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풍족한 시대에
사람들은 가장 불만이 많고 참을성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상식적이라면 민원 사항에 해당하지 않는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 진상 짓을 하는 사람은 왜 그렇게 많아진 걸까.
이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일본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는 이미 이천년 대 초반부터 그걸 겪어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흐름은 전세계적이라는 것, 그중에서 일본과 한국 사회는 특히나
매우 비슷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대상 상실'이다.
현대인들이 가장 취약한 것이 대상 상실이다.
이 대상 상실에는 죽음과 같은 큰 상처만 자리하는 게 아니다.
현대인들은 유아기적 만능감, 환상 속에 구축된 자기 이미지의
상실을 못 견뎌한다.
다시 말해서 현실과 소망이 괴리되는 상황에서
적절한 단념과 포기를 할 줄 모르고
자기가 생각한 자기 이미지, 자기애에 대한 집착을
끝내 내려놓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이 부모가 되었을 때
주위에서 익숙하게 보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들은 내면에 자기 나름의 완벽한 부모상과 아이상을 갖고 있어서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아이의 부족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기가 갖고 있는 부모와 아이의 이미지가 깨어지고
자기애가 상처 입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그 탓을 외부로만 돌린다.
학교나 교사를 공격하는 것이다.
자기 욕망으로 구축된 그 이미지는
순수하게 자기다운 무엇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라캉이 말했듯이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후천적으로 만들어가는 존재다.
다른 사람들과 환경으로부터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그 욕망은 계속 조절하고 수정하고 타협할 여지가 충분한데,
현대인들은 그 욕망을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
자기다움의 상당 부분은 사회와 집단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인데
오직 자유로운 개인이 그것을 완수해야 한다는 현대 사회의 분위기 또한
괴물 부모와 진상인을 만드는 것에 한 몫 한다.
육아의 책임이 공동체에서 부모로 이동하면서
그 무거운 책임감이 끊임없이 남탓을 하는 몬스터 페어런트를 만든다는 것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례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느끼는 문제점을
조목조목 원인을 밝혀 설명해주는 책이다.
한 쪽도 버릴 게 없을 만큼 알찬 내용이었다.
읽으면서 대중이 생각하는 '자유'의 개념이
너무 협소하다고 느꼈다.
공동체에 참여하고 발언할 권리는 어디로 가고
오직 개인적 욕망 추구만 남은 것 같다.
한 개인의 독창성, 오리지날러티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성격, 기질, 취향, 가치관 등은 조금씩 버전이 다르지만
그렇게 독창성이 있지 않다. 개인의 고유성은 존재 자체에 함의된 개념이지
표면적인 개성이나 차이를 추구한다고 해서 그리 오리지날러티가 생기지 않는다.
오리지날러티는 예술 작품, 저술이나 철학, 사상 등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논의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본다.
'인류가 꿈꾸던 유토피아의 다른 얼굴'을
제대로 조우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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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정신 분석학자 라캉은 "인간의 욕망이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말했다. 분명 우리는 부모, 조부모, 형제자매, 교사나 친구 등 다양한 타자의 욕망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스스로 욕망하는 존재가 된다. 인간의 삶이란 타자의 욕망을 짊어지고 달리는 길인 셈이다.
그 가운데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나는 타자이며 자신을 보살펴주는 양육자이기도 한 부모, 특히 어머니의 욕망이다. 아이는 어머니라는 타자의 시선을 우선 의식하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노력한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때 어머니가 좋아하는지 반응을 학습한 다음 그 모습을 늘 염두에 두고 어머니의 가치관을 자신의 내면에 각인시켜 기대에 부응하는 행동을 취하고자 한다.
