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때론 허무맹랑하게 보였던 옛이야기가 얼마나 흥미진진한 문제 의식과 인류의 원형적 사고를 담고 있는지를 낱낱이 맛보여주는 책. 예전에 이분의 '바리데기' 해석과 대학원생들과 함께 작업한 '심청전' 해석에 감동한 적이 있어 믿고 보는 저자인데, 이 책 역시 실망하지 않았다.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이야기가 이렇게 깊이 있는 화두를 담고 있을 줄이야. '소설'과 다른 '설화'의 독특한 매력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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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그 역사가 매우 길고 오래다. 문자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이야기는 존재해왔다. 수천수만 년, 어쩌면 그 이상이다. 인간이 '말'을 하는 순간 이야기는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 내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또는 사람과 사람 아닌 것 사이의 소통과 교감의 기본 통로로 존재해왔다. 놀라운 사실은 그대 그 이야기들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문자를 넘어서 최첨단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수백수천 년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흘러온 이야기들을 찾으며, 거기서 재미와 감동을 느낀다. 전문 작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이야기가 스쳐가며 잊히는데 오래된 이야기들은 여전히 힘을 낸다. 21세기에 들어서 그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신화나 민담이 스토리문화의 중심축으로 떠오르는 중이다.
공들여서 새로 만든 수많은 이야기들이 속절없이 힘을 잃는 상황에서 거칠고 허황해 보이는 옛이야기들이 내내 힘을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름지기 그것이 '진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세월의 검증을 거치며 전승적으로 진화해온 이야기이며,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상상을 집약적이고 함축적으로 담아낸 원형적 이야기다. 한마디로 말하여, 옛이야기는 이야기의 본령이다. p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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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가 종잡기 힘든 허황한 것이고 인식상 혼란을 낳는 위험한 것이라는 관점은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것이다. 실재와 상상은 세계를 이루는 두 축으로서 어느 한쪽에 일방적 가치를 부여할 바가 아니다. 인간은 본래 꿈꾸는 존재이며, 상상하는 존재다. 상상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그 상상의 길을 펼쳐내는 데 적합화된 언어, 그것이 곧 설화라 할 수 있다.
상상이 없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온 존재가 경험적 실재의 테두리 안에 꽁꽁 갇혀 있는 것과 같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말이다. 인간의 경험적 반경은 꽤 넓지만, 무한하지는 않다. 경험적 현실에 입각할 때 인간이 100미터를 9초 내로 달리거나 하늘을 훌쩍 나는 일은 불가능하며, 가난한 시골 총각이 왕이 되는 일도 일어날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허구적 상상을 배제한 채로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사고만 하도록 키워진다면 그 삶은 일차원적 단순성을 거의 못 벗어날 것이다. 주어진 환경에 긴박된 채로 눈앞의 상황을 감당해 나가는 식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새로운 삶, 새로운 가치를 향한 통로가 닫히고 만다. 그 세계가 아예 없는 것처럼 되어버린다.
설화적 상상 속에서는 경험적 현실에서 생각도 못할 모든 일들이 다 가능하다. 사람이 단숨에 수천 리를 가고 하늘을 훨훨 날아오르며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다. 거지가 하루아침에 왕이 되고 왕자가 한순간에 개구리가 되며 한 사람이 열 명, 백 명으로 나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상적 형상을 말하고 듣는 과정에서 인간의 인지는 힘찬 운동을 하게 된다. 사고의 반경이 부쩍 넓어지고 사유의 역동성이 살아난다. 그로부터 인간 삶의 새로운 지경이 열려 나간다. 인류 역사의 발전은 이런 인지적 운동을 통해 실현된다고 해도 좋다. 틀을 깨는 자유와 역동의 상상적 인지를 통해서 말이다.
