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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스토리텔링

민담형 인간 | 신동흔

by 릴라~ 2021. 4. 26.

구비문학 전공자 중에서 늘 좋은 책을 써내는 분이 신동흔 선생이다. 이분 책이 나오면 챙겨보는데 신간이 나왔다. 지난 번에 읽은 <스토리텔링 원론>에서 민담의 캐릭터, 트릭스터의 특징을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이 책은 전세계의 다양한 민담을 소개하면서 트릭스터라는 캐릭터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요즘과 같이 한 개인이 맞서기엔 사회나 체제가 단단하다고 느껴지는 시대에 민담형 캐릭터, 겁없고 재기발랄하고 언제나 웃으면서 장벽을 거침없이 넘어가버리는 이 캐릭터가 더 소중하고 의미 있게 다가온다. 교과서에는 신화나 전설이 자주 등장하고 민담은 잘 못 보았는데, 민담을 한 번 제대로 다루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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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매개로 하지 않은 구비전승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곤 한다. 그게 얼마나 가치 있고 믿을 만한가에 대한 의문이다. 이런 의혹은 반은 맞고 반은 그르다. 기억에 의존하는 구비전승은 경험적 사실이나 지식 정보 전달에 있어 더없이 취약하다. 간단한 정보조차 금세 흐려지고 혼동되면서 와전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허구적 상상 쪽은 사정이 다르다. 사실 여부에 구애받지 않는 상상의 이야기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얼마나 이야기다운지가,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고 가치 있는지가 관건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은 구비전승의 전문 영역이다.

 

기억을 매개로 한 구비전승은 '기억될 만한 것'을 '기억될 만한 방식'으로 옮겨가는 것이 본래적 특성이다. 신기하고 재미있고 가치 있는 것은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것은 도태되어 사라진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 본연적인 인지 작용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더하고 뺄 것 없이 잘 짜인 스토리가 완성된다. 아니, '완성'이란 말은 적절치 않다. 그렇게 계속 살아서 움직여가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구비전승의 메커니즘을 가장 잘 구현하는 예술양식이 오롯한 상상 담화로서의 민담이다. '옛날 옛적에" 하고 발화가 시작되는 순간, 제한 없이 자유로운 상상의 메터니즘이 착착 작동하면서 자기완성의 길로 나아간다. 사람들이 펼쳐내는 허구적 상상이 잘짜인 스토리를 향해 움직여가는 일은 자연적 법칙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본래 스토리적으로 움직이고, 인간 또한 스토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스토리적으로 인지하고 스토리적으로 행동하는 존재, '일컬어 '호모 스토리언스'다. 

 

민담이 펼쳐내는 상상은 현실보다 꿈의 논리를 따른다. 비현실적인 요소로 가득하며, 예상을 뛰어넘은 비약과 반전이 수시로 펼쳐진다. 웬만큼 재빠르지 않으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다. 현실적 관점에서 볼 때 민담이 펼쳐내는 몽상은 허황하고 터무니없는 '공상'에 가깝다. 그러한 '허튼 상상'은 곧잘 의심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 해봐야 밥이 나와, 쌀이 나와? 그럴 시간에 땅이나 파!"

 

이런 힐난에 대한 정상적인 대답은 "사람이 밥만 먹고 사나요?"일 것이다. 땅만 팔 게 아니라 노릭도 하고 즐기기도 해야 사람다운 삶이라는 말이다. 조금 더 고급스럽게 답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상상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현실에 없는 것에 대한 상상은 새로운 창조와 문명 발달의 바탕이에요." 이 또한 그리 잘 와닿지 않는 대답일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답은 어떠한지?

 

"모르시는군요. 그 이야기들이 돈이 되고 밥이 돼요. 땅 파는 것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잘 짜인 스토리는 더없이 매혹적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움직이며 짜릿한 쾌감을 전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거기 아낌없이 돈을 지불한다. 왜냐하면 그만큼의 효용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효용가치가 교환가치를 낳는 것은 인간 세상의 자연스러운 이치다. p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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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떠오르는 대로 쭉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월트디즈니의 콘텐츠에서 민담이 차지하는 비중을 쉽게 알 수 있다. 단적으로, 민담을 원작으로 해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작품이 수두룩하다. 초창기의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잠자는 숲숙의 미녀' 등부터 근가의 '알라딘' '미녀와 야수''라푼젤'까지 수많은 흥행작의 원전이 바로 민담이다. '피노키오'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인어공주' 등 민담식 환상성을 주조로 삼는 동화를 적용한 사례까지 더하면 그 범위는 훨씬 넓어진다. 

