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분의 편지를 읽고 알았다.
권정생 선생이 병고로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얼마나 낫고 싶어 하셨는지,
병 때문에 글 쓸 힘을 못 내는 것을 얼마나 안타까워하셨는지,
이오덕 선생이 얼마나 열심으로 권정생 선생의 책 출판을 위해 뛰어다니셨는지..
아동문학이 정당한 문학적 평가를 받도록 얼마나 열렬히 애쓰셨는지...
두 분은 진짜, 아동문학이 하찮게 여겨지던 시대에
아동문학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다.
정말 존경하는 두 분, 그 분들의 순정한 마음과 부지런하고 고된 발걸음 하나하나를 확인할 수 있는 책.
책에 이현주 목사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재밌다. 이 세 분이 절친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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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사람은 병든 사람의 괴롬을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병든 사람 자신의 고통이며, 어디까지나 그 한 사람만의 불행인 것입니다. 그 불행의 가장 큰 요소는 육신의 병 때문에 정신적인 병까지 앓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성인 문학을 했더라면 벌써 이전에 좌절해 버렸을 겝니다. 동화는 그만큼 저의 정신적 무기가 되어 줍니다. 그러나, 그것도 언제쯤 힘이 다해지면 저도 미치고 말 것입니다.
겨울방학 때는 선생님이 또 와주시리라 기다리겠습니다.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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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종일 누웠다가 이제 일어났습니다. 하루 이틀 무리하고 나면 사흘쯤은 열에 시달려야 됩니다. 열이 오르면 음식 맛이 하나도 없어져요. 먹어야 살기 때문에 굶어서는 안 되지요. 아랫마을 가게에 가서 새끼 명태 백 원어치 사왔습니다. 밥이든, 죽이든 넘어가는 데까지 삼기코 나면 '이제 살았다' 싶습니다.
지독하게도 살아왔다고 생각됩니다. 절대 남 보는 데서는 울지 않습니다. 아픈 척도 않습니다. 아픈 척, 슬픈 척, 해 봤댔자 알아주는 이 없으니까요. 도리어 업신여김받기가 십상이랍니다. 행복한 척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런 사람들이니까요.
병든 사람은 병든 사람만이 위로해줄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만이 도와줄 수 있답니다. 신 김치일망정, 쓴 된장일망정,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를 찾아오는 가난한 이웃들을 저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
제가 돈이 생기게 되면, 건강해진다면, 사회가 알아주는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많은 것을 잃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싫답니다.
각혈을 해가면서도 공부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그 아이도, 저를 떠나가 버릴 것입니다. 가발공장 가 있는 그 애도, 방직공장 가서 나를 위해 새벽마다 교회를 찾아가기도 하고 있다는 그 애도, 아침저녁 찾아와서 보채는 이 많은 제 친구들은 나를 마다하고 떠나가 버릴 것입니다. 선생님, 백번 죽었다 살아난대도, 저는 역시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아이들 곁에 있고 싶습니다. 이대로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p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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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동화 '강아지 똥'을 기독교교육 현상 모집에 응모했을 때도, 제목 때문에 아예 읽어 보지도 않고 밀어 뒀다가, 나중에야 마지못해 읽어 본 것이 뜻밖에도 내용이 좋았다고 했어요. 어느 분이 자기의 작품은 곧 자기 자식과 같다고 했듯이, 저의 '강아지 똥'이 겪은 설움을 생각하니 측은한 생각이 듭니다.
모두 그걸 싫어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요? 우리 아동문학 풍토가 기름지게 되자면 이런 것도 시정되어야 할 거예요. 각자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고 해보세요. '강아지 똥'만큼 한 가치라도 지니고 있는지요?
그리스도는 한 알의 밀알이 되라고 설교했지만, 저는 한 덩어리의 오물(거름)이 되라고 가르치고 싶어요. 선생님께서는 이 제목을 싫어하지 않으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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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동문학은 여러 가지로 초라하기 이를 데 없군요. 원망스럽습니다. 누구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슬프도록 원망스러워집니다.
