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명절은 전날 잠을 설칠 만큼 설레는 날이었다. 딱히 특별한 일도 없는데 요즘처럼 갈 데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사촌들과 논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대되는 날이었던 것 같다. 다 자라서 명절은 그저 휴일이었다. 사촌언니들이 결혼해서 하나둘 떠나면서 명절은 점점 재미없어졌고 서른 넘어서는 아예 큰집에 가지 않고 여행을 떠났다.
병원 신세 한번 안 지셨던 아빠가 남미여행을 준비하시던 중 갑작스러운 암 선고로 투병 7개월만에 하늘로 가신 직후에 명절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날이 되었다. 가족 모두 우리 아빠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대체 명절은 누가 만들었나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다들 힘들어했다. 제사 준비의 번거로움이 문제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야 하는 현실이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명절은 마치 확인사살처럼 아빠의 부재를 가족들에게 다시금 각인시키는 날이었다.
상 차릴 때마다 한 명이 울면 다들 따라 울면서 슬퍼서 제사 못 지내겠다고 고민하던 우리 가족은 만 삼년만 지내고 이후엔 성당 합동위령미사로 대신하기로 했다. 올해가 만 삼년을 넘긴 첫 명절이다. 시간이 약이라고 모처럼 잔잔하게 밝은 명절을 보냈다. 슬픔이란 건 시간이 흐른다고 사라지거나 줄어드는 건 아니다. 가슴속 슬픔의 크기는 여전히 같다. 다만 우리가 그 슬픔에 덜 파묻힐 뿐이다.
가까운 식구의 죽음은 삶에 대한 관점을 바꿔놓는다. 예전엔 조선시대 삼년상을 보고 저게 무슨 미친 짓인가, 산 자에 대한 폭력이다 했는데, 막상 겪고나니 슬퍼할 시간을 삼년을 가지는구나 싶었고, 부모상 후 일주일만에 직장에 복귀해야 하는 게 더한 폭력으로 느껴졌다. 일주일만에 일상으로 돌아가야하는 현실이 더욱 이상했다.
이번 연휴 때 우연히 생로병사의 비밀을 보았는데 죽음을 지켜보면 삶의 소중함을 절감한다는 호스피스 봉사자들의 말을 들었다.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시간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에 앞서 극심한 후회, 일상에서 문득문득 마주치는 누군가의 빈자리로 인한 허전함(쓰레기봉투를 평소 아빠가 버렸기 때문에 봉투를 버릴 때마다 생각났다), 우울과 삶에 대한 무상한 감정이 파도처럼 먼저 밀려온다. 이것은 결코 혼자서 극복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누군가의 어깨가 필요하다. 사람에겐 사람이 필요하다. 서로 경험이 다르기에 공감에는 한계가 있지만 어깨를 빌려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사람 때문에 우리는 부조리 속에서도 다시 길을 간다.
15년 전, 추석 연휴 때는 가족끼리 금강산에 놀러갔다. 젊음과 희망이 충만한 시기였다. 직장생활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개인적 삶에도 우리 사회에도 밝은 기대가 있었고, 통일도 곧 실현될 것만 같았다. 우리 삶도, 남북관계도 먼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여정이란 걸 이제 안다. 섣부른 기대도 못하겠다. 하지만 냉소를 움켜쥐고 여행하고 싶지는 않다. 휘어지고 굽어진 길모퉁이 어느 언저리에서건 사랑을 잊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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