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게 조금씩 역사 공부를 하며 든 생각이 있다. "이게 나라냐" 내 의구심과 한탄의 대상은 대개 조선 왕조다. 아니, 그렇게 예를 중시한다고 하면서 남의 나라(청나라) 황제 생일날에 참석해서 절 안 하고 버티는 건 대체 무슨 예의란 말인가. 명나라는 청과의 전쟁도 불사할 만큼 지고지순으로 섬기면서 청은 왜 오랑캐라고 멸시하는가. 사실 만주족의 뿌리는 고구려와 닿아 있어서 청나라는 고구려의 후예라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닌데 말이다. 그래놓고는 오랫동안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일본은 왜 또 그렇게 갑작스럽게 섬기면서 나라를 갖다 바치나. 도무지 논리적 일관성이 있어야 말이지. 힘 센 놈을 다 섬기는 것도 아니고.
이런 내 의구심을 해소해준 책이 있다. 외교관 출신의 저자가 쓴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 도서관에서 처음 봤을 때는 제목도 표지도 약간 촌스러운 느낌이어서 걍 지나칠까 했는데 목차가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분량도 얇고 내용도 알차고 속도감 있게 내용이 전개되어서 금새 다 읽었다. 장점이 굉장히 많은 책이다. 그저 역사적 사실을 열거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사실들을 관통하면서 조선왕조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있다. ‘중화사대주의'를 공식적으로 표방한 우리나라 최초의 왕조이다. 그로부터 온갖 폐단이 쏟아져나온다.
고려왕조는 세계 최강의 원나라와 오래 맞서 싸웠을 뿐 아니라 전쟁에 져서도 '부마의 나라'로 인정받았다. 조선처럼 신하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리고 비록 힘이 없어 요동 땅을 되찾아오지는 못했으나 그 땅이 언젠가는 회복해야 할 우리땅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원의 세력이 약해진 공민왕 대에 영토 회복을 진행했던 것이다. 거기에 찬물을 끼얹은 이가 이성계다. 정벌하라는 요동은 정벌하지 않고 위화도 회군을 해서, 우리 역사를 이 반도에 가둬온 장본인이다.
그리고 왕조 교체의 명분을 위해 명나라에 자진해서 제후국으로 들어간다. 저자 말대로 당시는 명이 발호하는 시기라 힘을 좀 견주어 본 뒤에 적절한 관계를 맺었어도 되는데, 알아서 기어들어간 것. '조선'이라는 국호도 명이 지어준 것이다. 나라 이름도 스스로 짓지 못하고 명에 지어달라고 한 게 조선이다. 조선왕조의 가장 큰 문제는 삼면이 바다면서 '해금정책'을 써서 고려 때만 해도 왕성했던 무역을 중단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저자가 말했듯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종이라고 생각한다. 병역의 의무를 양반이 지지 않고 상민도 돈을 내면 빠져나갈 수 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될 턱이 있나. 국가가 주는 것은 없고 빼앗아가는 것만 있다. 예를 숭상한다는 것도 이해 안 간다. 그 많은 사화와 당쟁을 보면 그 어디에 '의리'가 있는가. 백성을 위한 의리는 물론 국가를 위한 의리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순신 장군 정도 말고 어디 선비다운 선비가 있는가.
이 책을 다 읽고 생각한 점은, 학교 다닐 때는 조선이 고려보다 진보한 것처럼 배웠지만 실상은 다르다는 점이다. 조선은 많은 면에서 중세적 퇴행을 일삼았다고 생각한다. 성리학을 글자 그대로 받드는 것도 중세적이고. 서양만 해도 고대 로마 시대보다 중세 때 훨씬 퇴보한 삶을 살았다. 조선도 마찬가지. 독자적으로 외교를 안 하고 중화세계의 의존하다보니 스스로 세계와 대응할 능력을 잃었다. 외교권이 없다보니, 일본 입장에서는 청나라 밑에 있던 나라를 우리가 접수해서 근대화시켰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 입장에선 펄펄 뛸 일이다. 한반도의 엄청난 자원과 인력이 약탈되고, 전쟁 동원으로 온나라가 고통받았을 뿐 아니라, 이후 분단과 내전(6.25)으로 인한 인명 살상과 고통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니까 말이다. 식민지를 겪은 대부분의 나라는 식민지가 초래한 민족 분열로 이후 식민지보다 더 끔찍한 내전을 겪게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자발적으로 명나라 밑에 들어갔는데 조선은 운이 좋아서 외세의 침입이 많이 없었다(조선 시대는 첫 이백년간 전쟁이 없었다). 그래서 외부에는 그렇게 허약한 체제였지만 안으로는 매우 오랫동안, 더할나위 없이 효율적으로 백성을 억압했다. 1894년 동학군의 요구 조건 중에 '과부의 재가를 허락해달라'가 있었다. 전세계 어디에 19세기에 과부가 재가를 못하는 나라가 있던가. 이슬람권보다 훨씬 심각한 형편이었다.