여름이 지나간다 싶으니, 또 추운 겨울 걱정이 앞섭니다. 시원한 방과 따뜻한 방이 있으면 작품을 좀 더 열심히 쓸 수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납니다.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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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어린이들, 우리가 생각할 땐 모두 사치 풍조에 들떠 있는 것 같은데, 책을 얼마나 읽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겠어요. 저는 일본 사람들에게 뒤떨어지는 것 가장 억울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 한국인은 동화를 쓸 수 있는 기질을 가지지 못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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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한번 가보고 싶어요. 아무 목적도 없이 다만, 움직여보고 싶은 욕심 때문입니다. 병을 앓는 사람도 가만히 있는 것은 싫은 것입니다.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어릴 적부터 좋은 환경, 좋은 교육을 받았다면, 위대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어머니께서 어린 나를 안고 불러주던 노래가 아직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이 애기 뉘집 애기 쓰레기통집 애기"
이래서 끝내 쓰레기 인간이 되고 말았나 봅니다.
정말 우리 집은 아버지께서 주워다 놓은 쓰레기(고물)가 뒤란 처마 밑에 꽉꽉 쌓여 있었습니다. 그 퀴퀴한 곰팡내는 아직도 내 코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식구들 모두가 일터로 간 것이지요. 동경 거리를 쓰는 청소부 아버지, 열두 살짜리 누나도 공장에 나갔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싸움을 했고, 그래서 몸서리쳐지도록 무섭고 지루하고 쓸쓸했던 나날이었습니다.
정말 빈민가의 골목은 망칙한 일들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상급반(4학년 이상)만 되면 벌써 술이 취해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고, 어른들의 못된 흉내를 내었습니다. 누더기를 입은 아이들, 이곳저곳 골목길에서 옷을 벗어 이를 잡는 아주머니들, 전쟁에 시달리던 당시를 회상하면 지금도 땀이 흐릅니다.
선생님, 제가 앞으로도 계속 동화를 쓸 수 있다면 아마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솔직한 글 한번 쓰고 싶습니다. p15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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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는 것도 이젠 웬만큼 견딜 텐데 저는 아직도 훈련이 모자랍니다. 제 몸에 병이 없으면, 고통스럽지 않다면, 이 외로움을 이겨낼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즘 새벽종을 치면 기분이 아주 상쾌합니다. 앞으로도 동화가 쓰일 것입니다.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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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핵이란 질병을 앓으면서 이렇게 외딴 요양원까지 흘러와 살게 된 동기도, 따지고 보면 결국 그 악독한 일제 수난의 연장일 것입니다.
요즘은 이 요양원에 오게 된 것이 무척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 없는 사람들이 기약 없는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직접 보고 듣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니,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특히 집 없는 고아들이 병을 앓게 되는 경우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9개월의 요양 기간이 끝나면 찾아갈 곳이 없어 더욱 절망적입니다.
결핵이란 병은 완치라는 것은 거의 없는 것으로 여기 와서 그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걸리면 일생 동안 병신인 채 살아가야 됩니다. 그 결핵 환자가 우리 한국 인구의 십분의 일이 된다고 하니 놀라운 일입니다.
어제도 고아원에서 한 어린 소녀가 입원했습니다. 나이 열일곱 살이라는데, 아무리 봐도 열두어 살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고통 속에 지친 모습이 우리들 주위에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갈지, 저는 이곳에 와서 더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p183-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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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요양원에서 제가 가장 깊이 느낀 것은 인간은 누구나 다 한 형제라는 것을 재확인했습니다. 한솥의 밥을 먹으며 함께 자고 일어나는 환자들의 생활이야말로 그대로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보호하는 길, 그리고 인간이 고루고루 잘 살려면, 많이 벌어 남을 돕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이 적게 가지는 길이 가장 현명한 짓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앉아서 함께 먹는 식탁은 네 사람입니다. 한가운데 놓인 반찬을 서로 아끼면서 먹다 보면 언제나 남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남는 반찬은 똘래라는 개가 먹습니다. 필요 이외의 것은 절대 가지지 않을 때,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이 없어질 것입니다.
각 곳에서 모여든 환자들의 형편은 전에 뵙고 말씀드렸지만, 거의가 빼앗기면서 생활한 밑바닥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생활을 유지해 가려면 많이 갖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각 사람의 마음 깊이 새겨져야 할 것입니다.