요컨대 허구적 상상을 축으로 하는 문학적 언술행위는 없어도 그만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적 현실성을 축으로 한 언술 행위와 더불어서 인간 삶의 기본 축을 이루는 본원적 요소다. 그것 없이 인간은 인간일 수 없다. 세계 모든 곳에서 수백수천 년 동안 상상적 담화로서의 설화가 언엇애활의 한 축을 이루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pp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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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구비전승'이나 '구비문학' 같은 말에 들어 있는 '구비'의 어의적 묘미를 짚어보는 것도 좋겠다. '구비'는 '구전'과 비슷하게 쓰이는 말이면서도 내포적 의미가 다르다. '비'라는 말이 지닌 '새기다'라는 뜻을 반영해서 '구비'는 "비석에 새긴 것처럼 전해온 말"로 풀이되곤 한다. 이때 '비'의 언어적 함의가 '스키마'와 통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무엇인가를 말로 표현하고 듣는 과정에 일정한 틀이 작용한다는 것은 매우 그럴 듯해서, '구비전승'이나 '구비문학'은 꼭 어울리는 말이 된다. 근래에 구비문학 대신 '구술문학'을 쓰자는 의견도 있으나 구비문학이란 말이 실질적 유효성을 지난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흔히 말하는 '구술성'을 '구비성'으로 쓰는 편이 더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구두로 말하고 들을 때 어떤 식으로든 '비'의 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니 말이다. p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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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의 예를 들었지만, 기록문학 중심의 연구자들에게서는 더욱 편하적이고 차별적인 시각을 흔히 볼 수 있다. 설화를 소설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초급의 서사로 보는 식의 관점이 널리 퍼져 있다. 극단적으로는, 설화를 유의미한 관심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모습까지 보게 된다. 20세기를 관통해온 소설 중심의 문화사와 그를 통해 몸에 밴 리얼리티 중심의 미학이 만들어낸 정신적 풍경이다. 그 나름의 역사적 맥락이 있는 것이겠으나, 수백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담화 양식을 근대적인 새 문학 양식의 엑스트라로 삼는 식의 입론은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설화를 미숙하고 불완전한 서사로 보는 관점은 완전한 편견이고 오해다. 설화는 구조와 표현의 측면에서 서사문학적 완전성을 지향하며 그것을 부단하게 실현해왔다. 신화는 신화대로, 전설은 전설대로, 민담은 민담대로 그 자체 완전한 서사의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구비설화 외에 지괴나 우언, 골게전, 야담 같은 기록설화 양식 또한 그 자체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어떻게 설화와 구별되는 새로운 문학 세계를 열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답은 소설이 '서사를 완성시켰다'는 쪽에서가 아니라 '서사를 넘어섰다'는 쪽에서 찾는 것이 합당하다. 소설은 그 자체 서사문학이면서도 특유의 방식으로 그 경계를 넘어섬으로써 새로운 문학세계를 펼쳐낼 수 있었다는 관점이다.
설화는 서사성을 근간으로 삼는 양식이다. 스토리를 축으로 하여 내용이 구성되고 표현되며, 스토리를 바탕으로 하여 미감과 의미를 발현한다. 이에 비해 소설에서 스토리는 '하나의' 요소일 따름이다. 소설에서는 구체적 디테일이 스토리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 디테일은 서사적인 한편으로 서정적이고, 극적이며, 교술적이다. 소설에서 서정성이나 극성, 교술성의 역할은 서사성을 보조하는 수준 이상이다. (...) 근대소설의 경우 서사성을 아예 포기한 작품도 많다. (...)
소설이 서사를 넘어선 서사, 또는 이야기를 넘어선 이야기라고 할 때 이 또한 설화와 소설의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반문할 수 있겠다. 그렇지 않다. 설화와 소설은 서로 다른 문학적 지향성을 지니는 이질적인 담화 양식일 따름이다. 소설이 현실적 구체성과 총체성을 지향한다면 설화는 서사적 상징성과 함축성을 지향한다. 소설이 근대적, 전문적 양식이라면 설화는 원형적, 보편적 양식이다. 설화와 소설은 모두 그 자체로 완전하며 서로 다른 미적, 인식적 가치를 지닌다. pp7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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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특수성이 짙은 이야기 양식이다. 그 개념으로 '신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떠오르겠지만, 이는 그리 적절한 정의가 되지 못한다. 신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다 신화가 아니고, 신화라고 해서 다 신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연구자들에게 통용되는 신화의 정의는 '신성한 이야기', 또는 '신성시되는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다. 신성을 내재하고 발현하는, 그리하여 그 자체로 존중 대상이 되는 이야기가 신화다. 한 이야기가 신화인가를 가늠하는 데는 객관적 내용보다 전승자의 태도가 더 중요한 변수가 된다. 어디에서 어떻게 신성성을 느끼는가는 개인에 따라서, 또는 집단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호랑이나 구렁이 같은 동물이 기피와 공격 대상이 되기도 하고 신령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데서 이를 단적으로 볼 수 있다.