 

눈여겨볼 바는 월트디즈니가 민담을 폭넓게 소재로 채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캐릭터 설정과 스토리텔링에서 민담의 방식을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본래 소설이나 실사영화에 비해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설화적 상상과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스토리를 풀어내고 디테일을 표현하는가에 따라 작품의 색깔과 효과는 완연히 달라진다. 민담 특유의 직선적인 캐릭터와 인상적인 화소, 반전과 비약의 스토리를 얼마나 잘 살리는지가 관건이다. 그리고 월트디즈니는 이 방면의 전문가다. p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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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담의 전형적인 인물형인 '트릭스터' 태릭터의 활용도 월트디즈니 스토리텔링에서 주목할 만하다. 쉽게 말해서 트릭스터는 재기발랄한 자기중심의 장난꾼 내지 사기꾼 캐릭터라고 생각하면 된다. 상식을 깨는 거침없는 행동력은 트릭스터의 기본 특성이다. 살펴보면 대다수의 디즈니 애니메이션 작품에 짖궂은 트릭스터 캐릭터가 등장해서 감초 구실을 한다. '백설공주' 속의 일곱 난쟁이에 트릭스터의 속성이 부여돼 있으며, '미녀와 야수'에서 시계와 주전자로 변한 시종과 하녀도 트릭스트로 움직인다. '라이온 킹'의 티몬과 품바, '뮬란'의 새끼 용무슈, '겨울왕국'의 올라프 등은 의도적으로 창조된 트릭스터 캐릭터들이다. 좌충우돌식으로 경쾌하게 움직이는 그 캐릭터들은 작품에 생생환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민담식의 재미를 한껏 자아내는 구실을 한다. 이 작품들에서 이런 트릭스터 인물이 빠진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무슈가 없는 '뮬란'이나 올라프가 없는 '겨울왕국'을 진짜 '뮬란'이나 '겨울왕국'이라 할 수 있을까? p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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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한국인들이다. 전근대적 요소를 버리고 과학적 합리성과 현실적 실용성을 추구하는 흐름이 전면적 대세가 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한국의 근대화 세대가 민담을 비롯한 옛이야기를 내다버린 것이 단적인 증거다. 근대를 향한 세대교체와 함께 옛날얘기는 현실을 살아가는 데 쓸모가 없는 허황하고 무가치한 무엇이 되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거나 마음에 새겨두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그냥 어린아이들을 위한 놀잇거리 정도로 겨우 생명력을 연장해올 수 있었을 따름이다. 그나마 근대적 가치관에 의해 이리저리 각색되고 윤색된 형태로 말이다. 수백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옛날이야기 문화는 그렇게 빈사 상태가 되어 사라질 지경이 되었으니, 나는 그것이 우리 언어문화의 역사상 가장 심대한 변화 가운데 하나였다고 믿고 있다.

 

인간은 본래 꿈꾸는 존재이고 상상하는 존재다. 리얼리즘이 지배적 시대정신으로 문학예술을 주도했다고는 하지만 실상을 말하자면 그것은 '전일적인' 것일 수 없었다. 허구적 상상의 스토리 문화는 20세기 한국 문화의 저변, 이른바 '물밑'에서 여러 형태로 움직여왔던 것이 사실이다. 전래동화의 형태로 명맥을 이은 옛날이야기나 '만화로 보는 고전소설' 같은 전통적 이야기 콘텐트 외에 창작동화와 만화, 비주류 소설과 영화 등에서 허구적 상상의 스토리텔링이 일정하게 힘을 발휘해왔다. 수많은 만화책에서 공상 내지 망상에 가까운 허구적 이야기가 펼쳐졌고, 무협소설이나 공상과학소설, '빨간 책'으로 불린 성인소설 등이 자유로운 상상적 담화의 세계를 자기식으로 펼쳐냈다. 서양과 일본 애니메이션 외에 '로보트 태권V'나 '머털도사' 같은 한국 애니메이션에서도, 홍콩산 무협영화나 헐리우드산 공상과학영화 외에 한국의 B급 대중영화 같은 데서도 이런 스토리텔링은 하나의 흐름을 이루어왔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말 그대로 '물밑의 상황'으로서 삶과 문화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화를 주도하는 이슈가 되지 못했으며, 일반적 삶과 의식의 측면에서도 중심적 실체가 되지 못했다. 일부 마니아의 경우를 제외하면, 그것은 삶의 구석에서 펼쳐지는 부수적 문화에 가까운 것이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런 흐름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일이었다. 나는 그 의미 있는 사례로 이우혁의 '퇴마록' 시리즈를 든다. p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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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 시리즈가 몰고 온 광풍이 세기 전환기를 관통하며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를 휩쓴 일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웅변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

 

판타지 문학이 세기 전환기를 휩쓴 현상이 곧 '민담 시대'의 도래를 말해주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나의 판단에 판타지 스토리텔링은 기본 코드가 민담보다는 신화나 전설 쪽에 더 가깝다. 프로도나 해리포터의 캐릭터와 동선은 트릭스터보다는 '영웅'에 해당한다. 그들은 씩씩하고 당당한 한편으로 진지하고 비장하며 윤리적이다. 앞서도 잠깐 말했지만, 그들의 어깨에는 '이 세상의 운명'이 걸려 있다. 그들은 거대한 악에 굴하지 않고 싸워 이김으로써 파멸의 기로에 선 인류를 구해야 할 책무를 안고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 같은 경우 그러한 의무보다 경이로운 모험 쪽에 서사적 비중이 더 크게 놓이고 작품 속에서 민담적 캐릭터들이 한몫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기본적인 문학적 구도가 신화적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렇다는 왜 나는 '신화의 시대'가 아닌 '민담의 시대'를 말하는가. 내가 보기에 신화적 판타지 열풍은 말 그대로 세기 전환기의 두드러진 현상이었고, 이제 그것을 넘어서 민담적 서사가 쭉쭉 솟아오르는 흐름이 곳곳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그 흐름은 거의 전면적이며, 이미 본격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p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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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담형 인간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가 트릭스터다. 제 욕망을 이루기 위해 수단에 개의치 않고 거침없이 움직이는 행동파 인물이 곧 트릭스터다. 신화의 특징적 캐릭터가 '영웅'이고 소설의 두드러진 캐릭터가 '문제적 개인'이라면 민담을 대변하는 캐릭터는 바로 '트릭스터'라 할 수 있다.