조선은 어디를 보든 극복의 대상이다. 천 년 만 년에 한 명 태어날까 말까 한 천재, 인류의 천재인 '세종대왕'이 계셔서 그나마 용서해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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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농공상에 따른 직업서열화가 초래한 폐해 사례를 살펴보자.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의 도공들은 일본으로 잡혀가기도 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 이 도공들은 고향에 찾아와서 동료 도공들을 설득해 일본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일본의 지방 영주들은 조선 도공들을 예우해 사무라이에 준하는 지위를 부여하고 풍족한 생활을 허락해 조선과 대비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낮은 사회적 지위와 양반계급의 착취에 허덕이던 조선 도공들에게 일본은 신세계였고 기회의 땅이었던 것이다.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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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건국이념은 조선의 불행한 운명을 예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암담한 일은 명분과 예절을 중시하는 성리학을 방법론으로 채택한 것이다. 조선의 핵심 이념으로 성리학을 채택한 것은 불행한 운명을 타개할 기회조차 원천봉쇄했다. 명분과 예절을 중시하는 것은 외부로부터 아무런 도전이 없는 정체된 폐쇄사회를 유지하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안정적인 통치철학일 수 있다. 하지만 외부로부터의 도전이 끊이지 않는 역동적인 개방사회에는 맞지 않는다. 조선의 개국공신들은 스스로 중화세계의 변방 제후국이기를 자청했다. 중국이 건재할 때에는 조선을 정체된 폐쇄사회로 운용하는 것이 일정 기간 가능했지만, 중화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노도처럼 밀려드는 외세의 도전을 도무지 막을 수 없었다.
조선의 개국은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군부 쿠데타를 통해 지배계층을 교체한 정도의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새로운 지배계층이 현상 유지를 통한 권력의 영속화를 추구하다보니 예절과 명분을 중시하게 되었고, 든든한 뒷배로서 중국의 지지가 필요했기에 조선은 스스로 신하 되기를 청했던 것이다.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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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었던 점도 조선의 운명에 부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양반은 사실상 납세의 의무나 병역의 의무도 없이 특권만 누리는 계급이었다. 전쟁이 났을 때 지배층의 자녀들이 앞장서서 칼을 들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야 일반 백성들에게도 희생과 헌신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은 돈만 많으면 양민이더라도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대신 군대에 복무하게 할 수 있었고(대립제), 베를 사서 내고 군역을 면제받을 수도 있었따(방군수포제). 다시 말해서 돈이 있거나 소위 말하는 '빽'이 있으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는 나라였다.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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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었던 것은 조선의 주체세력에게 통치철학과 애국 애민정신이 부족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는 근거이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태생적 한계와 계속된 실정에도 불구하고 518년이라는 긴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 지위를 청하고 중국에 종속되어 중국의 공동운명체로서 존재했기 때문이다. 즉, 중화세계의 수명이 곧 조선의 수명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국가지배구조가 우수해서 오래 존속한 것은 아니다.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이 1911년에 일어났고 대한제국도 비슷한 시기인 1910년에 사라진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p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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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학자는 일본 문화의 특징을 '축소 지향의 문화'로 정의한 바 있다. 필자는 일본 문화재들의 규모, 예를 들어 구마모토성의 거대한 성곽을 보면서 일본이 '축소 지향의 문화'라는 주장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일본은 서양의 영향을 받은 '디테일 중시의 문화'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다.
