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책 참 좋다.
편안하고 일상적인 이야기 속에
번득이는 사유를 녹여넣은 책.
학창 시절에 배운, 경수필 아닌 중수필의 좋은 예이다.
처세와 관련된 인생관이 아니라
독창적 사유가 담겨 있는 책.
일본 저자들이 이런 책을 꽤 쓰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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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수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해당했다. 내가 갔을 때는 소각로 주변을 조금만 파도 사람 뼈가 드러났다. 정말이다. 해가 저물어 어두워질 무렵 숲 속을 거닐고 있자니 작은 독일어 간판이 있었다. '여기에서 나치스는 유대인 지방으로 비누를 만들었다'라는 뜻이 아닐까라고 겨우 독해하고 건너편을 보니 커다란 둥근 수조가 있다. 그 분위기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발가벗은 '죽음'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고나 할가.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오컬트를 믿지 않지만, 지박령(떠도는 혼귀)이라는 말을 쓰고 싶어졌다. 평생 잊기 힘든 경험이었고, 그 후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거기에서의 체험이 '표면을 접한' 것 이상의 특별한 경험이었느냐면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지구를 걷는 법'을 한 손에 들고 크라쿠프에서 출발한 버스로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평범한 관광객이었을 뿐이다. 특별한 가이드를 고용하지도 현지 주민과 교류하지도 않았다. 몇 시간 동안 아우슈비츠에 머물며 말 그대로 '표면을 접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슈비츠에 관한 책을 몇 십 권 읽은 것보다 강렬한 경험이었다. pp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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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기술 혁명으로 정보 접근성은 극적으로 높아졌다. 그러나 검색 엔진에 입력할 언어를 얻기 위해서는 방에 처박혀 인터넷만 할 게 아니라 신체를 이동해야 한다. 이 역설이 이 책의 주제다.
이를 좀더 추상적으로 논하면 '말'과 '사물'의 관계가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의 저서에 '말과 사물'이 있듯이 한마디로 인간의 현실은 말과 사물로 이루어져 있다.
사물의 세계가 더 중요하다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란 직접 여러 현실을 보고, 다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이에 반해 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의 현실은 모두 언어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그 외부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 또한 결국 말이다" 라는 사고방식이다.
세상에는 사물지상주의자가 많을 것이나, 20세기 현대사상은 오히려 후자의 언어지상주의자가 중심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인터넷 이용자와도 비슷한 세계관이다. 모든 것은 정보다. 모든 것은 말이다. 현실 따위 필요 없다. 이런 입장이다.
그러나 나는 말이 중요하다는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전제하면서도 한 바퀴 더 돌아, 말의 세계가 원활하게 굴러가기 위해서는 사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왜 사물이 필요한가? 메타 게임을 멈추기 위해서이다. pp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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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를 구속한다면 화들짝 놀라겠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렇다. 예를 들어 우리는 체르노빌에 갔다. 거기까지 가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일본에서 우크라이나까지 가는 직행편은 없다. 겨우 키예프에 도착해도 체르노빌까지 두 시간가량 걸린다. 하지만 이동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여정에서 사람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여행의 본질은 다름 아닌 이 '이동 시간'에 있다. 만약 이번 체르노빌 투어를 가상현실로 체험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집에서 체르노빌을 둘러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노동자는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사고의 상흔은 어떻게 남아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체르노빌 원전 사진은 인터넷에 얼마든지 있다. 박물관 내부 사진도 있다. 구글 스트리트뷰도 있다. 현지에 가봤자 사진과 똑같은 풍경이 있을 뿐이다. 가상현실로도 정보는 충분히 얻을 수 있다.
그래도 무언가가 다르다. 다른 것은 정보가 아니라 시간이다. 가상현실로 취재한다면 '이 정도면 됐어'하고 브라우저를 닫으면 곧바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즉, 그 순간 생각을 멈추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쉽게 키예프에서 일본으로 되돌아올 수 없다. 이동 시간 동안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빈 시간 동안 체르노빌의 정보가 가슴에 스며들어 새로운 말로 검색해야겠다는 욕망이 싹튼다. 가상현실에서 정보를 수집해 곧바로 일상으로 되돌아온다면 새로운 욕망이 생길 겨를이 없다.
신체를 일정 시간 동안 비일상 속에 '구속'하는 것, 그리고 새로운 욕망이 싹트는 것을 천천히 기다리는 것. 여행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목적지에 있는 '정보는'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투어리즘'의 어원은 종교의 성지 순례(투어)다. 순례자는 목적지에 무엇이 있는지 사전에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시간을 들여 목적지를 오가는 여정에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사유를 심화할 수 있다. '관광=순례'는 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정보를 만날 필요는 없다. 만나야 할 대상은 새로운 욕망이니까.
이제 정보 자체는 희소재가 아니다. 사진이나 기록 영상으로 전세계 대부분의 장소를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행을 한다. 그 '알고 있는 정보'에 감정의 태그를 붙이기 위해서다. '이제 해외여행은 필요 없어, 구글 스트리트 뷰로 사진만 봐도 충분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를 놓치고 있다.