 

'트릭trick'을 명칭 안에 떡하니 지니고 있는 트릭스터는 '사기꾼' 느낌이 물씬 나는 캐릭터다. 트릭스터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는 "문화인류학에서, 도덕과 관습을 무시하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신화 속의 인물이나 동물 따위를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이거 완전히 반윤리적인 사기군 취급이다. 그에 비하면 '다음 영어사전'에 'tricster'의 뜻으로 나열된 "1. 사기꾼, 2. (민화, 신화에 나오는) 장난꾸러기 요정, 트릭스터, 3. 마술사, 4. 창조적이면서 파괴적인 성격을 가진 양의적 존재, 5. 책략가" 등이 더 나은 편이다. 특히 4번의 설명이 아주 그럴싸하다. p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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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스터는 '윤리학'이 아닌 '존재론'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어울리는 존재다. 그가 현시하는 것은 윤리도 반윤리도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성일 따름이다. 윤리학 차원에서 접근할 때 정만서와 같은 트릭스터가 설 자리는 없다. 이른바 '윤리적인 사람들'이 그에게 원하는 것이란 소소한 재미를 전해주는 감초 정도의 역할일 따름이다. 그걸 넘어서 제 식으로 세상의 질서를 흔들 때 그는 배제의 대상이 된다. 이른바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그러나 저들 트릭스터는 절대 '감초'로 머무를 인물이 아니다. "내가 왜? 누구 좋으라고!" 누가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고 자기 식으로 밀고 나갈 따름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칭송은 물론이려니와 혐오와 비난 따위에도 영향받지 않는다. "그런 건 개나 주라고 해." 그냥 자기 욕망에, 자기 느낌과 동선에 충실한 존재, 그것이 트릭스터다. (...)

 

어떤가 하면 트릭스터는 그렇나 규범이나 주의를, 차별과 억압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세상 어떤 고귀한 규범이나 가치도 인간 그 자체보다 앞설 수는 없다고 보는 이들이다. 크고 작은 윤리에 얽매이지 않고 수많은 경계와 차등을 넘어서 움직이는 사람, '주의 없음'을 주의로 삼는 사람, 그게 트릭스터다. 굳이 세상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그들은 '탈경계인'이다. 윤리 이전 또는 윤리 너머의. 요즘 말로는 '아웃사이더'에 가깝다 하겠으나, 그와도 질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그들한테는 '사이드'가 없으므로. 이른바 '핵인싸'가 되기 위한 발버둥은 트릭스터들이 보기에 부질없는 짓거리일 따름이다. p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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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나 전설의 주인공 가운데 비범함을 넘어서 신이함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 많은 반면 민담에는 그리 두드러질 것도 없는 평범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한다. 표현이 좀 그렇지만, 딱 보기에 '평균 이하'로 보이는 인물이 많다. 아예 호칭에 바보나 얼간이, 멍청이, 엉터리 같은 수식이 붙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얼간이 한스나 바보 이반, 미련둥이 같은 식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조롱과 비하의 시선을 뒤집고서 보란 듯이 성공을 이루어내곤 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그런 성공을 우연한 것이라고 여기지만, 이야기는 그것이 '예견된 성공'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요소들을 그 안에 착착 포함하고 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얼간이로 치부되던 사람이 어떻게 편견을 깨뜨리고 판을 바꾸어내는지를.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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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우리들의 브레멘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의 꿈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곳이라면, 내가 진정으로 원했떤 삶을 펼쳐낼 수 있는 곳이라면, 세상 어느 곳이라도 브레멘이 될 수 있다. 돌아보면 험하고 냉정한 세상이다. 세상은 오로지 타인들을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장 큰 적은 그런 마음 자체일 수도 있다. 나의 몸을 한없이 잦아들게 하는 '소설형'의 사유 말이다. 그런 마음이 들 때면 저 브레멘의 음악가들을 생각해볼 일이다. 내 안에 맹랑하게 깃들어 있는 민담형의 기운을 훌쩍 깨워서 일으켜보기. 함께함으로써 두 배 또는 열 배의 힘을 낼 갸륵한 동반자들 찾아보기. 지금이 내 남은 인생의 가장 젊은 때다. 두려워할 일이 무엇이랴.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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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원론 | 신동흔 — 옛이야기는 불완전한 서사가 아니라 이야기의 본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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