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관련 책이 많지만, 일상언어의 한계를 이처럼 선명하게 짚어주는 책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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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게 하기'는 일상의 자동화된 인식을 배제하고, "사물에 대한 감각을 알려진 대로가 아닌 지각된 대로" 인식하려는 노력이다. 즉, 습관적, 관용적, 상투적 표현을 배제하고 지각된 그대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낯설게 하기'이다. 그런 점에서 '낯설게 하기'라는 용어는,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차라리 '작가 자신에게 지각된 그대로 표현하기'다.
일반언어는 누구나 사용하는 관습적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관습적, 관용적 태도를 유지시켜 준다. 반면 문학언어 혹은 창작언어는 화자가 실질적으로 느낀 그대로, 혹은 화자만이 느끼는 그대로 서술한다. 그런 점에서 화자만의 감각과 개성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pp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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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들은 돈밖에 몰라"라고 말하는 사람과 2) "자기 이익만 좇는 인간들은 돈밖에 몰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적잖이 편차를 갖는다. 1)은 인간 모두를 싸잡아서 단정하기 때문에 거칠고 과도하고 극단적이다. 반면 2)는 어떤 특정 부류의 인간만을 경계할 것이다.
또한 1)"남자들은 너무 이기적이야"라는 인식보다는 2)"내가 사귀어본 두 명의 남자친구 모두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었어"라고 서술하는 것이 문제를 보다 분명하게 직시하도록 만들어준다. 1)처럼 말하면 70억 인구 중에서 절반인 35억을 싸잡아 이기적이라고 단정하는 꼴이다. 반면 2)는, '내'가 사귀어 본 친구만 그럴 뿐이어서, '내'게 잘못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인식을 가능케 한다. 또한 '두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아직 알 수가 없는 상황을 인식하게 해준다. 그리고 '남자친구'로 만난 남자만 그럴 뿐, 선배나 삼촌이나 고모부나 선생님은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가 남는다. 이렇듯 1)보다 2)처럼 청킹다운하여 구체적으로 말할 때, 사건의 문제와 성격이 한결 분명해지고 가벼워진다.
마찬가지로 1)"환절기라서 감기가 결렸다"라고 인식하기보다 2)"오늘 아침 일교차가 심하다는 일기예보를 듣고도 멋을 내느라 반팔을 입고 나간 것이 화근이었다"라고 서술하는 것이 보다 명료한 인식일 수밖에 없다. 1)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한 환절기마다 감기 걸리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2)에서는 자기 행동이 문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시켜 준다.
지극히 평범하게 살면서도 과다한 괴로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너무 거칠거나 너무 조밀하기 일쑤다. '사건' 자체가 아니라 '언어'에 의해, 지나치게 커다란 문제로 확대되거나 지나치게 잡다한 문제 속에서 허덕인다. 크게 말하면 큰 문제가 되고, 잡다하게 말하면 잡다한 문제가 되며, 정확하게 말하면 문제 또한 정확하게 잡아낼 수 있다. 사용하는 어휘와 문장 표현 방식에 따라 사건 역시도 다른 크기로 다가온다. pp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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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교통정책은 엉망이야.
- 서울시 교통정책은 엉망이야.
- 서울시의 대중교통에 관한 정책은 엉망이야.
- 서울시의 시내버스 통행 시간은 너무 불규칙해.
- 우리 동네 마을버스의 운행시간은 매우 불규칙해.
- 5-1번 마을버스의 운행시간은 매우 불규칙해.
- 콧수염 기사 아저씨가 운전하는 25-1번 마을버스의 운행시간은 매우 불규칙해.
거창하게 말한다고 해서 거창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만큼 허황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구체적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반드시 구체적인 사람은 아니다. 좀스러운 사람일 수도 있다. 때로는 일반화를 통해, 때로는 구체화를 통해 대상을 자유로이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개구리들은 대체로 거창하고 거친 문장으로 사유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습관이 몸에 밴 개구리는 결코 사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거꾸로, 거친 문장 표현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기 일쑤다.(...)
- 요즘 학생들은 수업 태도가 엉망이야.
- 이번 글쓰기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수업 태도가 안 좋아.
- 이번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 몇 명은 습관적으로 지각하거나 졸거나 스마트폰으로 딴짓을 해.