일본이 문화적인 면에서 축소를 지향했다면, 조선은 국가 운영에서 축소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지배층의 철학과 행동양식은 조선을 '스스로 작아지려는 축소 지향의 국가' 또는 '스스로 난쟁이가 되고자 하는 국가'로 만들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요동과 만주 일대를 회복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서 권력을 얻었기 때문에 건국의 명분이 매우 약했다. 조선의 개국공신들은 고려가 병든 나라라고 비난하면서 이를 역성혁명의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세계적으로도 원나라에 굴복하지 않은 나라를 찾기 어렵고 고려는 공민왕 이래 요동정벌에 나서면서 자주정책을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난은 논리적으로 무리가 많았다.
조선은 자진해서 옛 강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 채 중화사대주의를 공식적으로 표방한 최초의 왕조이다. 게다가 나라의 이름까지 명나라가 정해달라고 사신을 보낼 정도로 저자세를 취한 왕조이기도 하다. 조선의 지배층은 군사쿠데타로 얻은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민족사를 개척하는 것보다 우선순위였을 것이다.
조선은 삼면이 바다이고 농지가 부족한 산악지형을 갖고 있는 해양국가임에도 해금정책을 채택함으로써 무역을 통한 번영의 여지를 스스로 봉쇄하고 가난과 기아에 허덕였다. 또한 폐광정책을 써서 비교적 풍부하게 매몰된 지하자원을 사장시켰다. 조선의 해금정책과 폐광정책은 이웃 일본에게 번영의 기회를 양보하는 결과를 초래해 미래의 호랑이를 키웠다.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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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주의의 또 다른 폐해는 명나라가 초기에 채택했다가 흐지부지된 해금정책을 그대로 베낀 뒤 조선 500년 내내 이 정책을 실행하는 엄청난 실책을 범한 것이다. (...)
정작 해금정책을 내세웠던 명나라는 환관 정화가 이끄는 대함대가 아프리카까지 항해할 정도로 해상력을 키워 조선의 완강한 해금정책이 잘못된 선택임을 보여주었다. 영락제 시대인 1405년에 시작되어 일곱 차례에 걸쳐 실시된 정화함대의 대항해는 길이가 100m가 넘고 폭이 50M에 이르는 큰 배를 통해 이루어졌고 1차 원정에 참여한 선원 수가 3만 명에 이를 정도로 웅장한 규모였다고 한다.
조선이 국제무역에 나서지 않자 일본이 반사이익을 얻었다. 대표적인 예가 후추무역이다. 일본은 후추를 동남아에서 수입해 조선에 비싸게 되팔았다. 얼마나 폭리를 취했는지 후추장사로 번 돈으로 조선에서 수입하는 인삼에 필요한 돈을 충당할 정도였다.
조선에 표류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직원 헨드릭 하멜은 네덜란드로 돌아간 후 조선과의 교역을 건의했으나 도쿠가와 막부가 조선과 직접 교역하면 나가사키에 있는 네덜란드 상관을 폐지하겠다고 위협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후추무역으로 얻는 이익을 잃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어쩌면 조선이 반도국가의 이점을 업고 국제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경계했을지도 모른다. p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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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벽란도를 중심으로 국제무역이 크게 발달해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출입했던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조선 개국세력이 해금정책을 펼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명나라 태도 홍무제 주원장이 중국 내 권력투쟁에서 반대세력이 해상세력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해금정책을 쓰자 조선도 얼른 해금정책을 채택했고 조선이 끝날 때까지 이 정책을 유지하는 무모함을 보였다. 해금정책에 더해 섬에서 거주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지하는 공도정책을 쓴 것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아마 외딴 섬에 숨어 왕위 찬탈을 위한 군사를 기를까 봐 근심이 많았던 것 같다.