옛날처럼 대가족 속에서 자라난다면 아이는 다수의 타자에 둘러싸여 필연적으로 다양한 타자의 욕망을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핵가족화와 출산율 저하가 일반적이며 아버지의 존재감까지 희박해지고 있는 요즘, 아이는 가장 가까운 어머니의 욕망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경향이 짙다. p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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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원인은 아이가 상처 입지 않는 것을 가장 우선시하는 교육 방식이다. 사회가 현대화되며 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실패하지 않도록 보살피는 양육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 튀어나온 돌부리에 아이가 걸려 넘어질까 봐 부모나 교사가 앞장서서 돌부리를 모조리 제거한다. 과잉보호, 과잉간섭이다. (...)
(핀란드에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컬링 페어런트란 컬링 선수처럼 아이의 앞길에 놓인 장애물을 모두 제거하는 부모를 말한다. 아이에게서 힘든 과정이나 위험한 장벽 또한 인생의 일부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터득할 기회를 빼앗는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신조어다. p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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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보호형 어머니들 중에는 아이가 성장하고 자립하면서 자신을 떠날까 봐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 이들은 자식을 조절할 수 있는 대상으로 머무르게 하고 싶은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식을 배려한다', '자식을 돕고 있다' 등의 명분을 덧씌워 그야말로 비단으로 목을 조르듯이 자신의 간섭과 통제에 자식이 서서히 익숙해지게 만든다. (...) 부모가 자식을 지나치게 관리, 조절하려 하는 이유는 자신의 대상 상실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대상 상실을 올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니 그들에게서 자라난 어린이와 젊은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p5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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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상상과 현실은 일치하지 않는다. 상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상상했던 이미지에 조금씩이라도 가까워지도록 노력해 현재 자신이 처한 위치를 바꿔 가거나, 이상으로 삼았던 이미지 자체를 조금씩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두 선택지를 절충해 자신을 단련하면서도 일정한 시점에서 타협할 수도 있다.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후자의 선택지, 즉 조금씩 포기하고 단념하면서 현실에 적응해 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도저히 포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는 대신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할 뿐이다.
이것 역시 자기애적 이미지와 현재 자신의 괴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숙 거부의 한 단면이다. "너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환상을 심어주고, 좌절이나 실패 등의 대상 상실을 경험하지 않게 보호해주는 방식의 교육이 가혹한 현실 사회를 견디지 못하는 어른을 낳고 있는 것이다. p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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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나 학교에 부당한 요구를 하는 학부모들의 심리에는 자기 자식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교사나 학교에 책임을 전가하려는 회피적 성향이 도사리고 있다. '성적도 좋고 학원 공부도 열심히 하며 친구와도 잘 지내고 선생님의 평가도 좋은' 이상적인 모습을 아이에게 투영한 '퍼펙트 차일드'의 이미지를 잃고 싶지 않은 욕망 때문이다. (...)
퍼펙트 페어런트를 지향하는 부모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퍼펙트 차일드라는 '대상'이다. 그것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상적인 자식의 이미지와 현실의 자식의 모습 사이에 괴리가 느껴지면 아이의 행동이나 부모의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대신 모든 것을 교사나 학교 탓으로 돌리고 학교를 찾아가 소란을 피운다. 퍼펙트 차일드의 이미지가 상처를 입었을 때 타격을 받는 것은 '내 아이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부모, 즉 자신의 자기애이기 때문이다. p8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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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대에) 일부 부유층이나 인텔리 계층 중에는 예절 교육이 엄격한 가정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정에서 예의범절을 엄하게 가르치는 것이 결코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평균 수명이 훨씬 짧았기 때문에 어려서 부모를 잃는 아이들이 많았다. 모두들 먹고 살기 힘겨웠고 여성도 귀중한 노동력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현재의 전업주부들처럼 육아에 전념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예의범절을 가르쳤을까? 바로 또래 집단과 친척, 이웃 등 주위 사람을 포함한 대형 네트워크였다.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타이르고 꾸짖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은 대가족 안의 조부모나 친척 어른들, 혹은 이웃의 엄한 어른들이었다. 인격 형성의 과정에서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은 친부모만이 아니었다. 주위 어른이나 선배, 동료 등 소위 공동체가 다 같이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기능을 최초로 상실한 것은 지역 공동체였다. 고도 경제 성장기에 성공을 꿈꾸는 많은 젊은이들이 진학과 취직을 위해 마을에서 도시로 '탈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보내던 생활 방식이 변하면서 마을의 법칙이나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더 이상 개인의 행동에 구속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p8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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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전체가 풍요로워지고 편리한 가전제품이 보급되었기 때문에 부모에게 아이의 교육이나 훈육에 관심을 기울일 만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 전업주부의 경우에는 자녀를 어떻게 키웠는지의 여부로 그 자격과 인격을 평가받는 분위기마저 형성됐다. (...)