- 내가 아끼는 학생 하나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수업 중에 자꾸 졸아서 안타까워. p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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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통념이란 이렇게 거시 시간을 하나로 뭉뚱그려 놓은 과장된 진리다. 우리가 살면서 은연중에 당연한 사실이라고 믿고 의지하는 대부분의 통념이 이처럼 지나치게 거친 표현들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세상에 건강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라든가, "자살은 너그러운 자신조차 용납하지 않는다"와 같은 일반 잠언은 물론, "우리 집은 가난해서 나는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했다"라든가, "그 친구는 막내로 자라서 자기밖에 몰라"라든가, "그는 경상도 출신이어서 과묵하고 무뚝뚝해" "나는 넘누 무식해" 등과 같은 개인적 경험과 판단 역시도, 언제든지 해체 가능한 통념의 일종에 불과하다. (...)
자살은 결코 바라직한 선택이 아니지만 이러한 생각조차 허울 좋은 휴머니즘적 관념일 수 있다. 어떤 자살은, 일테면 헤맹웨이나 들뢰즈나 노무현처럼, 다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한결 강렬한 에너지 운동의 결과였다. (...) 막내로 자랐다고 해서 모두 자기밖에 모르는 것은 아니며, 엄밀히 말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밖에 모르며 살아간다. (...)
삶의 진실이나 문제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진실과 문제들을 다루는 나의 생각과 언어가 너무 투박하거나 거칠거나 단순해서, 오해를 사거나 시비가 붙거나 헛고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섬세하고 날카롭게 사유하는 한, 문제가 발생해도 그것은 이미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발견하는 힘이며, 문제에 도전하는 기회로 작동할 수 있다. pp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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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겪는 중요하다 싶은 모든 사건은 적어도 서너 가지 이상의 이질적인 진실이 엉켜 있는 매듭이어서 중요하게 느껴지는 거일 터이므로, 이들 사건에 대해 촘촘히 성찰해야 한다.
좋은 글이란 하나의 사건을 단지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해 놓은 글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 속에 묻혀 있는 삶의 숨은 진실들까지 함께 복원해 놓은 글이다. p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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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동시에 무엇이든 새로이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심의 상태는 가장 무력한 상태이자 가장 폭발의 잠재력이 강한 카오스의 상태다.
결국 무욕과 무심의 마음은, 모든 마음 상태 중에서 언제나 으뜸의 마음 상태일 수밖에 없다. 무심의 자리야말로 초발심의 자리이자, 공한 자리이며, 사무사한 공간이자,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마음 상태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쓰기의 출발점이다. 기존의 낡은 생각에 갇혀 있으면 낡은 문장만을 답습할 수밖에 없다. 어떤 생각, 어떤 선입견도 없는 순수 무지의 깊은 침묵 속에서 모든 생각, 모든 상상이 가능한 지점에 이를 때야만, 새로운 형태의 문장이 생겨난다. (...)
아무것도 생각 않는 침묵의 상태에 머물면서, '침묵보다 나은 말'이 생겼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말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가 평소 구사하는 언어는 무심한 침묵보다도 못한 말이기 일쑤다.
무심의 순간은 무엇보다 자기 부정의 순간을 뜻한다. 특히 작가를 꿈꾸는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금의 자기 모습이 아니라, 매력적인 글을 쓰게 될 미래의 자기 모습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자기 생각을 말하기보다, 지금의 자기 생각보다 뛰어난 생각들을 주워 담기 위해 침묵에 빠지기 마련이다. 미래의 자신이 진짜 자신이고, 지금의 자신은 하루빨리 부정되고 단절되어야 할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자기를 바라보기를, 마치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은 주제에 자신을 업신여기는 어떤 사람을 바라보는 기분으로 스스로를 바롸봐야 한다. 누군가 지금의 내 단점과 문제점을 말하면, 그것에 대해 기분 상해할 자존심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지금의 자신을 자신이 먼저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자기 부정의 정신에 머물러야 무엇이든 배우고자 하는 강렬한 정신으로 가득 찬다. 이제까지의 생각들이 끊어지고 새로운 질문들이 끓어넘치는 자리 위에 자신을 세우기. - 아마도 이 자리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언제 어디서든,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모든 창작의 출구이자 시작의 출구일 것이다. pp10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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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주 전체를 관조한다는 것인가. 하루하루 일어나는 일을 가만히 바라본다는 것인가. 다만 아무생각도 않고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인가. 눈앞의 특정 물질을 응시한다는 것인가. 눈앞의 변화에 주목한다는 것인가. 사건이나 사물의 현실태에 주목하여 본다는 것인가. 잠재태를 살핀다는 것인가. 가능태로 본다는 것인가. 심층태를 읽는다는 것인가.
