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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시와 소설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 _ 올해 최고의 책

by 릴라~ 2023. 9. 12.

오래 기다렸던 책이 드디어 내 손에 왔다.

도서관에서 항상 대출 중, 예약 중으로 떠서 

책을 손에 받아보기까지 두 달은 넘게 걸린 것 같다. 

그냥 사볼까 하다가, 집에 더이상 책을 놔둘 공간이 없어서 참았는데

걍 사야겠다 하는 찰나에 옆동네 범어도서관에서 책이 도착했다. 

 

소설의 첫문장은 "아버지가 죽었다"로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그림책, 

<무릎딱지>가 생각났다. 어린이 화자가 겪는 어머니의 죽음,

그 상실의 흔적과 순간들이 너무너무 슬퍼서 읽으면서 펑펑 운 책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정신없이 빠져들어 책장을 넘긴다는 점에서는

전자의 책과 비슷하지만, 내용과 분위기는 완전 다르다. 

한때는 지리산 빨치산으로 혁명을 꿈꾸었으나

현실에선 생활 능력이 없는 아버지,

사람들에게 보증 서고 떼이고를 반복하면서도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냐며 사람을 원망할 줄 모르는 아버지에 비해

화자는 현실적이고 냉철하고 이해득실을 따질 줄 아는 딸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계기로 딸은 아버지와의 추억을

하나하나 소환한다.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웃다가도 짠해지고 울컥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화자가 보기에 아버지의 삶은 바보스러울 만큼 순수했기에

그 순수가 우리를 웃음 짓게도 하고, 울컥하게도 한다.

혁명에 관해서는 너무나 진지했지만

일상의 삶에서는 계산을 할 줄 모르고 인간적 결점투성이인

아버지의 삶, 빨갱이 전력 때문에 가족과 원수가 된 이야기들

화자는 찬찬히 그려나간다.

그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데 소설은 반전을 거듭한다.

장례식장, 화자가 잘 몰랐던 이들이 계속 찾아오고

화자가 잘 몰랐던 아버지의 일화가 새롭게 밝혀진다. 

아버지가 맺은 이상한 인연들과 원수가 되었던 가족들이 찾아오면서

장례식은 막을 내린다.

마침내 아버지는 한 줌의 재가 되는데

그때서야 화자는 깨닫는다. 

화자에게 아버지는 빨치산도, 빨갱이도 아닌

한 딸의 아버지였음을. 

 

소설 제목이 '아버지의 해방일지'다.

평등한 세상, 인민의 해방을 꿈꾸었던 아버지. 

아버지는 한때의 빨치산이 아니라 평생을 

자리 자리에서 "오죽하면 사람이 글겄냐' 하며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고 이웃을 이해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생은 그 생을 채운

소소한 일화 전체가 '해방일지'라 할 만하다. 

 

거대한 시대의 비극과 역사의 소용돌이를

현재적 관점에서 소환하고 읽어내면서 동시에

한 평범한 생에 자리한 온갖 애환을 웃고 웃으면서 따라간다는 점에서

위화의 '제7일'을 연상시키는 걸작이다.

책이 자그마해서 장편 치고는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태백산맥이나 토지보다 캐릭터의 입체감이 훨씬 잘 살아나서 좋았다.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참 좋겠다 싶은 작품이다. 

 

한국문학에서 이런 작품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9월 20일, 경북대에서 열리는 '작가와의 만남'이 기대된다.

그 전에 정지아 작가의 90년대 작 '빨치산의 딸'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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