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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애송시와 음악

[내 마음이 지옥일 때/이명수]에서 발췌한 시 몇 편

by 릴라~ 2018.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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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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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 이시영


새끼 새 한 마리가 우듬지 끝에서 재주를 넘다가

그만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먼 길을 가던 엄마 새가 온 하늘을 가르며

쏜살같이 급강하한다


세계가 적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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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도종환


세상의 문이 다 나를 향해 열려 있는 것 같지만

막상 열어보면 닫혀 있는 문이 참 많다

방문과 대문만 그런 게 아니다

자주 만나면서도 외면하며 지나가는 얼굴들

소리 없이 내 이름을 밀어내는 이데올로그들

편견으로 가득한 완고한 집들이 그러하다

등뒤에다 야유와 멸시의 언어를

소금처럼 뿌리는 이도 있다

그들의 문을 열 만능 열쇠가 내게는 없다

이 세상 많은 이들처럼 나도

그저 평범한 몇 개의 열쇠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두드리는 일을 멈추진 않을 것이다

사는 동안 내내 열리지 않던 문이

나를 향해 열리는 날처럼 기쁜 날이 

어디 있겠는가 문이 천천히 열리는

그 작은 삐걱임과 빛의 양이 점점 많아지는 소리

희망의 소리도 그와 같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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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달라졌다/ 천양희


웃음과 울음이 같은 音이란 걸 어둠과 빛이

다른 色이 아니란 걸 알고 난 뒤

色이 달라졌다


빛이란 이따금 어둠을 지불해야 쐴 수 있다는 생각


웃음의 절정이 울음이란 걸 어둠의 맨 끝이

빛이란 걸 알고 난 뒤

내 독창이 달라졌다


웃음이란 이따금 울음을 지불해야 터질 수 있다는 생각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별처럼

나는 골똘해졌네


어둠이 얼마나 첩첩인지 빛이 얼마나

겹겹인지 웃음이 얼마나 겹겹인지 울음이

얼마나 첩첩인지 모든 그림자인지


나는 그림자를 좋아한 탓에

이 세상도 덩달아 좋아졌다


##


우리말사랑4/ 서정홍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 죽으면

사망했다 하고

넉넉하고 잘 배운 사람들 죽으면 

타계했다

별세했다

운명을 달리했다 하고

높은 사람 죽으면

서거했다

붕어했다

승하했다 한다.


죽었으면 죽은 거지

죽었다는 말도

이렇게 달리 쓴다, 우리는


나이 어린 사람이면 죽었다

나이 든 사람이면 돌아가셨다

이러면 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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