본다는 것 자체가 언제나 무한한 시점 중에 하나의 시점일 뿐이다. 생각한다는 것 역시 무한한 관점 중에 하나일 뿐이다. 이제까지 주장된 모든 진리는 하나의 시점으로 생겨났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모두 옳고 그르기 이전에 하나의 시점에 불과하다. 물건을 살 때, 같은 종류의 다른 상품이 얼마든지 많다면, 무척이나 꼼꼼히 따져 보고 비교해 볼 것이다. 모든 생각은, 무한한 시점 중에 하나일 뿐이어서, 얼마든지 다른 시점으로 변할 수 있고, 얼마든지 보다 나은 시점도 가능하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우리는 동시에 무한히 많은 시점 중에서 단 하나의 시점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한한 시점 중에서 굳이 이 시점이 택할 만한 가치와 효과가 있는 것인가를 언제나 되묻지 않을 수 없다. p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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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제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생겨난다. 사물에 대한 개념은 사물 자체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사물에 다가가는 나의 태도, 나의 문제설정 방식에서부터 사물의 정체가 규정된다. 내가 그것을 필기도구로 보면 필기도구이고 장난감으로 보면 장난감이다. 법적 문제로 보면 법적 문제만이 문제가 되고, 인성 문제로 보면 인성 문제만이 문제가 된다.
쓰잘 데 없는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산적인 문제를 창조하는 사람이 있다. 문제에 따른 답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니라 문제 설정부터 먼저 정확하게 해야 한다. 문제에 알맞은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니라 문제 자체를 알맞게 제기해야 한다. 언제나 문제를 풀기 전에, 그것이 과연 풀 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p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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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단지 대상을 중립적으로 관찰하여 기록하는 작업이 아니라, 동시에 나의 관점, 거리, 욕망, 태도 등을 함께 드러내는 일이다. 나의 모습도 함께 드러내는 일이어서, 대상과 화자가 동시에 생성되는 과정이며,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자신이 '언어화'를 통해 동시에 출현하는 일이다. (...)
'타자에 대한 나의 어떤 시점'은 타자를 규정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타자에 대한 어떤 시점'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과거 - 현재 -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듯, 나와 대상이 함께 존재하고 동시에 태어난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의 사건을 놓고 다양한 언어화가 가능하다면, 똑같은 사건을 두고도 무한에 가까운 조합과 변주가 가능하다면, 결국 지금, 여기에 대한 해석과 반응의 종류가 무한 층위와 각도에서 가능하다면, 우리는 우리가 비록 시인이나 소설가가 아닐지라도, 실제 사건을 '언어화'할 때마다 어떤 문장으로 옮겨야만 가장 적절한 최선의 '언어화'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언어화'보다 한결 더 뛰어난 인식으로서의 '언어화'가 존재하지 않을까 하고 항상 의심해야 한다. 어떻게 표현해야 보다 정확하고 보다 날카롭고 보다 풍요롭게 묘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더 이상 작가나 시인만의 고민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일상의 의미와 가치를 보다 뜻깊게 포획하기 위해서라도 무한 층위의 언어화 과정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마치 외출 때면 가장 적절한 외출복을 고르듯이, 최적의 언어를 골라야 한다. pp1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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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어떤 자극, 어떤 사건이나 상황 그자체로부터 구속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적어도 첫째, 관심의 초점화를 통해, 둘째, 문제 설정 방식을 통해 전혀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고 다른 반응과 결론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혀 다른 언어 문장을 구사함으로써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반응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는 사건이나 상황에 그대로 구속되지 않는다. 적어도 감각이 얼어붙고, 보다 강렬한 관심의 초점화나 해석 능력이 부재하고, 문제설정을 고지식하게 하고, 그리고 언어를 아주 단순하게 기계적으로 구사할 때만 외부 사건에 구속당한다.
우리는 세상에 둘러싸여 꼼짝 못하듯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관심의 초점화', '다양한 문제화 방식', '무한한 사건의 언어화'와 같은, 적어도 세 겹 이상의 자유선택권을 갖고 세상과 만나고 있다. -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놀랍고 신기한 사실인가. 얼마나 근사한 현실인가! p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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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통념적 일상언어를 사용하여 일상을 살아간다. 일상언어는 말 그대로 일상을 유지시켜 주는 언어이기 때문에, 일상언어가 우리 자신의 생활 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관습적으로 통념적으로 두텁게 쌓여 있는 한, 자신의 일상은 바뀌지 않는다.
일상이 절대적 현실처럼 스스로의 생 위에 군림한다. 관습적, 통념적 일상언어를 사용하는 한, 마치 자신이 벌레 같은 생을 살고 있는 충격적 진실을 자각해야 하는 순간에도 다만 출근시간이나 기차시간, 가족과 지점장의 반응 따위를 걱정하며 죽어가는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처럼, 그날그날의 소소한 일상 걱정에 눌리고 쫓기며 늙어 갈 수밖에 없다.