해금정책과 공도정책은 국제무역이 활성화되어 장보고와 같은 유력한 해상세력이 등장할까 봐 경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잘 알다시피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막강한 수군세력을 거느렸고 중계무역과 통행료 징수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으며 신라왕실의 왕위 계승에 간여할 정도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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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일본군과 전투를 하는 와중에도 조정에 생필품을 보내는 눈물겨운 충절을 보였다. 그런데도 선조는 권력 앞에서 냉혹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왜군과 싸운 민족의 영웅들을 역적으로 대접하는 부도덕하고 반민족적인 왕조가 고금을 막론하고 이 세상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다.
백성을 버리고 야반에 한양을 빠져나간 임금의 피난길에 동행한 사람들은 국난극복 공신으로 책봉하면서 의병장들은 역적으로 몬 뻔번하고 몰상식한 행동은 조선 개국이 명분이 없는 파당적 행위였음을 대변한다. 명분이 없는 파당적 행위로 권력을 잡았으니 기득권 유지에 장애가 되는 세력 또는 장애가 될 가능성이 큰 새로운 세력이 나올 여지를 철저히 봉쇄해야 했다. 의병장을 박해한 결과는 병자호란과 구한말 외침에 항거해 일어나는 의병의 숫자를 격감시키는 결과를 초래해 조선의 명을 재촉했으니 자충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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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농본주의에 입각한 유교사회였던 조선은 광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16세기 초인 연산군 재위 시절에는 양인 김감불과 장례원, 노비 김검동에 의해 획기적인 은 제련기술인 연은분리법이 발명되었다. 1503년 5월 연산군 앞에서 기술을 시연했는데, 납과 섞여서 나오는 은광석에서 소나무재를 이용해 납을 먼저 제거하고 그 뒤에 은을 추출하는 기술로서 납과 은이 녹는 온도가 다른 점을 이용한 기술이었다. 일본인이 왕궁에 와서 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술 시연을 했다는 것은 이 기술에 대해 국가적 관심이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연은분리법은 정작 조선에서는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 실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는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이 사치풍조를 배격한다는 이유로 은광 개발을 억제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조선이 버린 이 세계 최고기술은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꽃을 피웠고 일본을 세계 1위의 은 생산국으로 만들었다. 일본은 막대한 은을 이용해 무역을 하고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연은분리법으로 생산된 은을 사용해서 조선을 침공하는 데 필요한 함선을 건조하고 무기를 만들었다. 조선이 버린 무기를 써서 조선을 친 것이다. p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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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와 관련해 일반 국민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인류 역사상 중요한 발명품의 하나라고 극찬한 복식부기가 서양보다 앞서서 고려시대에 창안되었고 조선시대에도 활발하게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서양에서 루카파치올리가 베니스 상인의 복식부기를 소개했던 시점보다 200년 이상 빠른 시기에 고려 개성 상인들 사이에서는 복식부기가 사용되었다. (...)
이처럼 조선은 초기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 수준의 상인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학적이지 못한 건국이념으로 인해 기술자와 상인을 천하게 여기게 되었고 형이상학적인 방법론 때문에 이들에게는 능력을 발전시킬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이들의 능력은 정체하거나 오히려 퇴보하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p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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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당은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개화당 주요 인사들은 요시다 쇼인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교유했다.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의 주창자였다. 따라서 그의 영향을 받은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의 개화당을 마음속으로 공감하고 적극 지원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실천한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주요 인사들이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조선 개화당 인사들은 번지수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곳에서 희망의 빛을 보고 도움을 청한 셈이다. 평소 중화사상에 함몰되어 있던 조선 지배층 사대부들은 일본 내부의 움직임에 너무 어두웠던 것이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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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초기까지만 해도 한 수 아래로 보았던 왜국에게 건국 5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정복되었다는 것은 조선 조정이 일본을 대상으로 한 정보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7세기 초부터 19세기 초까지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열두 차례 방문했지만 일본의 물질적 측면과 기술적 측면이 일취월장한 것은 보지 않고 윤리적 측면과 문화적 측면의 차이만 보았다. 