신화의 중요한 미적 특성으로 '일체화'를 들 수 있다. 신화의 전승자들은 이야기 속의 신성한 존재와 스스로의 동질적 일체화를 지향한다. 신화의 주인공은 사람들에게 '나 이상의 나'로서, 마음에 깊이 새기고 존중해야 할 범례가 된다. 사람들은 그 삶의 방식과 과정에 스스로를 투영하는 가운데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으며, 자아의 한계를 넘어서 삶의 격상과 실현을 이룰 동력을 얻는다. 한편으로 신화는 특정 집단을 하나의공동체로 결집하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이야기를 매개로 같은 신성을 공유함으로써 사람들이 서로 자연스레 합치를 이루는 식이다. 신화를 집단 정체성의 표상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럽고 합당한 일이다.
집단적 존중 대상으로서의 신화는 강력하고 민감한 이야기다. 그것은 삶을 격상시키고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큰 힘을 내지만, 반대의 가능성도 상존한다. 한 이야기가 신성의 이름으로 도피나 차별, 폭력 등을 조장할 때 그것은 삶을 격상시키는 대신 파탄을 가져올 수 있다. '가짜 신성'이며 '유사 신화'다. 외적인 힘, 예컨대 권력이나 자본 등이 신성의 이름으로 사람을 억압할 때도, 그리하여 신성이 자발적으로 수용되지 않을 때도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대신 갈등과 분열을 불러온다. 신화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이다. 세상의 모든 신화는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pp9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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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의 전형적 인물형으로 영웅을 들 수 있다. 수많은 신화와 전설이 '영웅서사'로서 성격을 지닌다. 영웅은 무겁고 진지하며 뜨거운 존재다. 그 어깨에 세상의 운명이 걸려 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 속에서 집단의 표상으로서 움직인다. (...) 결과가 어떠한가를 떠나서, 영웅의 몸짓은 강한 파토스를 자아낸다.
신화적 영웅과 전설적 영웅을 비교하면, 신화적 영웅의 어깨가 더욱 무거운 쪽이라 할 수 있다.그는 사람들의 전적인 관심과 기대, 그리고 존중 속에서 움직인다. 그의 행보에 사람들이 울고 웃는다. (...) 사람들에게 그는 어둠 속 등불과 같은 구원자적 존재다. 이에 비하면 전설적 영웅은 상대적으로 외롭고 비장한 쪽이다. 그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존중하기보다 관심 속에 관찰하고 주시하는 대상에 가깝다. 그는 흔히 신이한 능력을 지니지만, 세계의 장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서사적 역정이 환기하는 것은 경애와 존숭보다는 경이와 성찰, 회한 쪽이다.
그렇다면 민담은 어떠할까? 민담 속에 꽤 많은 영웅이 등장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성격은 신화나 전설과 꽤 다르다. 그는 '개인적 영웅'인 경우가 많다. 남다른 능력으로 삶의 성공과 행복을 이루어내는 식이다. 그로 인해 세상의 변혁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세상을 위해 움직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민담적 인물형의 특성은 기실 영웅보다 '트릭스터trickster' 개념으로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제 욕망을 이루기 위해 수단에 개의치 않고 거침없이 전진하는 행동파 인물이 바로 트릭스터다. 명칭에 '트릭'이 포함돼 있거니와, 그는 트릭을 사용함에 거침이 없다. 신화나 전설의 영웅이 기본적으로 정도로 움직이는 것과 구별되는 특성이다. (...)
트릭스터의 이와 같은 동선은 영웅의 동선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에서 재봉사는 나라의 골칫거리였던 거인들과 일각수, 멧돼지를 처치하는 공을 세운다. 얼핏 영웅적으로 보이는 행적이지만, 그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욕망의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다. 영웅의 어깨에는 다른 사람들의 삶이 걸려 있지만, 저 트릭스터한테는 그러한 짐이 없다. 영웅이 핫한 존재라면 트릭스터는 쿨한 존재다. 무겁고 진중한 영웅과는 달리 트릭스터는 늘 가볍고 쾌활하다. 세상의 모든 관계나 평가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지금 여기 나의 삶'을 살아갈 땨름이다.
