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그리다 파밀리아(성가정 성당)"는 경이로웠다. 바르셀로나에서 마주한 가우디의 작품들, 구엘공원, 구엘저택, 까사 바트요, 까사 밀라 등이 그의 독창적인 건축 세계의 면면을 보여준다면, 사그리다 파밀리아는 이 모든 것을 집대성한 걸작이었다.
19~20세기는 종교가 저물어가는 시대다. '대성당'을 짓는 시대가 전혀 아닌 것이다. 그런 시기에 사그리다 파밀리아 같은 중세적인 기획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가우디라는 걸출한 천재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 결과 사그리다 파밀리아는 단지 구시대의 재현에 머물지 않는다. 생의 아름다움, 예술적 열망, 신에 대한 경외심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 건축물은 바르셀로나의 상징을 넘어 인간 정신의 탁월한 표현으로 자리잡았다. 우리나라 몇몇 대형 교회나 성당 건물이 그저 자본의 천박함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사그리다 파밀리아는 존경스럽다.
유럽에는 규모 면에서건 예술적 가치 면에서건 대단한 성당들이 많다. 그럼에도 사그리다 파밀리아는 내가 본 성당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바로크의 화려한 스타일 대신에 몬세라트 산에서 영감을 얻어 거대한 원통형 첨탑을 세운 가우디의 현대적 미감이 내 감수성에 더 맞아서이기도 했고, 성서 이야기 전체를 조각한 성당 전면의 파사드도 고전적이면서 놀랄 만큼 기품 있고 세련되었다. 조각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 표정이 생생하다. 성당 후면의 파사드는 가우디의 제자, 수빌라치의 작품인데 가우디와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지만 전체적으로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더 큰 경이로움이 기다린다. 나는 가우디가 성당 내부에 숲과 자연과 정글을 새겨넣을 줄은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늦은 오후라 마침 서쪽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성당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성당 내부는 마치 숲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보듯이 자연의 빛으로 가득찼다. 성당 기둥은 고목으로 형상화했고 갖가지 과일과 나뭇잎사귀, 꽃 조각이 주위를 메우고 있었다. 깊은 숲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전통적인 스테인드글라스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변용할 줄이야! 성당 안은 '이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가우디의 감동과 예찬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그건 생명의 환희, 바로 자연에 대한 사랑이다.
2.
가우디가 태어난 곳은 까탈루냐의 작은 시골 마을인 타라고나 주의 레우스라고 불리는 곳이다. 언제나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이 넘쳐나는 지역이라 한다. 어린 시절 병약했던 가우디는 학교에 가지 않고 주변의 숲과 강에서 혼자 논 적이 많았다. 까딸루냐의 자연에 대한 가우디의 깊은 애정은 그 시절부터 싹튼 것으로 보인다. 또한 레우스 근처에는 로마 시대 유적을 비롯하여 중세 건축의 잔재가 흩어져 있어 가우디에게 상상력과 영감을 불어넣었다. 대장장이의 아들로 아버지의 대장간에서 경험한 기술은 가우디가 재료를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창조적인 건축가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독창성이란 자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자연은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책과 같다."
가우디는 자연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단순히 장식적인 요소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자연의 외양에만 매혹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구조와 형상이 굉장히 기능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실은 자연이 항상 기능적인 해결책을 찾아온 결과라는 것을 꿰뚫어본 것이다. 나무 줄기나 인간의 뼈, 산과 언덕, 벌집 등에는 자연이 선택한 감탄할 만한 구조와 곡선이 무궁무진하게 숨어 있고, 가우디는 이러한 자연의 구조와 형태 모두를 건축에 적용하고자 했다. 그 결과 '어떤 양식으로도 분류하기 힘든' 가우디만의 건축 양식이 탄생한다.
가우디 건축을 형성한 중요한 원동력으로 까딸루냐 정신도 빼놓을 수 없다. 가우디는 언제나 까딸루냐인임을 자랑스러워했고 건축을 통해 까딸루냐 정신을 표현하고자 했다. 당시 스페인 정부는 공식적인 까딸루냐어 교육을 금지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까딸루냐의 언어와 문화를 되살리려는 문예부흥운동, 레나센샤 운동이 일어난다. 이 운동을 통해 되찾으려는 까딸루냐 고유의 정체성에서 종교는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고향 까딸루냐의 대자연과 건축 유적에 깊은 애정을 지녔던 가우디는 레나센샤 운동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까딸루냐의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정체성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고향 까딸루냐에 대한 깊은 사랑은 자연과 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사그리다 파밀리아는 까딸루냐의 독창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3.
가우디는 생애 마지막 십 년 동안 사그리다 파밀리아 안에 숙소를 마련하고는 오직 성당 건축에만 몰두한다. 그리고 날마다 고딕지구 안에 있는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고딕지구와 사그리다 파밀리아까지는 거리가 좀 있기에 가우디의 신앙심을 짐작할 만하다. 사그리다 파밀리아에 몰두하는 동안 날마다 그 길을 오가며 수도승처럼 살던 가우디는 그 길에서 전차에 치는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사고 당시 그의 누추한 모습에 아무도 가우디인 줄 알아보지 못했고 택시 승차 거부를 당하다가 빈민 병원에 실려간 일화는 유명하다.
성당 지하에 가우디의 무덤이 있었다. 따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하는데 일일투어 시간이 다 되어 보지 못했다. 구엘공원을 관람할 때 그 옆에 있던 가우디의 집(지금은 기념관)은 잠깐 들렀다. 생전 그가 사용한 작고 소박한 침대 옆에 커다란 십자고상이 걸려 있다.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형이 그가 젊을 때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더욱 신앙에 의지했다고 한다. 이 집에서 가우디의 아버지가 생을 마쳤다.
사그리다 파밀리아는 대성당의 예술적 아름다움을 넘어서 가우디가 평생 추구했던 자연에 대한 사랑, 신적인 경이로움을 찬란하게 펼쳐놓기에 더욱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자기를 초월하고 시대를 초월하는 어떤 영감으로 우리 마음에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새겨주었다.
사그리다 파밀리아를 떠나면서 까딸루냐의 정신을 부활시키려는 그의 바람은 실현되었다고 생각했다. 바르셀로나는 영원히 가우디의 도시일 것이기에. 모든 위대한 예술은 자기가 태어난 땅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것, 그것이 사그리다 파밀리아가 준 메시지였다.
*2018/1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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