 측정은 시간 사용과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게 유리하다.
암기의 결과만 보여주는 시험보다 수행평가가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압박감이 더 높다. 과정과 결과, 즉 모든 행위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고 순간 순간마다 생산성과 효과성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학교에서만큼은 교육활동 공개의 이유가 점수나 등급이 아니라 학생 내면의 변화를 전문적으로 관찰하고 촉진하는 성장과정이 되지 않는다면, 교사와 학생에게 수행평가는 지필시험 없이 날로 먹는 평가가 되거나 매우 피로한 평가지옥이 될 가능성이 있다. p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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