동성연애, 남녀혼탕 등에는 관심을 보였지만 세계 최대 도시가 된 에도의 번영은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눈 뜬 장님이 되어 일본발 위기요인이 축적되는 것을 방치하다가 한일강제합병을 초래한 것이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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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자신이 청군 파병을 요청하지 않은 이상 청군이 자신의 반대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으로 왔다고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대원군에게 청군 군영은 적진이나 마찬가지였다. 청군의 파병을 요청한 명분이 임오군란이라는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청군 입장에서는 대원군을 반란군의 수괴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원군이 제 발로 청군 군영을 방문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경솔한 행보였다. 이것은 정보 수집과 분석을 경시하고 직관과 감에 입각해 의사결정을 하는 조선 사대부들의 공통된 약점을 보여주는 것이자, 사대주의에 절은 융통성 없는 사고방식(상국의 군대가 왔으니 예의를 갖춘다는 식)이 초래한 어이없는 결과였다. 오장경이 데려온 청군의 규모가 불과 3000명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사실 창피한 일이다. p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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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청국은 일본과 톈진조약을 체결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청국은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부족했고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일본의 야욕을 가벼이 보는 실책을 범했다. 톈진조약의 출발점은 임오군란이었다. 임오군란으로 인해 청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자, 일본도 제물포조약을 통해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을 조선에 주둔시켰고, 갑신정변 과정에서 양국의 군대가 충돌하는 물의가 빚어져 톈진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톈진조약은 3개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막 제3항의 해석을 두고 청나라와 일본의 입장이 달라 후일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제3항은 '장래 조선에 출병할 경우 상호 통지한다'라는 내요인데, 일본의 출병을 전제했다는 것은 청국의 종주권을 간접적으로 부정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 조항은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어느 일방이 출병하면 상대방도 자동적으로 출병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
그런데 두 나라 군대의 진격로에 차이가 있었다. 청군은 아산으로 상륙한 데 반해 일본군은 인천으로 상륙했던 것이다. 청군의 목표는 조선 조정의 요청대로 농민군을 진압하는 것이었지만 일본군의 목표는 조선을 장악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p8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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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실패의 중심에는 재조지은이라는 잘못된 구호가 자리하고 있었다. 재조지은의 망령에 사로잡힌 조선 조정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조선 신민의 공은 애써 무시하고 오로지 명나라 황제가 보낸 천병의 활약으로 조선이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전쟁 준비를 소홀히 한 책임을 회피하는 데 급급한 조선 조정이 조선의 정기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국가의 기강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던 것이다. 이로써 불행한 종착점을 향한 조선의 긴 표류가 시작되었다.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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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출발점에서 보면 세계 수준의 선진국이었지만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질서로 인해 산업 기반을 형성하기 어려웠던 데다 대외무역 금지로 물질적으로 빈곤해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시한부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 들어서 잦은 민란이 일어났지만 백성의 불만을 조직화할 수 있는 세력이 없어서 허약한 왕조의 숨통을 끊어놓지는 못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 조정은 새로운 세력의 출현을 극도로 경계해 새로운 세력을 견제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동학교가 처음으로 의미 있는 세력을 형성했지만 외세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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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잘못 설정된 건국이념은 선진국이던 초기 조선을 점차 쇠락시켜 한 수 아래로 낮춰보던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실로 어이없는 결말을 초래했다. 미국의 건국이념은 보잘것없던 농업 위주의 영국 식민지를 세계 최고의 산업대국으로 만들었고 식민지 시절 종주국이던 영국을 제치고 세계의 리더로 발전시켰다.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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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근대화론은 요시다 쇼인이 주창한 정한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야만상태에 있는 조선을 점령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정한론을 지지하지 않는 한 식민지근대화론에 동조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조선인은 야만인이므로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관점을 신봉하는 사람이 조선을 정복해서라도 개화시켜야 한다는 정한론을 지지하게 되고, 종국적으로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신봉하게 된다.