과잉생산이란 과잉 소유욕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 절대 고루고루 잘살기 위한 방법이 아닙니다. 인간이 도대체 '생산'을 한다는 것이 잘못된 말일 것입니다. 생산은 어디까지나 자연이 만들어 낸 소산이며 인간은 다만 수확을 하는 것뿐입니다. 이 수확의 공정성에서 벗어나 많이 갖게 되면 그것은 도둑이며 강도가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많이 가져도 된다는 권리는 누가 베풀어준 것입니까? 하느님이 이 지구를 한자리에 고정시키지 않고 움직여 돌게 한 것은 고루고루 가지게 하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요인이 바로 많이 갖는 과잉 소유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한 그릇 이상의 밥을 먹으면 다른 사람의 몫은 그만큼 줄어드는 것입니다. 내가 넓은 토지를 소유할 때, 내가 큰 집을 가지게 될 때, 내 이웃은 그만큼 좁은 곳으로 쫒겨나야 하는 것입니다.
생산이라는 것, 소유라는 것, 그리고 내 것을 나눠준다는 자선이란 말들이 쓸데없는 빈말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면서 살아온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가진 것을 '준다고' 하지 말고, '되돌려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생산한다는 말은 아예 버리고 '받는다'는 말이 ㄹ옿겠지요.
우리 자신이 햇빛을, 공기를, 물을 생산한다는 사람은 미친 사람일 것입니다.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하늘과 바람과 세계입니다. 절대 천 원짜리 지폐나 하나의 손가방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인간 스스로가 만든 것이지 하느님의 잘못은 절대 아닙니다. p187-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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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악이 승하도록 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우리 주변의 일 아닙니까. 장자같이 살아가는 것은 결과적으로 도피입니다. 우리는 루쉰을 배워야 합니다. 꼭 몇 자 적어 주세요. 저는 그걸 도저히 묵인할 수 없습니다. (이오덕)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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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한 자신, 그리고 무능이 부끄럽습니다. 요양원에서 인편으로 저의 증세를 알려 왔습니다. 조심해서 요양하지 않으면 죽는답니다. 의사는 모두 그렇게 말하는데, 죽지 않으니 어쩝니까?
저에게 가장 필요한 건 지금 '용기' 하나뿐입니다. 독립운동가 박열이 말한 '굵은 조선인'은 저는 못 되는 것 같습니다.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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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는 절대 하나 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일만 송이의 꽃이 각각 그 빛깔과 모양이 다른 꽃들이 만발하여 조화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꽃의 크기가 다르고 모양이 다르고 빛깔이 달라도 그 가치만은 우열이 없는 나라입니다.
월급 적게 받고 많이 받는 것 따위로 문제 삼는 것조차 저는 싫습니다. 다만 일한 노력만큼 대가를 받지 못한 데 대한 문제는 있어야겠지요. 많이 배운 사람은 못 배운 사람보다 생각과 행동이 뛰어나야 할 것입니다. 배운 사람의 가치는 그가 일터에서 앞장서는 데 가치가 있는 것이지 많이 차지하거나 못 배운 사람을 지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르친다는 것은 신념을 불어넣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요. 궁극에 가서는 행동으로 앞장서는 것이 진정한 스승입니다.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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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마리스타에 모인 자리에서도 유독 저만이 혼자라는 고독이 떠나지 않는 이유를 찾아도 분명한 결론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 고독한 것입니까? 단순한 견해와 의견 차이 때문인가, 사회적인 불합리성 때문인가, 아니면 성격 차이, 그리고 나 자신의 독선이, 아니면 인간 본성이 고독한 것인지요?
선생님, 드리고 싶은 말 한이 없겠습니다. 다만 내가 있을 장소는 분명히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둡고 춤고, 누추하고 배고픈 곳, 그런 곳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곁에 있을 땐 외롭지 않으니까요.
어젯밤 너무 뜨뜻한 방에서 자고 나왔더니 그새 바깥엔 눈이 내리고 그리고 바람이 차가웠습니다.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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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지난달엔 꼭 죽어 버리려고 마음먹기도 했지요. 제가 복용하고 있는 마이암부톨이란 약은 극약이래서 1개월 분을 한꺼번에 먹으면 죽을 수 있거든요. 일주일을 고심하다가 결국은 실현시키지 못했습니다.