하지만 가정이 교육의 중심이라는 인식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부모가 과도하게 자녀의 교육에 나서기 시작했다는 것, 그 때문에 여러가지 부작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표적인 부작용이 아동 학대다. 부모가 육아 책임을 단독으로 떠맡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자녀에 대한 학대가 증가하고 있다. p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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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본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다. 개인이 각자 원하는 방식의 인생을 선택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워 일반 대중들도 어느 정도 물질적인 충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런데 구속 없는 자유 사회 안에서 오히려 남의 탓을 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자유, 정신 해방, 개인의 자주성과 자발성이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 왜 책임 전가형 인간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일까? (...)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자신의 인생을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의식이 더욱 고조되었다. 사회 각 부분의 규범은 갈수록 그 힘을 잃어갔다. 학교의 권위가 떨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꽃을 피워야 한다'는 말이 경전처럼 받들어졌고 자기 실현이 끝없이 강조되었다. 나다운 것을 탐구하며 자아를 찾는 여행을 떠나는 젊은이가 급증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이런 삶의 방식이 옳고 그른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유롭게 자신의 꽃을 피우며' 살기를 선택한 개인은 필연적으로 불안정해진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외부로부터의 규율을 거부하면 외부에서 그 사람의 행동을 규정하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사람은 자기 자신의 규범을 스스로 만들어 내야만 하는데 이러한 내적 규범은 졸속 작업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한편에서는 스스로 규범을 만들어 '나답게' 살아가는 것을 지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영원희 희구하게 되었다.
자신의 처지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각자 자기 식으로 인생을 헤쳐 나간다는 것은 분명 멋진 이념이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규범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구조화하고 있던 모든 동일성을 서서히 벗겨내는 일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옛 일본의 경우 남성은 나라와 회사를 위해, 여성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 외부로부터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완수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역할 분담이 명확했던 시대인 만큼 주어진 역할에 대한 중압감과 부담은 무거웠을 것이다. 주어진 역할과 원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아 괴로워하는 사람 역시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완수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측면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외부의 규범으로부터 '해방'되어 감에 따라 바깥쪽의 역할 동일성이 양파 껍질처럼 하나씩 벗겨지면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자신의 안쪽을 마주하게 된다. 그곳은 대체로 텅 비어 있으며 이제까지 본 적도, 인식해 본 적도 없는 공간이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동일성의 위기에 빠져 혼란스러워 한다. 이것이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다. p1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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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인간의 욕망이란 타자의 욕망"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욕망은 어짜피 다른 누군가의 욕망을 받아들여 흉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 기본 원칙을 잊고 '자신을 꽃 피우'라는 말에 휩쓸렸다. 그러던 중 나다움, 자기실현, 자아 찾기를 좇으며 치닫던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나'라는 것에 지쳐 버렸다. 뒤이어 따라오는 허탈함을 견디지 못하고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실현해야 할 자기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인을 원망함으로써 공허감을 채우려 하고 있다. 결국 우울증과 남의 탓은 동전의 앞뒷면이고, 신형 우울증의 증가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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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 즉 단념이 쇠퇴한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환상이 요란하게 선전된다. 당연히 자기애적인 만능감도 커진다. 그러나 얄궂게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환상이 주어진 순간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지는 않다는 현실에 직면하고 극심한 내적 혼란에 시달리게 된다. 포기 없는 인생은 현실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직업적 자유가 보장된다고 해도 누구나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비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해도 누구나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 괴리에 직면하고 우울을 느끼게 된다.