이와 같은 트릭스터의 자유로움은 흔히 '경계성'으로 설명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탈경계성'이다. 그에게 기존 세상의 패러다임은, 사회적 윤리나 의무, 법칙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법칙이며, 그 자신이 행하는 바가 곧 진리가 된다. 그는 세상의 변두리에서 움직이는 주변인이 아니다. 그가 움직이는 곳이 곧 우주의 중심이다. 그가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기존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새 경계가 열린다. 완연한 주인공으로서 자유의 삶을 사는 인물. 그것이 트릭스터의 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위 이야기에서 꼬마 재봉사가 '왕'이 되어 평생을 살았다는 것은 그 표상이 된다. 민담적 인물형의 궁극에 해당하는 면모다.
타인이나 세상에 신경 쓰지 않고 제 자신의 삶을 산다는 면에서 트릭스터는 자기중심적이다. 이때 그 자기중심성은 '이기적인 것'과 다르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
이러한 트릭스터 서사가 전해주는 가치란 무엇일지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 그에 대한 답은 자기 삶을 자기 식으로 살아가는 일 자체가 크나큰 가치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좋은 일이다. 만약 사람들이 다들 저 재봉사처럼 당당하고 쿨하게 자기 삶을 살아간다면 즐겁고 멋진 일이 될 것이다. (...) 요컨대 트릭스터가 보여주는 것은 방편적인 삶의 기술이 아니라 근원적인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웅의 존재론과 전혀 다른 자기중심적 존재론이다. 인간이 스스로 제 삶을 책임져야 하는 단독자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 트릭스터가 현시하는 존재적 철학은 지극히 원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보았지만 세계의 민담에서 수많은 트릭스터들과 만날 수 있다. 민담을 일컬어 '트릭스터의 경연장'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한국 설화에는 전형적 트릭스터들이 적은 편이지만, 주인을 골리는 꾀쟁이 하인과 여우를 속이는 메추리, 호랑이를 속이는 토끼, 과부를 속이는 머슴, 그리고 봉이 김선달과 방학중, 정만서, 진평구, 김복선 등 다수의 주인공을 나열할 수 있다. 트릭스터적 면모가 약간씩이라도 있는 주인공들을 열거하기로 하면 그 목록은 훨씬 많아질 것이다.
트릭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그것이 설화의 캐릭터 원형에 해당하는 것이면서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귀한 씨앗이기 때문이다. 목하 트릭스터형 인물이 문화예술 콘텐츠의 전면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이다. <창문 너머 도망친 100세 노인>의 선풍적 인기는 그 단적인 지표라고 할 만하다. 한국에서 트릭스터적 면모를 지니는 유쾌한 영웅 전우치에 이어 봉이 김선달 등이 영화화되는 현상을, 유해진 같은 배우가 조연을 넘어 주연으로 부상하는 흐름을 범상하게 볼 일이 아니다. 이미 세상은 트릭스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기에 앞서 '소설적 인간형'에 대해 잠깐 말해 본다. 루카치와 골드만의 견해를 빌리자면, 소설의 전형적 인물형은 '문제적 개인'이라 할 만하다. 세계의 본질적인 모순을 인지하고 있되 그 거대한 벽에 부딪히기에는 턱없이 왜소한 사람.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서 무력하게 방황하다 주저앉는 사람. 행동이 아닌 논리로, 몸이 아닌 입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근대소설의 전형적 주인공이다. 일컬어 회색인, 또는 무기질 청년. 가장 현실적인 삶의 모습이고 '도저한 리얼리티'일 수 있겟으나, 실제가 아닌 상상 속에서조차 무기력한 유영을 아득이 지속해야 한다는 것은 감내하기 어려운 일이다. 말하자면 '현실 고문'이라고나 할까.
그 문학예술적, 인식적 가치를 격하하기 어렵겠으나, 21세기 대중이 이와 같은 형태의 스토리텔링에 예전과 같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 대신 대중이 눈길을 돌린 대상이 무엇인가 하면 '영웅'이었으며 이제 그것은 트릭스터로 향하고 있다. pp1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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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물과 배경이 있고 사건이 제시된다고 해서 스토리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아무 특별함 없이 평범하고 일반적이어서는 곤란하다. (...)
어떤 언술이 스토리로 살아나려면 특별하고 낯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를 통해서 호기심과 긴장, 재미와 놀라움 등을 자아낼 수 잇어야 한다. 그 특별함은 인물과 사건, 배경 등에 걸쳐 다양하게 설정될 수 있다. 예컨대 '세상에 사람이 살다/죽다'라는 일반적 언술은 다음과 같은 약간의 변형으로도 낯설고 특별한 언술로 바뀐다.