특히 거칠게 사유하고 거칠게 청킹하는 일상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한, 거친 통념에 갇힐 수밖에 없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즉흥적이고 통념적인 수준의 자유연상에서 벗어나야만, 새로운 생각, 새로운 문장과 만날 수 있다. 대상을 보다 창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생각과 문장을 발견하는 결정적 순간을 경험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상투적인 문장과 통속적인 개구리 인생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pp12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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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언어는 매우 단순해서, 정확한 묘사보다는 가장 단순한 일상 정보 수준으로 요약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1) 부정확하고 거칠다. 부적절한 어휘를 함부로 사용한다. 얼핏 보면 비슷한 뜻이지만 엄밀히 다른 의미의 어휘를 그대로 사용하곤 한다. 그리고 2) 과장된 관용구나 상투적 표현을 남용한다. '정말이지', '사실'과 같은 습관어와 간투사의 남발, 가령 '배고파 죽겠다' 같은 과장된 관용구 표현이 갖아 흔한 일례다. 게다가 3) 지루하다. 중언부언 혹은 횡설수설의 비경제적 문장을 아무렇게나 사용한다. 짧게 표현해도 좋을 내용을 길게 늘어놓는다거나, 특정 주어나 명사를 문장마다 거듭 반복한다. 뿐만 아니라 4) 부자연스런 표현을 남용한다. 비속어나 유행어 혹은 전문어, 지나치게 멋을 부리는 미사여구 등과 같이 부자연스런 언어를 나발한다.
이와 같은 일상언어로 세상을 인지하는 한, 세상은 너무 단순하게 다가오거나, 너무 거칠게 다가온다. 과장되게 다가오거나 지루하게만 다가온다. 부자연스럽거나 잘못된 형태로 인식되거나 비속하게만 느껴진다. 무엇보다 일상언어를 사용하는 한, 나의 세계 또한 일상적이고 통념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p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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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에서는 말하기, 듣기의 대화가 치료 방법의 전부이다. 대화만으로 치료가 가능하다니, 일면 매우 놀라운 일이면서 일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진단이다. 스스로 말한다는 자체가 스스로 의식한다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읽힌다는 것은 자기 마음을 연다는 뜻이며, 듣고 토론한다는 것은 함께 공감을 나눈다는 뜻이다. 어떤 문제일지라도 그것을 스스로 의식하고 마음을 열어 타자와 나누고 타자가 함께 공감해줄 수만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물리적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을지라도) 더는 치유불가능한 정신적 문제일 수 없다. p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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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년 이상을 습작해야 일상적 리얼리티도 벗어나고 주관적 리얼리티도 얼마간 벗어나는 듯하다. 비로소 소아적인 상태를 벗어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그럴 법한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법한 개연성은 좋은 글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누구나 그럴 법하다고 인정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제까지는 존재하지 않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내용이어야 한다. (...)
모범적 리얼리티란, 이렇게 문장만 다듬어져 있을 뿐, 아무런 문제의식도 일으키지 못하는 '범생이'들의 언어 세계를 일컫는다. 통념적 리얼리티나 주관적 리얼리티 못지않게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가장 답답한 리얼리티다. 삼사 년차 습작생 중에 이런 글을 쓰는 친구들이 많다. p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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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라. 작가와 독자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오직 문장뿐이다. 독자는 글쓴이의 의도를 알 길이 없는 채로 다만 적혀 있는 문장만을 따라간다. 첫번째 문장, 다음에는 두번째 문장, 그리고 첫째와 둘째 문장을 읽고 나서야 세번째 문장과 만난다. 그런 다음, 그러니까 첫째 둘째 셋째 문장을 만난 다음에야 네번째 문장과 만난다.
독자와 마찬가지로 창작자 역시 문장만 따라가야 한다. 첫번째 문장을 써놓고, 첫번째 문장에 알맞은 두번째 문장을 찾아야 한다. 두번째 문장을 써놓은 다음엔, 자신이 구사한 첫째와 둘째 문장 다음으로 오면 제일 좋을 세번째 문장을 찾아야 한다.
리드미컬하게 이어지는 리듬 속에서 다음 문장을 선택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의도는 최소한만 간직한 채, 언어 스스로 다음 언어를, 문장 스스로 다음 문장을 이끌어 가도록 언어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 (...)