외부의 규범으로부터 해방되어 모든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게 된 것도 우울의 원인 중 하나다. 자유를 선택한 사람은 자유에 따르는 책임도 짊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적지만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중압감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이 중압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책임을 전가하려는 전형적인 사람들이 몬스터 페어런트다. 육아를 단독으로 떠맞게 된 부모가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잘못된 결과의 원인을 교사나 학교 탓으로 돌리는 행태다.
사람들은 여러 사회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누구에게나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환상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자유에는 책임이라는 무게가 따른다.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서로 남의 탓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책임 전가 성향'도 사회적, 시대적 질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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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약물이든 합법 약물이든 약물 의존의 배경에 있는 것은 자신의 정신적 내면을 가공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개척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리고 그 욕망은 우울증의 병리 현상과 한 쌍을 이룬다. 우울증이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자각을 견디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라고 한다면 의존증은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는' 자신으로부터 손쉽게 벗어나려는 병리이다. 우울증과 의존증이 동시에 늘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능과 불가능을 가르는 한계에 직면했을 때 포기를 하지 못해 기분이 울적해지는 현상이 우울증이다. 이 한계를 약물의 힘을 빌려서라도 뛰어넘어 포기를 회피하려는 움직임이 의존증이다.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하는, 마음껏 행동하지 못하는, 마음껏 결단하지 못하는,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부족한 자신에게서 벗어나 '되고 싶은' 자신이 되어 자기애적 만능감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다양한 약물에 의존한다.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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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인간에게 고뇌는 있게 마련이다. '대상 상실'을 한 번도 조우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인생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 그림자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도 이러한 마음의 고뇌를 지우고 싶다는 욕망에 술이나 약물에 의존하고 만다.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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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 지역, 학교, 회사 등 집단과 개인의 연대감은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다. 집단과의 연대감이나 그에 동반된 갈등을 피하려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개인이 제각기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인생을 만들어나가며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박에 없게 되었다. 끊임없는 불확실성에 직면하면서 말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누구나 당연히 더 쉽게 상처를 받는다. 자기 책임이 부과되는 사회는 각자에게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하여 행동할 능력이 있다는 전제 아래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 능력이 부족하면 불안과 무력감 속에서 괴로워하게 된다.
인생에 자기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실패할 경우에도 그 책임을 오로지 혼자 떠안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낙오자의 위치로 떨어지는 것은 자신의 노력과 능력이 부족했다는 뜻이 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상처가 남지 않을 수는 없다.
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기애를 보완하기 위해 의존 대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p14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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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는 이상 포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포기를 외면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개발되었다는 선전도 넘쳐나니 예전 같으면 포기를 받아들였을 사람들도 포기를 거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한편에서는 비대해진 자기애적 만능감을 끌어안고 놓으려 하지 않는 성숙 거부가, 다른 한편에서는 의존증이 급증하고 있다. 당연한 귀결이다. 자기애적인 만능감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 이상의 노력과 고뇌를 받아들일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런 각오를 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약물의 향상 효과에 의존해 만능감을 유지하려는 사람들만 늘어났다.
성과주의, 자기 책임, 자발성 등을 새로운 미덕으로 여기게 된 치열한 경쟁 사회가 이 수많은 성숙 거부자들을 만들었다. 이렇게 약물은 개인의 도핑제로서 사용되고 의존증은 시대적 병이 되었다.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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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자식의 문제를 이성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앞에서도 설명했듯 부모의 이상형을 투영한 자녀의 이미지가 무너지는 데 대한 불안에서 나온다. 부모와 자식의 일체감이 강하면 강할수록 대상 상실에 대한 불안은 더 커진다. 아이의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부모 자신이 만들어 놓은 완벽한 부모의 이미지가 손상을 입게 되므로 항상 자신의 영역 바깥에서 잘못의 이유를 찾는다.