마법사가 살다/ 무인도에서 살다/ 죽었다가 살아나다 (...)
위 진술의 '마법사'와 '무인도', '재생'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면서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 요소를 화소라고 한다. 영어식 표현으로는 '모티프motif'다. 행동 동기를 뜻하는 모티브motive와 달리 서사의 구성요소를 일컫는 말이다. 화소는 특이하고 인상적인 내용으로 돼 있어서 쉽게 파괴되지 않고 용이하게 기억되며 독립적 생명력을 지닌다. 설화의 스토리적 각인력과 호소력은 화소를 기본 축으로 하여 발현되거니와 그 구실은 막대하다. 그 힘을 매개로 하여 스토리의 전달과 기억, 재현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좋다.
화소와 화소가 서로 맞물림으로써 스토리는 성립된다. 화소는 그 자체 역동성을 지니거니와, 화소들의 만남은 더욱 역동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특별함과 특별함이 만나 또 다른 차원의 특별함을 빚어내는 식이다. (...)
설화는 화소들의 놀이터다. 오랜 세월을 거쳐 전승돼온 옛이야기들은 특별한 화소들을 갖추고 있다. 그 화소들이 적재적소에서 재미와 긴장감을 일으키고 의미를 자아낸다. 비유하자면 화소는 상상계라는 우주를 수놓는 무수한 별과 같다. 옛사람들은 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지상의 좌표를 가늠했고, 수많은 화소들과 만나면서 인생의 좌표를 헤아렸다. 그 일은 여전히 유효하다. pp117-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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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소는 설화를 생생하게 살리는 요소지만, 특이한 화소가 많이 제시된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필요한 화소가 적절히 살아나서 상생적 연계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화소들을 아우르는 서사적 구심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전체적으로 순차구조가 형태적 구심 역할을 하지만, 그에 앞선 의미적 구심을 상정할 수 있으니 '서사적 화두'가 그것이다. 서사적 화두는 '서사적 의미 축을 이루는 쟁점적 문젯거리'로 정의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깊이 생각해야 할 미묘하고 다의적인 문젯거리를 화두로 삼거니와 여기서의 화두도 그러한 뜻을 내포한다.
서사적 화두는 한 이야기가 무엇을 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핵심적으로 응축하는 화제적 거점이다. 기존의 서사학에서 이와 유사한 것으로 프랭스가 말하는 '요점point'을 들 수 있다. 서사물은 요점이 있을 때 관심과 함께 맥락적 의미가 살아난다는 것이 프랭스의 설명이다. 이에 대하여 서사적 화두는 그 요점을 서사 전체를 꿰뚫는 쟁점적 문젯거리 형태로 수렴한 것에 해당한다. 보다 집약적이고 맥락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제반 화소와 연결되고, 다른 한편으로 순차구조와 연결된다. 설화의 모든 화소는, 그리고 모든 구조는 서사적 화두와의 관계 속에서 운동한다.
한 설화 안에는 여러 개의 서사적 화두가 포함될 수 있다. 그중 상대적으로 주요한 것들이 있고 나아가 핵심을 이루는 것이 있다. 핵심적인 서사적 화두는 핵심 화소들에 깃든 의미요소의 상관관계를 통해서 찾아낼 수 있다. <신바닥이>를 보자면 앞서 열거한 화소들 가운데, b와 c, e, g, l 등이 핵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기본 문젯거리와 그에 대한 대응, 그리고 대응 결과를 함축한 화소들이다. 여기서 문제의 출발이자 요점은 b의 '귀한 자식에 대한 호식 운명 예언'이다. 이 화소는 존재적 절멸로서의 죽음을 문제 삼거니와 그 죽음이 호식이라는 끔찍한 형태라는 점에서 특히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 화소는 다음과 같은 여러 문젯거리들을 환기한다.
1) 사람한테 정해진 운명은 정말로 있는가?
2) 왜 사람은 험한 운명을 갖게 되는 것일까?
3) 운명은 실현되기 마련인가, 아니면 극복 가능한다?
4) 인간의 험한 운명은 어떻게 하면 극복될 수 있는가?
