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책을 보내주는 지인이 있습니다. 올 겨울에 받은 책은 잘 알려진 고전, <꽃들에게 희망을> 리커버판입니다. 짧은 우화 속에 인간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삶의 위대한 가능성을 동시에 새겨넣은, 고전 중의 고전이죠.
이야기속엔 줄무늬, 노랑이, 이렇게 두 마리 애벌레가 등장합니다. 줄무늬 애벌레가 세상에 태어나 목격한 모습은 이렇습니다. 다른 애벌레들이 모두 줄을 지어 어딘가로 가고 있습니다. 한 방향으로 끝없이 이어진 애벌레들의 행렬, 그 행렬 끝에는 놀랍게도 거대한 애벌레 기둥이 있습니다. 애벌레들이 높은 데로 올라가려고 서로의 몸을 밟고 밟으며 만들어낸 기둥이죠. 기둥 위엔 뭐가 있는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줄무늬는 호기심에 기둥에 뛰어들지만 거기서 노랑 애벌레를 만납니다. 차마 노랑이를 밟고 올라서지 못해 둘은 올라가는 걸 포기하고 함께 땅으로 내려오죠. 그리고 한동안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삶엔 이렇게 땅바닥에서 뒹구는 것 이상의 뭔가가 있으리라는 갈망이 줄무늬를 떠나지 않습니다. 다시는 애벌레기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노랑이와 달리 줄무늬는 그 기둥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결국 줄무늬 혼자 기둥으로 떠나고 천신만고 끝에 기둥 꼭대기에 도달합니다. 그런 줄무늬 앞에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집니다. 기둥 꼭대기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기둥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습니다. 꼭대기에 오르니 그 기둥과 똑같은 수많은 애벌레 기둥이 보입니다. 정말 허무하고 허탈한 장면이죠.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도 이 장면에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경쟁의 비정함과 그 끝에 아무 것도 없을 수도 있다는 인식을 이 짧은 동화처럼 분명한 이미지로 각인시켜주는 이야기는 없을 거예요. 작품의 철학적 두께를 다 이해할 수는 없는 나이였지만 이 작품이 우리 사회를 빗대고 있다는 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저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다가는 그 끝에서 허무를 만날 수도 있으며,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각자 자기만의 길을 가야한다는 깨달음을 전해준 작품입니다.
줄무늬가 떠난 뒤에 노랑이는 나비가 되기 위해 고치를 만드는 늙은 애벌레를 만나죠. 그리고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노랑이는 용기를 내어 고치를 만들고 고독의 시간을 거쳐 나비가 되죠. 그는 훨훨 날아 애벌레 기둥 속 줄무늬를 찾아갑니다. 꼭대기에 아무 것도 없음을 확인한 줄무늬는 노란 나비를 보고 비로소 깨닫습니다. 꼭대기엔 기어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날아가야한다는 것을. 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노랑이를 보고 자기 안에서 처음 발견한 것이죠. 서로를 밟으며 독하게 살아남아 위로 올라가려는 애벌레 기둥의 그 수많은 애벌레들도 나비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줄무늬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줄무늬는 기둥을 내려와 내면의 소리를 따릅니다. 나비가 된 노랑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고치를 만들어 긴 인내 끝에 나비가 되고,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수많은 애벌레 기둥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다들 고치를 만들고 이 세상에 나비가 가득한 것이 마지막 장면입니다. 그래서 “꽃들에게 희망을”이죠.
“일단 나비가 되면 너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어.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사랑 말이지. 그런 사랑은 서로 껴안는 게 고작인 애벌레들의 사랑보다 훨씬 좋은 것이란다.”
“너는 나비가 될 수 있어. 우리는 모두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비가 된다는 것은 서로를 밀치며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끝없이 경쟁하는 애벌레의 기둥에서 탈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비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노랑이가 그랬던 것처럼 줄무늬 애벌레에게 나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줄무늬가 스스로 만든 고치 옆에서 그가 나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랑이죠. 너도 날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깨닫게 해주는 사랑. 그 덕분에 이 세상의 꽃들이 피어나는 사랑. 작가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그 사랑에는 애벌레의 삶을 떠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애벌레의 삶에서 나비의 삶으로의 도약. 지금 이 나이에 다시 읽어도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야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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