자신의 문제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자신의 '내재된 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뜻이다. 거기에 바로 성숙 거부의 본질이 있다. 결국 그만큼 자기애적 만능감을 상실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크다는 이야기다.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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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내재된 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든 것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성향이 극단에 이르렀을 때 벌어질 수 있는 궁극의 범죄가 '묻지 마 살인'이다. (...)
책임을 전가하는 이유는 앞에서 반복해 설명했듯 '이것밖에 안 되는' 자기 자신과 '더 잘할 수 있는 상상 속의 자신' 사이의 괴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상 속의 자신은 유아적인 만능감을 반영하며 계속 자라나지만 그에 비해 현실의 자신은 보잘 것 없기 때문에 괴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커진다. 괴리가 커지면서 불만과 증오도 점점 커진다.
사춘기나 청년기에는 자기애적 만능감과 자기 평가의 괴리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그 시기는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부를 정도로 불안정하다. 그 시기를 거쳐 어른이 된다는 것은 과대평가하던 자신의 이미지를 상실해가는 포기의 과정이다. 가토와 같은 무차별 살상범은 그 과정을 고집스럽게 거부하고, 괴리가 발생한 이유를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다. (...) 자기애가 강할수록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부정적인 부분을 더 강하게 배제하려 하기 때문에 투영이 일어나기도 쉬워진다. p176-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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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자기애로 인한 성숙 거부에서 비롯되는 범죄는 무차별 살인만이 아니다.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을 끈질기에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스토킹 역시 그 중 하나다. 스토커들은 타인의 거절을 아예 없었던 일로 여기거나 혹은 '좋으면서 튕긴다'는 식으로 왜곡해서 받아들인다. 거절에 의한 자기 평가의 추락을 반복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자기애적 만능감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애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공격하고 파괴하며 사회 규범의 가치 자체를 깡그리 무시하는 행위가 비행이나 범죄로 나타난다. 그 궁극적인 형태가 무차별 살인이다. 묻지 마 살인은 사회 전체에 만연한 성숙 거부를 확대하여 반영한 비극이다.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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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상실, 즉 거세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거세 불안은 욕망의 뒤편에 늘 감돌고 있다가 일상생활 여기저기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거세 불안을 느끼는 정도는 남녀 사이에 차이가 있다. 이것은 남녀의 해부학적인 차이가 미치는 심리적 영향 땜누으로 보인다. (...) 여자 아이는 남성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땜누에 자신이 이미 거세를 당했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에 비해 남자아이는 여성이 이미 거세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순간부터 성기를 잃을 가능성, 즉 거세의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프로이트의 설에 따르자면 거세 불안 때문에 남성은 여성보다 자기애의 상처에 민감하다. 남성기는 자기애적 만능감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
요컨대 남성은 남성의 상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상징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 거세 불안 때문에 남성은 대상 상실에 대해서 여성보다 훨씬 민감하며 자기애의 상처에 대해서도 과민하게 반응한다. p19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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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독신주의 성향과 만혼이 사회 문제로 거론되기 시작한 지도 오래 되었다. 결혼과 출산을 언제 어떻게 하느냐는 개인의 사생활 영역이지만 사회 구성원 재생산에 밀접하게 연결된 문제인 만큼 특정 경향성이 뚜렷해지면 사회 문제로 대두될 수밖에 없다. 청년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1차적 원인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닐 것이다. 특히 남성의 경우 어머니를 단념하는 대상 상실 과정을 제대로 겪지 않으면 어머니 이외의 이성을 사랑하기 어렵다는 원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p19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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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 사회는 어른이 되지 못한 '몸만 큰 어른'들로 가득 차게 되었을까? (...) 어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대상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상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포기와 단념을 하지 못하고 자기애적 이미지에 대한 집착을 멈추지도 못하며 현실의 자신과 적절히 타협하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대상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인생 최대의 대상 상실인 죽음을 조우할 기회가 줄었다는 점을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
오늘날 사람들은 의학의 진보가 주는 혜택을 듬뿍 받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혜택이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심을 높였다. 죽음을 비롯한 대상 상실에 대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증가시키는 원인도 되었다. 어떠한 변화에든 좋은 면과 나쁜 면이 함께 따르기 마련이다. 부작용 없는 약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p20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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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뿐 아니라 고통이나 불쾌감, 고뇌나 갈등도 될 수 있는 한 배제하려고 한다.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사회적인 분위기가 되다 보니 힘든 일에 부딪히면 '나만 힘든 일을 당한다'며 피해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났다. (...)