이들은 곧 이 설화의 서사적 화두의 '후보'가 된다. 핵심 화소간 의미관계 속에서 두드러진 문젯거리로서의 자격을 지닐 때 그것은 후보를 넘어서 화두가 될 수 있다. pp167-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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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설화는 서사적 화두를 축으로 하여 화소와 순차구조가 유기적으로 결합되면서, 그리고 거기 다양한 의미적 대립항이 구조적으로 통합되면서 특유의 미적, 서사적 의미를 발현한다. 그 메커니즘을 종합적이면서도 핵심적, 심층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서사 해석의 요체가 된다. 이때 유의할 것은 그 해석이 지나치게 수렴적인 방향으로 단순화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사실이다. 의미적 구심을 확실히 잡는 한편으로 원심적이고 확장적인 해석을 적극 시도할 때 이야기의 의미가 보다 풍부하고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다. 부분과 전체를 관통하는 정합적이면서도 입체적인 해석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p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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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이 서사문법을 활용해서 이야기 창작 수업을 수행한 프로세스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설화서사 이해단계 : 낯선 상상의 세계를 통한 세상보기, 핵심화소를 찾아 상징적 의미 짚어내기, 대립구조 분석을 통한 서사적 화두 찾기, 순차적으로 구조화된 서사과정 분석하기
2. 설화와 자기서사 연결 단계 : 자기의 핵심문제와 설화의 화소 연결하기, 설화에 빗대어 자기문재의 대립자질 추출하기, 설화적 순차구조로 핵심 경험 배치하기
3. 자기서사의 허구적 서사화 단계 : 자기문제를 반영한 핵심 화소 설정하기, 화두로 상징적이고 대립적인 구조 만들기, 설화적 짜임새를 가진 순차구조 만들기
4. 구체적 이야기의 서술 단계 : 낯설고 신이한 배경 설정으로 대상화하기, 특징이 분명한 행동하는 인물로 표현하기, 꼭 필요한 사건으로 속도감 있게 전개하기, 들려주기식 문체로 풀어내기
5. 이야기 소통을 통한 성찰 단계 : 피드백을 통한 수정과 발표 p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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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장수를 죽인 것은 일상적 존재가 신령한 존재를 범한 일이고, 피구원자가 구원자를 배반한 일이며, 어둠이 빛을 덮은 일이다. 보호 의무자가 보호받을 사람을 해치고, 과거가 미래를 말살한 상황이다. 그 결과가 어떠한 것일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무참한 좌절이 있을 따름이다. 그렇게 하나의 '흑역사'는 한 집안을 넘어서 한 세상으로 확장되어 결정적으로 완성된다. 용마의 울음으로 표상되는 쓰라린 회한과 자책을 남긴 채로.
이것이 이 설화에 서사화된 민중의 역사다. 나서서 지켜주지 못할망정 스스로 희망의 싹을 짓밟은 굴종과 좌절의 역사. 전설 특유의 비극적 세계인식을 반영한 의미요소다. 이에 대하여 다수 연구자들은 이 설화가 무력한 패배감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사람들이 저 쓰라린 패비를 말하는 것은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자기비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아픈 과거를 되새기면서 스스로 거듭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다시 그렇게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 슬픈 좌절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 전설의 궁극적 의미는 텍스트 안이 아니라 텍스트 밖에 있다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이야기 텍스트는 과거의 역사를 말한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눈앞의 안위에 연연한 결과로 쓰라린 좌절을 겪는다. 자기 안의 두려움과 패비감이 무력한 포기로 이어져 희망을 무너뜨린 상황이다. 그 상황을 내보이면서 이야기는 텍스트 밖의 사람들한테 묻는다. 만약 비슷한 상황이 현실로서 닥쳐오면 어찌하겠느냐고. 너희 집에 장수가 태어난다면 어찌하겠느냐고 묻는다. 다음과 같은 화두다.
과연 우리는 쓰라린 과오를 되풀이하는 대신 모든 것을 걸고서 변혁의 희망을 지킬 수 있는가? pp218-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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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이야기가 전하는 또 하나의 답이 있다. '시간은 진실의 편'이라는 것이다. 악의에 의해 배반당한 선의는, 타락에 의해 훼손된 순수는, 부정에 의해 짓밟힌 긍정은 시간이라는 섭리 속에서 마침내 다시 살아나서 힘을 내게 된다. 백설공주가 세 번째로 쓰러졌을 때 끝내 일어나지 못한 것과 같이 때로 그 시간은 한없이 길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진실은 밝혀지고 모든 일은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다. 극단적으로는 그 당사자가 죽어서 떠난 뒤에라도, 그 시간 속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누가 그 시간을 움직이는가 하면, 나는 그것을 '신'이라고 부른다. pp24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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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의 축자적 의미는 '이야기 말하기'지만, 사람들이 더 많이 떠올리는 것은 '이야기 만들기' 쪽일 것이다. 사람들한테 크게 통할 만한, 반향도 일으키고 돈도 될 만한 멋진 이야기 만들기. 그러나 스토리텔링에서 창작보다 중요한 것이 분석이라고 말하고 싶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들 안에 답이 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야기들을 제대로 분석하여 오롯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핵심적 화두와 주제를 꿰뚫고 심층의 미적 가치에 접속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스토리다운 스토리를 말할 수 있게 된다. (...)