조선이 비록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이렇다 할 발전 없이 답보상태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고려 말 조선 초기에는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대거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창의성은 세계 수준이었다. 20세기 초 조선은 존중받을 만한 근대문명을 가진 나라는 아니었지만 남의 나라 손을 빌리지 않고는 아무것도 못하는 야만국도 결단코 아니었다.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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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 부대의 전투 목표가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켜 한양에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출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다면 고지 농성전은 충분히 가치 있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신립 부대가 일본군을 물리쳐주기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었다면 패배가 예고된 고지 농성전을 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상주에서 패하고 도주해 온 이일이 신립에게 적의 기세가 대단하다는 보고를 하자 신립은 '도성으로 후퇴'하겠다고 조정에 건의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신립에게 결전을 요구했던 것이다.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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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 장수 심유경이 일본과 강화협상을 한다고 나선 것도 조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명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군의 전력이 만만치 않아 일본을 살펴보고 경계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받는 것을 강화 조건의 하나로 내세웠다고 전해진다. 만일 조선군으로 일본군을 당해내기 힘들다고 판단했더라면 명나라는 일본군의 예봉이 명나라를 직접 정조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화 조건을 수락해 조선의 4도를 할양한 후에 다음 수순을 두어 미래를 대비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재조지은 운운하는 것은 아무 근거도 없다. 조선군은 조선을 위해 죽기로 싸웠지만 조선군이 일본군과 싸워 이긴 혜택은 결과적으로 명나라가 누렸던 것이다. 조선에 파병된 명군을 유지하는 부담의 일부를 조선 조정이 떠맡은 것도 어찌 보면 명나라가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푼 격이다. 이순신의 재해권 장악,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향토 의병들의 분전,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조선 육군이 보유한 막강한 살상력의 공용 화학무기(비격진천뢰, 화차)와 사거리가 긴 화살(신기전, 평전) 등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요인이지, 주판알 굴리며 조선군 위에 군림하면서 명나라와 명군의 안위만 생각하고 조선을 포커판의 칩 정도로 여기던 명군은 결코 승리의 주역이 아니다.
임진왜란 기간 중 총 100회가 넘는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중 명군이 참여한 전투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개전 초기 1년을 제외하면 조선군이 남해안에 내려와 성을 쌓고 웅거하는 일본군을 압박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왜군의 노략질이 많았지만 명군의 수탈도 심해서 조선 백성들 사이에 '왜군은 얼레빗이고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이 돌았던 점도 명군의 역할을 평가하는 데 참고해야 한다. p13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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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인조는 강화도에서 적당히 농성하다가 항복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 장면에서 크게 소리 지르며 물어보고 싶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청나라와 싸움을 시작했냐고. 처음부터 군신의 예를 갖추어 납죽 엎드리지 않고 아버지의 나라 명나라, 재조지은 운운하며 천하에 둘도 없는 열사인 양 뻗댄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었냐고. 아무 죄 없이 임금 잘못 만났다는 이유로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짐승만도 못한 대접을 받으며 고생하다가 천추의 한을 품고 객사한 수십만 백성들은 도대체 당신들에게는 무엇이냐고. (...)
청 태종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너희 나라가 산성을 많이 쌓는다는데 만약 내가 큰길로 곧바로 한양을 향해도 산성으로 나를 막을 것인가? 너희가 믿는 것은 강화도인데, 만약 내가 팔도를 다 유린해도 조그마한 섬 하나로 나라를 이룰 수 있겠는가?"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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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발전과 백성의 삶의 질에 관심이 있었다면 번영하는 일본을 보고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백성은 빈한하게 살고 있는데 한 수 아래로 본 일본의 백성들이 풍족하게 살고 있다면 제정신이 박힌 지도자라면 통렬한 반성과 진지한 고민을 했어야 마땅하다. 그렇게 하지 못한 조선 지배층은 백성을 통치의 대상이자 지배층을 위해 희생하면서 지배층을 모셔야 하는 존재로만 인식했다고 보아야 한다.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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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은 원의 지배를 벗어나 도약하려는 고려의 날개를 꺾어놓은 사건으로서 민족사적 관점에서 볼 때 지극히 불행하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위화도 회군의 정당성에 대해 토론할 기회를 주고 활발하게 의견을 교환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교육이다. 신궁으로 일커어진 이성계의 무공과 용비어천가를 교육하는 데 그친다면 고려 말 조선 초 역사 격동기가 민족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었는지에 대해 국민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향후 유사한 역사적 격동기가 닥쳤을 때 헤쳐나갈 역량이 형성될 수 없을 것이다.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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