이래서는 자연스럽게 대상 상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고통이나 갈등을 느끼는 것이 예외적인 현상처럼 치부되기 때문이다.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에서 괴로움은 곧 소외감을 불러온다. 대상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차선책으로 자기 방이라는 안전지대로 도피하거나 자신의 괴로움을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술이나 약물에 빠지게 된다.
고통, 불쾌감, 고뇌나 갈등이 없으면 편안할 것 같지만 무균실 같은 인생에서 대상 상실에 대한 면역력을 더더욱 저하된다. 설상가상으로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계속 들려온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누구에게나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환상을 계속 부풀리는 소비 사회다. 소비 사회는 그 자체로 존속하기 위해 대중의 욕망을 끝없이 자극한다.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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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인류가 원하던 사회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라는 슬픈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규범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사회, 돈만 있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는 풍요로운 사회. 그런 인류 전반의 욕망을 실현시키고 나서 보니 사회 전체에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 사람들이 내면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까다로운 부작용이 나타났을 뿐이다.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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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아기 때부터 사람의 마음 안쪽에는 다양한 정동이 자리 잡고, 조금씩 나이가 들며 그 중 몇 가지를 선택해 포기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여러 가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포기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한다. 아이가 고민한다는 것은 제대로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유아 때부터 욕망을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이제까지의 평범한 성장 단계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도 포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최근 눈에 띄게 늘었다. 포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고민과 갈등을 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정신과 의사로서 매일 이러한 문제를 접하고 있으면 단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어른은 물론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필요하다면 포기를 배울 수 있도록 부모가 이끌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은 고민과 갈등을 하는 존재'라는 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포기에는 반드시 고민과 갈등이 따르기 때문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부연해 두지만 필자는 '포기하라'거나 혹은 '꿈을 가지지 말라'고 주장한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에서, 특히 젊은 시절에는 꿈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
그러나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기 전에 그에 따르는 거듭된 노력과 끊임없는 고뇌, 실패했을 때 닥칠 절망도 받아들일 각오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각오 없이 포기하지 않겠다는 막연한 투지만 불태우는 것은 자기애적 이미지만 키우는 일이고, 자기애적 이미지가 과장될수록 현실의 자신과 타협하기 어려워진다.
만약 그만한 각오를 가질 수 없다면 자신이 지나치게 괴로워지기 전의 어느 시점에서 포기와 단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다. 필자는 그런 의미에서 때로는 포기도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해도 잘 되지 않을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옛날부터 실패한 사람이나 패배한 사람에게 "운이 없었다"라는 말을 위로처럼 건네는 데는 이유가 있다. 현실에는 노력이나 열정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 있기 땜누이다.
사람은 포기를 깨우치고 자기 자신의 패배나 실수와 같은 대상 상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패자에 대한 배려나 약자에 대한 공감을 배울 수 있다. 이룰 수 없는 과대망상을 좇는 대신 현실에 기반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노력할 수 있다. 어른스러움이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을 객관적으로 구분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에 눈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기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p227-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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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의 축적에 의해 아이는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현실을 배워나간다. (...)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다. 아이를 아무 조건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말을 잘 듣든 고집을 부리든 상관없이 부모는 항상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을 아이가 느끼게 해주어야 하고 아이를 아이라는 존재 자체로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아이를 전체 대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제 조건을 잊고 포기만 강요하면 학대에 가까운 훈육이 되어버린다.