제가 고통스러운 것은 이런 가난한 이들의 슬픈 사연 때문이 아닙니다. 이런 버림받은 사람들을 착취하며 이용해먹는 상대방 족속들에 대한 분노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억울하게 서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치하는 이들, 종교 지도자라는 이들, 학자라는 이들, 애국자라는 이들은 모이면 돼먹지 않은 비현실적인 농지거리만 하는지 화가 안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방송도, 신문도, 그리고 무슨 무슨 대회라는 것, 한결같이 가난한 인민을 속이는 음모뿐이었습니다. 회가 나도 풀 수 없는 숨막히는 세상, 살아도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만 너무도 고통스럽습니다.
이제는 이 어질고 가난한 농촌에서도 부드럽고 정다운 말씨는 도무지 통하지 않습니다. 아이들도 웃는 표정은 거부합니다. 고함 소리와 표독한 말씨, 욕지거리, 무서운 표정, 을러대는 주먹, 모든 폭력적인 것만을 인정하고, 권위로 알고 복종합니다.
외롭다 못해 두려운 하루하루입니다. 정직과 진실만은 지켜보려 애써 온 저 자신이 불쌍해집니다. 정말 이렇게 오래 울어 본 적도 없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자신을 구할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구태여 남을 위한다는 말, 챙피합니다. 이런 것 묻는 것도 아직 제겐 허황된 사치스런 미련이 남은 탓일까요.
통일, 통일, 통일, 자나깨나 목구멍을 통해 기원했던 그 통일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또다시 일어납니다. 바로 마주 하고 앉은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 벽을 둬야 내가 쓰러지지 않는 이 참혹한 현실인데, 물리적 통일의 그 염원이 허무로밖에 시들어지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
선생님, 아무도 없는 곳에서 머리를 식혀 보고 싶은 것도 도피죄로 적용될까요? 외로운 건, 사람 때문이 아닌데, 사람 때문에 외로우니 어떡합니까? p2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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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보고 있듯이 아동문학을 그렇게 가볍게 취급하고 있으니 주목할 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이나 시를 쓰는 사람들이 여가 선용이나 취미로 하지 않듯이, 우리 아동문학도 온 생애를 바쳐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같이 병들고 무능한 인간이 아닌, 건강하고 역량 있는 작가가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한 편의 동화를 빚어내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뜨거운 작가가 나와야만이, 아동문학이 구원을 받고 또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름을 다 보내고 나니 육체의 고통은 조금 가시어지는 듯합니다.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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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말씀하신 평론도 쓰고 싶고, 그리고 동화도 쓰고, 그런데 잘 안 됩니다. 이젠 글조차 쓰기 전에 좌절부터 생깁니다. 역사를 밝히고, 인간을 살리는 글이라면 평생을 바쳐서 써야 하리라 믿습니다. 건강이 좀 더 나으면 마음껏 한번 쓰고 싶습니다.
오늘은 벌써 밤 11시가 넘었는데 아직 자지 않고 앉아 있습니다.
학교라도 제대로 다닌 사람들, 좀 더 애써서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파헤쳐 이 겨레의 삶의 빛을 제시해 주었으면 좋을 텐데, 참으로 답답합니다. 자나깨나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가슴이 미어지도록 혼자 골똘히 생각하지만 제가 어떻게 무엇을 하겠습니까. 어처구니없게도 모두가 하는 것이 시들하고 우스개같이만 보입니다.
선생님, 삶이란 정말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래라, 저래라, 다스리는 대로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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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앓고 있으면서 마취약 때문에 고통을 잊고 있는 것은 가장 큰 불행입니다. 아동문학인들이 어째서 그토록 현실에 대한 아픔을 잊고 있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보고 "왜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부정적으로만 봤다면 이렇게 살고 있지 못할 것입니다.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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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씀드리지만, 이사 온 집이 참 좋습니다. 따뜻하고, 조용하고, 그리고 마음대로 외로울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생각에 젖을 수 있어요.
어제는 안동에 꼭 한 달 반만에 갔었지요. 이불 꿰매는 바늘 한 개 사고, 팬티 고무 사고, 반창고 하나, 탈지면 한 봉지, 환부 소독약, 그리고 이건 제가 뜻하지도 안 했던 건데, 이불 홑청감을 여섯 마에 3천원 주고 샀어요. (...)
선생님 요즘 항생제를 모두 끊었더니 시력이 많이 좋아지고 머리도 많이 맑아졌습니다.
