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목숨"
외솔 최현배 선생의 삶을 대변하는 말이다. 조선어학회 관련 내용을 찾아보면서 주시경 선생이 어떤 분일까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삼십대 후반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가르침을 평생에 걸쳐 '목숨을 걸고' 실천하고자 한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삼십 몇 년을 살고 가셨는데,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그런 제자를 길러낼 수 있었을까.
최현배 선생은 이극로, 김두봉 등과 함께 주시경 선생의 대표적인 제자이다. 죽어서 스승을 뵐 때 부끄럽지 않도록 살려고 하셨다는 말씀, 돌아가시고 나서 유훈에 따라 주시경 선생 곁에 묻힌 이야기를 다른 자료에서 본 적이 있다(지금은 국립현충원과 대전현충원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한다). 대체 주시경은 어떤 인물이었기에 한 청년의 가슴에 평생에 걸친 열정의 씨앗을 뿌려놓았을까, 궁금했었다.
기회 되면 이 두 분의 평전을 한번 찾아봐야겠다 하고는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고산도서관에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기획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시리즈가 눈에 띄었다. 200쪽 정도로 두껍지 않은 책이라 금새 읽었다.
최현배 선생이 주시경 선생을 만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최현배 선생은 관립한성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당시 보성학교 교사였던 주시경 선생이 열던 강습회에 참여하면서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최현배 선생은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충격이 컸던지 일 년을 휴학하고 요양한 뒤에 경성고보 4학년에 재입학했고 스승의 부탁으로 여름방학 때는 동명학교 한글강습소에서 강사로 일했다. 그 시기 갑자기 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시면서 최현배 선생은 스승의 정신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된 것 같다.
선생은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히로시마사범학교에 진학했고(일제가 유능한 교원을 양성하기 위해 조선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 보냈다), 귀국해서 유학생 의무복무 연한을 채우기 위해 동래고보에서 한글과 영어를 가르쳤다. 진로를 모색하던 중, 스물아홉 살에 다시 교토제국대학 철학과에 입학해서 교육학을 공부했고 부전공으로 언어학을 택했다. 졸업논문은 '페스탈로찌의 교육사상'이었다. 페스탈로찌의 삶이 선생에게 적지 않은 감화를 주었던 것 같다.
"나는 왜정 밑의 우리 사회의 무기력과 침체를 타개하여 겨레 갱생의 기틀을 짓고자 하는 생각에서, 처음엔 사회학에 뜻하다가 다음엔 교육학으로 뜻을 돌려 베스달로찌이이 생애와 사상을 연구하여... 논문을 썼던 것이다. 이것이 학생시대의 지음으로서 그 내용의 불비함이 많은 것임은 틀림없겠지만 역시 나의 한살이 갈 길에서의 버릴 수 없는 하나의 뜻있는 자극인 것이다." (최현배, 나라 건지는 교육, 1963)
대학원 과정까지 마치고 귀국한 최현배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고 '조선민족 갱생의 도'를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다.
"우리는 조선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의 사람보다 더 마음이 조선의 산하를 사랑하며 조선의 민족을 사랑하며 그 산하와 그 민족의 사이에 반만 년이나 이어 내려온 조선의 역사를 사랑한다. 조선의 문화를 사랑한다. 우리는 조선의 과거에 대하여 추억의 사랑을 가짐으로 그의 현재에 대한 직감의 사랑을 가지며 그의 장래에 대하여는 이상의 사랑을 가진다. 우리는 조선을 전적으로 사랑한다. 조선의 흥성과 영예를 가장 기뻐함도 우리이며 조선의 잔쇠와 회욕을 가장 슬퍼할 이도 우리 조선의 사람이다. 요컨대 우리는 이 세계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조선을 사랑하는 조선 사람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가 또한 세계 사람임을 부인치 아니하며 또 저버리지도 아니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 모양으로 나는 조선 사람도 아니오, 일본 사람도 아니오, 황인종도 아니오, 백인종도 아니오, 다만 세계 사람이다. 하여 조선이란 것에 국한되며 결탁되기를 싫어하지도 아니하며 경시하려고도 아니한다."
"조선에 나서 조선을 사랑하며 조선을 위하야 일 해보겠다고 생각하는 청년 학생들이 먼저 조선 자체를 역사적으로 또는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반드시 일조가 될 것이며, 우리 조선민족이 이렇게 비참하게도 쇠잔에 빠진 것은 결코 단순한 자본주의란 외적 사회조직 때문만도 아니요, 다른 민족이 왕성함도 결코 사회주의란 외적 사회조직에 기인함도 아니다. 사회조직이야 여하히 변화된다 하더라도 민족의 성쇠 부침이 있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나의 신념에 이하면 사회조적의 여하를 물론하고 생기의 왕성한 민족은 흥할 것이요, 생기의 나약한 민족은 망할 것이다. 외적 세계의 변혁에 대한 능동적 분투, 창조적 활동에 달렸다. 조선 생명의 발동의 대정도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소신이다."
연희전문에 몸담은 1926년부터 선생은 조선어연구회 회원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한글 가로쓰기, 맞춤법 개정, 한글맞춤법통일안 작업, 외래어 표기법 통일을 위한 연구, 표준어 사정, 사전편찬작업, 우리말 교본에 이르기까지 쉴새없이 달려갔다. 결국은 민족주의자로 몰려(흥업구락부 사건) 연희전문학교를 강제 퇴직당하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 투옥된다.
해방 후에도 한글을 지키려는 선생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해방 직후, 8월 20일부터 동지를 모아 조선어학회 재건을 모색했고, 가로쓰기, 한자 폐지 운동, 우리말 도로 찾기, 옛철자법으로 돌아가려는 이승만 시절의 한글 간소화파동 반대, 한글 기계화(타자기) 연구까지 선생의 열정은 그칠 줄을 몰랐다. 선생의 견해가 반영된 것도 있지만 학교문법 논쟁에서 반대편의 주장이 채택된 적도 있었다. 나는 최현배 선생의 견해가 사리에 더 맞다고 생각한다. 일본식 한자어인 명사, 동사보다, 이름씨, 움직씨가 더 이해하기 쉽다.
이 책은 선생의 한글투쟁을 시대별로 조목조목 쉽고 상세하게 안내하는 장점이 있다. 다 읽고나니 선생의 개인적 일화나 사상 등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검색해보니 김삼웅 선생이 쓴 평전이 있다. 그 책도 찾아 읽고, 울산에 있는 최현배기념관도 방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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