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많은 글을 써온 것이 아닌데도 가끔 '나'라는 일인칭에 질릴 때가 있다. 가끔 '나'에서 벗어나 다른 시점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글쓰기는 일상을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인데 이야기를 전개하는 이 '나'란 놈이 너무 뻔해서 글을 쓸 의욕을 잃을 때다. 다른 자아를 내 안에 불러오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정지아 작가의 작품은 반대다. '빨치산의 딸'이었던 작가의 삶 자체가 워낙 풍부한 스토리가 많고 특별해서였을까. 9편의 단편 중에서 저자의 자전적 목소리가 담긴 세 작품, <자본주의의 적,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 검은 방>은 매우 잘 읽혔는데, 다른 작품은 위의 세 작품만 못했다. 위의 세 작품이 워낙 뛰어나서였을 수도 있지만. '나'가 드러나는 작품들이 훨씬 캐릭터가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다. 나도 모르게 어쩌나, 어쩌나 애가 달아하기도 하고, 읽다가 멈추고 폭소를 터뜨기도 하고, 그렇게 빠져들어 읽었다. 그 안에 담긴 주제 의식 또한 예사롭지 않았고.
최근작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반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고 있는 중인데 단편 '자본주의의 적'은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능가할 만큼 단단하고 울림이 있는 작품이었다. 소설의 힘은 역시 캐릭터의 힘이구나, 다시금 느꼈다
자본주의의 적,, 이라는 거창한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혁명가들, 사회주의자들? 소설에는 의외의 인물이 등장한다. 꿈도 없고 의지도 박약하고 소심하기 이를 데 없고 자신을 조금도 내세우지 못하며, 그저 소리 없이 살아가는 인물. 화자의 친구 '방현남'이다. 대학 때 같은 과에서 처음 만나 방현남과 친구가 된 화자는 자주 그녀를 답답해 하고 속 터져 하면서 그녀와 대학 시절을 보내고, 이후에도 죽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내성적인 사람은 많지만 방현남의 가장 큰 특징은 욕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에겐 사람들 무리에 세상에 적응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너무 큰 과제였기에 다른 욕망은 언감생신이다. 방현남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노동 운동을 하다가 노동자로 눌러 앉아 취미로 '자본론'을 읽는 그녀의 남편도, 사회성이 한참 부족한 그녀의 아이들도 하나같이 욕심이라곤 없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적응하는 것 자체가 너무 벅찼기에 이 세상에서 그저 별탈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감격하기도 한다. '자폐가족'은 그렇게 있는 듯이 없는 듯이 그들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화자가 묘사하는 현남 가족의 삶을 계속 따라가노라면 이들로부터 뭔가 숭고함에 가까운 감정이 들기 시작한다. 독자들도 현남을 화자와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바보처럼 보이는 그 가족들이 어쩌면 모두가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아귀다툼으로 점철된 이 세상이 폭발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이 지구는 어쩌면 그런 사람들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귀족이나 부자가 아니더라도 소비사회를 살아가는 대중은 어느 정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전까지 인류 역사에서 대다수의 민중은 현남의 가족처럼 살았다. 욕망은 그들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삶을 영위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과제였고 그것에 만족했다. 고된 삶이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숭고한 삶이기도 했다. 욕심이 없다는 것이 고결하게 느껴질 만큼 우리는 욕망과 경쟁의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화자는 현남의 가족을 가리켜 말한다. 욕망이 없는 이들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적이 아니겠느냐고. "인류의 쉼표"가 아니겠느냐고. 모두가 추구하기 바쁜, 아니 이미 우리의 눈을 멀게 한 자본주의적 욕망의 본질을 가만히 되묻게 되는 수작이다.
다 읽고 나서 세계적 베스트셀러 <좀머씨 이야기>가 떠올랐는데 나는 정지아의 작품이 훨씬 좋다. 제목을 '자본주의의 적'이 아니라 좀 더 부드럽게 붙였으면 더 좋았을 듯하다.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은 배꼽 잡으면서 읽었다. 수필처럼 느껴질 만큼 현실감 짱짱이다. 여러 재미있고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송씨 아주머니가 제일 웃겼다. ㅎㅎ
'검은 방'은 그녀의 어머니를 모티브로 한 것 같다. 생의 비애가 잔잔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짧은 이야기 속에 긴 시간과 삶의 역사가 교차하는 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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