정보는 얼마든지 복제할 수 있지만 시간을 복제할 수 없다. 욕망도 복제할 수 없다. 정보를 무한히 축적할 수 있고, 세계 어디에서든 접속할 수 있는 지금, 복제 불가능한 것은 여행밖에 없다. pp8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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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은 기호로 구성된 세계다. 글자만의 얘기가 아니다. 음성과 영상도 마찬가지로, 결국 인터넷은 인간이 만든 기호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터넷에는 누군가가 올려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만 있다. '표상 불가능한 것'은 거기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인터넷은 무의미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말로 할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런저런 불만이 있지만 우리는 인터넷과 언어에 의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말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평소와는 다른 검색어로 검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분투할 때 그 말은 원래 의도와 조금 다른 방법으로 전달된다. 철학적 표현을 쓰자면 '배달 오류'가 일어난다. 우리는 이 배달 오류를 통해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더라도,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 만큼은 알게 된다. 한마디로 기호를 다루더라도 기호가 되지 않는 무엇이 세계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외경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검색어를 찾는 여행이란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검색 결과를 풍요롭게 하는 여행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배낭여행이 아닌 관광으로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전 세계가 관광지가 되어가는 바로 지금, 여기저기에 있는 '비경'으로 향해야 한다. pp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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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억은 그다지 믿을 것이 못된다. 이언 해킹이라는 과학철학자이자 분석철학자의 '기억을 덮어쓴다'라는 책이 있다. 1980년대 미국에서 다중인격장애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진단 매뉴얼에 다중인격이 등록되었고 이를 계기로 증가한 것이다. 다중인격의 원인은 학대나 성폭력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한때 미국에서는 수백 명의 한 명꼴로 어린 시절에 학대를 받았다는 말이 된다. 비현실적인 얘기였다.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의사기억증후군'이라는 새로운 말이 생겼다. 어린 시절에 학대를 받았다며 아이에게 고소당한 아버지들이 반대로 '아이들은 의사나 상담가에게 속고 있다'고 맞고소를 하는, 진흙탕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그야말로 메타게임이다.
이처럼 증언은 불안정하다. 트라우마 또한 그것이 언어의 기억인 이상 절대시할 수 없다. 증언은 절대적이지 않다. 기억은 얼마든지 바뀐다. 피해자의 기억은 거짓이라고 가해자가 주장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물이 중요하다. 신체의 흔적은 메타게임을 끝내는 힘을 갖고 있다. 흉터나 화상 자국, 강간의 흔적 등이 남아 있다면 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 된다. 거꾸로 말해 그런 흔적이 없으면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pp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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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기억의 계승'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억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기억의 변경에 저항하는 '사물'을 남기는 것이다. (...)
그래서 사물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체르노빌의 경우, 원전이 아직 남아 있고 많은 사람이 그 내부를 견학할 수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같은 사물을 보면서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어도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어도 된다. 이야기가 각양각색이고 조정이 불간으해도 궁극적으로 현장을 방문할 수 있으면 각자가 '자신의 체르노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록이 서류로만 남아 있다면 그런 조정의 가능성을 잃고 만다.
우리는 검색을 구사해 수많은 정보 속에서 한없이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와 현실의 관계를 자각해야 한다. 정보로만 구성된 세계에서 살다보면 난립하는 이야기 속에서 현실을 잃고 만다. 새로운 사물에 접하고 새로운 검색어를 손에 넣어 언어 환경을 쉼 없이 갱신해야 한다. pp10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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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다르다. 그는 원래 인간은 고립되어 살아야 하지만 타인의 고통 앞에서 '연민'을 느끼기 때문에 집단을 이루고 사회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사회계약의 근거는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라 동물적인 감정에 있다고 말한다. 매우 독창적이고 유효 범위가 넓은 사상이 아닐 수 없다.
'물리적인 실재'의 힘을 재평가하자는 것은 이 '연민'의 중요성을 재고하자는 것이기도 하다. 루소가 말하는 '연민'은 인권이나 정의 같은 이념과는 관계 없다. 오히려 매우 동물적이고 반사적이다. 눈앞에서 사람이 피를 흘리고 있다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내밀게 되는 것처럼 매우 일상적인 감각이다.
루소의 이러한 생각은 철학적으로 볼 때 지극히 소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박함이 장점이다. 무엇이 인권인가, 무엇이 정의인가에 대해서는 무한에 가까운 해석과 논쟁이 따른다. 그 논쟁을 말로 멈추게 할 수는 없다. 현대사상에서는 이러한 '무한한 해석 논쟁'이야말로 정의의 조건이라는 곡예적인 주장도 있지만(앞에서 언급한 데리다가 여기에 가깝다),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닐까?
하지만 루소의 '연민'은 전혀 언어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정의란 무엇인가, 인권이란 무엇인가 등의 해석 논쟁을 단호히 끝내고 눈앞의 불의에 대응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현대 철학자 중에서는 미국의 리처드 로티가 유사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는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연대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는 이념의 공유가 아니라 '당신도 힘이 듭니까'라는 상상력에 바탕을 둔 물음이라고 말한다. pp10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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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인간은 원래 고독하게 살아야 하고 사회 따위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는 이유는 연민을 느끼기 때문이다. 성욕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눈앞에서 사람이 피를 흘리고 있으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내밀고, 눈앞의 이성이 유혹하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동침하고 마는, 그런 약한 생물이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게 할 수도 있다.
인간은 약하다. 욕망을 조절하지 못한다. 때로는 어리석은 행동도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이런 어리석은 가능성에 몸을 노출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pp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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