지금 촛불 켜 놓고 이 편지 쓰고 있습니다. (1983) p28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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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 하셨는데, 저도 세상을 그만두었으면 싶어질 때가 있답니다. 무엇을 성취한다기보다, 그냥 버티는 데까지 버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습니다. (...)
무엇을 해도 항시 두서가 없고, 안정이 안 됩니다. 어지러운 세상이니, 개인의 생활도 어지러울 수밖에 없지요. 혼자 있으니 자유롭다는 것 하나만으로 저는 행복한지도 모릅니다. 창문만 열면 산과 들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나의 집이 있다는 것, 너무 과분하지요.
선생님, 어머니께서 생전에 하시는 말씀이 항상 '사는 데까지 살자' 하셨던 게 많은 위로가 됩니다.
혼자 있으니까 울고 싶을 때 실컷 웁니다.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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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는 환상을 떨쳐 버리지 않는 한, 인간은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행복하다는 사람, 잘산다는 인간들, 선진국, 경제대국 이런 것 모두 야만족의 집단이지 어디 사람다운 사람 있습니까.
어쨌든 저는 앞으로도 슬픈 동화만 쓰겠습니다. 눈물이 없다면 이 세상 살아갈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산다는 것은 눈물투성이입니다. 인간은 한순간도 죄짓지 않고는 목숨이 유지되지 않는데, 어떻게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한 번 웃었을 때, 내 주위의 수많은 목숨이 희생당하고 있었고, 내가 한 번 만족했을 때, 주위의 사물이 뒤틀려 버리고 말았던 것을 어떻게 지나쳐 버릴 수 있겠습니까? 수만 번 되뇌어도 역시 인간은 죄 뭉치에 불과합니다. 이런 죄 덩어리를 어디다 사죄받을 곳이 있겠습니까? 하느님께 용서받는다는 것도 죄입니다. 결국 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는 것도 가증할 지 모르지만 울 수도 없다면 죽어야지요.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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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읽으면 처음에는 장발장의 영웅적 삶에 감동을 받지만, 두 번 세 번 거듭 읽으면 주인공은 멀리 밀려 나가버리고 그늘에 가리었던 참다운 인간이 나타납니다. 악한 테나르디에가 일찍 버린 작은 소년 가브로슈, 누나 에포닌 그리고 5월 봉기에 앞장섰던 아름다운 앙졸라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식물학자 노인, 그들은 이름도 없이 너무도 착하게 살다가 죽어 간 참인간으로 또렷이 가슴에 남습니다. '레미제라블'은 앞으로 열 번을 더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조그맣게 참되게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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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전쟁으로 가장 많이 희생된 것이 어린이들일 것입니다. 제가 어린이를 특별나게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담나 인간으로 태어나서 살다 보니 행과 불행은 결코 어느 한 개인의 운명보다 사회와 국가 나아가서는 우주 자연에 이르기까지 죽이거나 살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사회 구조, 폭력 정치와 강대국이 약소국가에 대한 수탈, 이렇게 자연의 재해보다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세상에서 그 어느 누가 "나만은 인간답게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어린이문화운동은 이런 광범한 인간 세상의 부조리를 바로잡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바른 교육, 건전한 생활환경, 어른들의 이기적이고 편협된 생각으로 어린이를 정신적 불구자로 만드는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보호, 그릇된 종교, 스포츠, 음악, 오락, 식생활 문제는 너무나 많습니다. p335-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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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이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어 더욱 서글퍼집니다. 이 땅의 북쪽에서는 월4만원의 월급으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부러워집니다. 어서 건강해져서 산속 깊은 곳에서 강냉이 심고 가난하게 살 수 있기만 기도하고 있습니다. 참교육도 이런 고약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섬머힐 아이들 같은 인간교육은 아직 까마득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애써 쓰고 있는 동화에 대한 회의도 생깁니다. 아무것도 쓸 수가 없습니다.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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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만나는 게 두려워집니다. 어디서 무엇부터 해 나갈지, 아무도 방법이 없는가 봅니다. 결국 제가 바라던 그런 세상은 오지 않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아무 데도 마음 붙이고 살 수 있는 곳이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세상 어떻게 되어 가는지 끝까지 지켜보아야겠지요.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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