최근 부모 자식 관계를 보면 두 대상이 거꾸로 되어 있는 것 같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라"는 조언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탓인지 아이의 욕망을 마냥 받아 주면서 포기를 모르는 막무가내로 키우는 부모들이 있는 한편, 공부를 열심히 하고 착하게 행동하면 사랑해 주겠다는 식의 조건부 사랑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부모도 많다.
이런 부모는 착한 아이, 즉 착한 대상밖에 사랑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아이를 부분 대상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기가 어머니의 유방을 전체 대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성숙 거부의 증상이다.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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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반항기도 늦지 않게 찾아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
부모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은 부모의 욕망을 잘 알아채고 자신의 행동을 그 틀에 잘 맞춘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 부모의 꼭두각시처럼 되어 자신의 욕망을 아예 잃어버린 아이도 있다. 자신만의 욕망이 없으니 당연히 반항도 없다.
그러나 억압하고 있던 것은 언젠가 반드시 튀어나온다. 섭식 장애, 가정 폭력, 등교 거부, 출근 거부 등등 모두가 억압당하고 있던 욕망의 발현이다. 뒤늦게 튀어나오는 만큼 치료도 까다롭다. 유아기의 보편적인 문제는 유아기에 겪어야 하고, 사춘기의 보편적인 문제는 사춘기에 겪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반항하지 않는 아이가 늘고 있다는 이야기를 최근에 자주 듣는다. 부모 측의 억압이 강한 것인지 아이의 자립 의향이 약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둘 모두가 원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항하는 아이는 줄었을지언정 성인이 되고 회사에 취직한 뒤 은둔형 외톨이가 되거나 부모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청년은 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억압된 욕망을 뒤늦게 폭발시키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 아닐까 짐작한다. p22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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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고통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자신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실패와 좌절을 극복하는 체험 자체가 삶에 있어서의 자신감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실패를 밑바탕으로 한 과장 없는 자신감이 갖춰졌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마주하고 실현 가능성이 전제된 노력을 할 수 있다.
물론 지나치게 이른 시기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좌절을 겪는 것은 앞으로의 성장에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다. 따라서 어린 나이에는 치명적인 대상 상실을 겪지 않도록 주변 어른들이 도와줘야 한다. 그러나 그 시기를 지난 다음에는 아이 스스로 좌절과 재기를 반복할 수 있도록 손을 놓고 지켜봐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p22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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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많이 한다고 해서 무조건 저향력이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실패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연습을 반복해야 한다.
1. 실패의 원인을 외부(타인이나 환경)에서 찾지 않는다.
2. 먼저 자신이 조정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실패의 원인을 분석한다.
3. 스스로 일어선다.
이때 자기 힘만으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필요도 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고 있는 이유는 모든 것을 혼자 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
단 실패했을 때 남의 탓을 하지 말라는 말은 실패가 온전히 개인의 탓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한 개인이 실패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대 필요한 조언일 뿐이며 사회 그 자체에 통용되는 내용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 사람은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스스로 추스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아픔을 개인적으로 치유하고 외부 환경의 개선이나 변화를 바라지 말라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다. 개인이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자신을 둘러싼 외부 사회가 어떻게 변해야 할지도 판단할 수 있다. 그저 현실 도피를 위해 책임을 전가하는 데서 벗어나 현실 개선을 위해 움직이기 위해서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중요하다. (...)
한 번이라도 넘어지면 패배자의 낙인을 찍고 두 번 다시 재기할 수 없는 것처럼 말하는 사회에서는 실패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증폭된다. (...)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의 노선에서 한 번이라도 벗어나면 돌아오기가 어려운 현재의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실패를 향한 두려움을 낮추기 위해서는 패자 부활이 가능한 사회를 구축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p235-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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