아울러서, 변형보다 원형이 답이다. 더 멋있어 보이고 감동적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변형이겠으나, 그것이 본래의 맥락과 함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경우 오히려 스토리를 죽이는 길일 수 있다. 외적 디테일이 아무리 그럴싸하더라도, 원형적 서사 특유의 문제적 화두와 철학이 없는 이야기는 더 이상 이야기일 수 없다. 이야기의 미적 구심을 이루는 원형적 요소를 오롯이 살리는 일은 모든 종류의 스토리텔링에서 관건적 과제가 된다. pp258-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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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저 신데렐라가 아니다. 그 옆에 있는 가짜들이 문제다. 노동 따위는 약자한테 떠맡기고 기생의 삶을 살면서 저만의 욕망과 쾌락을 좇는 존재들. 그들 가짜 신데렐라들은 왕자가 신발을 들고 찾아오자 자기가 그 주인이라며 다투어 발을 내민다. 맞을 리가 없다. 그러자 그들은 엄지발가락을 자르고서, 또는 뒤꿈치를 자르고서 신발 속에 발을 구겨 넣는다. 왕비가 되고 나면 제 발로 걸을 일이 없을 거라고 자기 최면을 걸면서 말이다. 그 신발, 피로 물든다. 개암나무에 앉은 새가 소리친다. 그는 가짜라고. 신발 속의 피를 보라고. 그렇다. 가짜는 진짜가 될 수 없다. 진실은 벌겋게 노출되기 마련이다. p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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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야기'와 관련한 하나의 관례적 불문율이 있다. 일컬어 동심의 미학. 아이들한테 주어지는 이야기는 '순수하고 어여쁜 어린이 마음'을 오롯이 지키고 살려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악하고 잔혹하며 공포스런 내용으로 아이들 마음에 그늘을 드리우거나 생채기를 내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 된다. (...)
문제는 원형적 설화에 그러한 동심과 어울리지 않는 내용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이다. 설화 화소가 본래 낯섦과 특별함으로 강한 각인 효과를 추구한다는 것과 관련이 되며, 서화가 세상의 이면적 진실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지향성을 지닌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불편한 진실을 모른 척 덮어두거나 피해가는 것은 설화의 방식이 아니다. (...)
이러한 사태에는 '동심 수호 의무'라는 이데올로기 외에 설화에 대한 몰이해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진단이다. 설화의 화소와 서사를 경험적 현실의 코드로써 재단하는 오류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이야기로 받아들이며 상상적 즐거움을 구가하는 터인데, '현실 원리'가 몸에 밴 어른들이 지레 기겁해서 그것을 등뒤로 숨기는 형국이다. 아이들은 스토리적 맥락이 심히 왜곡된 상태가 아니라면, 또는 누군가가 서사 내용을 소설적 디테일로 덮어씌우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런 설화 앞에서 겁먹으며 떨지 않는다. 이야기로 즐길 뿐이다. 그 안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무심중에 내면화하여 내적 성장을 이루면서 말이다. 옛이야기를 믿고, 아이들을 믿어야 한다.
'동심 수호'라는 지향과 반대되는, 이른바 '동심 파괴'의 방향으로 설화적 서사문법을 배반하는 사례들도 있다. 설화의 내용을 소설적 디테일로, 그것도 음산하고 엽기적이며 폭력적인 디테일로 덮어씌우는 경우다. 그런 방식으로 그림형제 미담을 '괴물'로 만든 장본인이 있으니 바로 기류 미사오다. 그들이 펴낸 책의 이름은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다. (...) 그들은 말한다. 그림 동화의 숨은 진실이 드디어 드러났노라고. 하지만 나는 말한다. 그것은 그림 동화를 완전히 왜곡한 최악의 망령이었노라고. pp269-272
sheshe.tistory.com/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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