글은 이처럼 문장 스스로 긴밀하게 이어지면서 얼마간 작가가 의도했지만 그러나 작가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그러니까 작가와 언어가 서로 협동하여 만들어 내는 제3의 어떤 것이어야 한다. 언어와 만나기 직전까지는, 자신이 무엇을 쓰게 될 지 작가 자신도 미처 모르는 글쓰기, 혹은 "내가 이런 글을 쓰다니!" 하고 스스로 놀라는 글쓰기가 진짜 글쓰기다. pp21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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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과 문장을 잇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앞 문장에 의해 떠올릴 법한 가장 자연스러운 연상 내용이자 동시에 앞 문장으로는 독자들이 미처 떠올리지 못한 뜻밖의 내용을 잇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엉뚱한 내용이 뒤죽박죽 이어지는 문장은 곤란하다. 그러나 너무 뻔한 내용으로 이어진 문장도 지루하다. p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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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구 제일 좋은 문장 -> 단락 -> 단락장 -> 장르 규칙을 만들 줄 알아야 비로소 제일 좋은 글쓰기가 가능해진다.
1) 우선 좋은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 좋은 문장을 만들려면, 부정확한 일상언어를 벗어나야 하고, 비개연적인 주관성이나 관념성을 탈피해야 하고, 잡념과 통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언어 습관에서 벗어나려면, 일상생활에서부터 잡담과 수다를 최대한 끊어야 한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조차 줄여야 한다. 양질의 독서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좋은 책을 찾아 읽는 시간을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삼음으로써, 일상언어가 아니라 출판언어를 자신의 중심 언어로 삼아야 한다. 독서를 해야 다양한 문장 변용에 익숙해진다. (...)
2) 좋은 단락을 만들어야 한다. 하나의 단락은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이루어지는데, '주제문 + 3개 이상의 뒷받침 문장'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해 단락을 만들 줄 안다는 것은, 나름의 일관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스스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구체적인 일례나 예증을 풍부하게 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3) 좋은 단락장을 만들어야 한다. 단락장은 여러 개의 단락으로 구성되고 각각의 단락은 또 여러 개의 소주제문과 뒷받침문장으로 구축된다. 따라서 단락장 만들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자기만의 개성적이면서도 일관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자, 복합적으로 사유할 줄 안다는 뜻이자, 그만큼 풍요롭게 사유하고 상상할 줄 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도 공감할 만큼 표현할 줄도 안다는 것이다. 단락장을 만들 줄 알면 비로소 생활글과 에세이, 엽편소설 등과 같은 짧지만 하나의 독립된 작품을 발표할 수 있다. pp277-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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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매우 기이한 행위다. 글쓰기를 욕망한다는 것은 다만 한 사람의 독자에서 한 사람의 저자로 변하고자 하는 것인데,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의 욕망은 마이크 건네받듯 간단하게 이루어지지가 않는다. 자신의 생활 스타일 혹은 자신의 정체성까지 모두 변하는 과정을 통해서야 만들어진다.
일테면 이제는 문장으로만 발언해야 하기 때문에 독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싶을수록 고립과 칩거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 더 깊은 침묵 속에서 가장 가치 있고 밀도 높은 문장을 끌어내야 한다. 이제는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삶의 순간순간들을 대충대충 넘어갈 수도 없다. 보다 정확하게 날카롭게 그러면서도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보다 강렬하고 특별하고 극적이고 궁극적인 체험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야 한다.
이와 같은 욕망은 기존의 해석과 가치를 전복시킨다. 일테면 글쓰기 욕망이 있기 전까지는 그저 무사하기만을 바라고 나쁜 일이 생기지 않고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란다. 그런데 글쓰기를 욕망하면, 이러한 바람이 아주 없어지지는 않지만, 때로 무사하지 못하더라도 차라리 좋은 글감과 마주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위험을 무릅쓰기를 각오하게 되고,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그것이 글감만 된다면 또한 반가운 상태로 변한다.
이전까지는 피하고만 싶던 고통조차, 이제는 자신이 그것을 기록하고 표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처럼 여겨진다. 궁핍한 가난, 누추한 자취 생활, 상대하고 싶지 않은 편벽한 인간들을, 그러나 이제는 기록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그들을 정확하게 살려낼수록 오히려 자신의 개성도 살아나는 기이한 관계가 된다.
그런가 하면 고통스럽지만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에 몰두해야 하기 때문에 고통 자체와는 늘 일정하게 분리된다. 삶의 현장에 가장 깊이 있으면서 동시에 삶의 현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자가 된다. 삶의 이중국적자로 떠돌 수밖에 없다.
하나는 현실의 세계, 또 하나는 언어의 세계, 마치 명상가가 망상에 빠져 있는 자기 모습을 관찰하듯이, 글쓰기 욕망은 지금 이 순간이 전부이자, 그러나 이 순간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동시에, 그럼에도 이 순간이 전부인 듯이 경험한다. pp28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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