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동안 주말마다 아기 탄생을 기리는 구유가 나를 맞이했다. 이천 년 전 사건의 당사자는 마리아와 요셉, 동방박사 뿐이지만, 온 세상이 한 아기의 탄생을 지켜보고 기뻐한다는 함의가 담겨 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생명의 탄생 그 자체를 축하하는 의미로, 또 우리 삶도 새로워질 수 있다는 기쁨으로 확장된다. 이 시기면 늘 우리 삶에도 밝고 좋은 것들이 탄생하기를 잠깐이지만 소망하게 된다.
우리들의 365일, 평범한 일과는 대부분 일과 휴식으로 채워져 있다. 일이 고된 만큼 그 보상을 위한 휴식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쾌락적인 소비로 채워질 때가 많다. 일과 휴식 너머, 삶의 본질적 가치랄까, 의미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때때로 찾아오는 여유는 스마트폰이 모조리 실종시켜 버린다. 이런 시대에 종교의 가치는 세속의 시간을 잠시 멈추어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일도 아니고 휴식도 아닌, 어떤 의미에선 휴식 이상의 휴식이다.
일주일에 한 시간, 미사 참례가 귀찮고 의미를 못 느낀 시절도 꽤 길었다. 딱히 강제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빠지다보면 귀찮아 계속 빠지게 된다. 바쁜 일이 계속 몰아치다보면, 그 한 시간이 비생산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독서할 시간도 부족하므로 집에서 책 보는 게 시간을 더 낫게 쓰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바로 그 '비생산성'에 종교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
여행이나 독서도 일상을 어느 정도 멈추어주고 지친 심신을 회복시켜준다. 여행은 물리적으로 다른 장소에 나를 보내는 과정이고 독서는 정신적으로 다른 시공간을 유람하는 일이다. 나만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타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소중한 기회를 준다. 하지만 여행과 독서는 '나'라는 행위의 주체가 살아있어야 그 활동을 잘 영위할 수 있다. 여행과 독서는 나의 세계로 제한된 우리의 좁은 주체성을 타자를 포괄하는 더 넓은 주체성으로 확장시켜주지만, 여전히 주체성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노동이 고객의 요구를 맞추는 과정이라 볼 때, 어쩌면 여행과 독서는 이 시대에 가장 주체적인 활동일 것이다. 여행과 독서는 좀 더 사려 깊으면서 편협하지 않은 주체성을 형성한다. 하지만 '나'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한다.
때로 우리는 내 것으로 여겼던 생각과 감정을 완전히 내려놓을 때 가장 깊고 풍부한 자신을 만나게 된다. 명상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미사 참례는 개인적 명상이 아니라 공동체의 명상이다. 이것의 최고 장점은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나를 전적으로 내려놓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다(여행지에서 그랬다가는 사기를 당하거나 일정 진행이 안 될 것이다). 온전한 쉼이다.
일상을 멈춘다는 것은 일상에서 반복되는 생각과 감정을 멈춘다는 것이다. 미사 시간은 그런 일상의 멈춤을 허락한다. 편안하고 안전하게. 기도와 아름다운 성가와 더불어. 그렇게 일상에서 반복되는 생각과 감정을 잠시 리셋할 때, 비로소 다른 메시지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삶에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이 바뀐다. 처음에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계속 불어오는 바람은 우리가 탄 배를 다른 곳에 닿게 한다. 루틴은 삶에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한 번은 표가 안 나지만 지속되면 삶이라는 항해의 내용은 완전히 달라진다.
오가는 시간까지 한 시간 반 정도 미사 참례가 전부지만, 그 시간이 있어 나를 내려놓고, 삶에 불어오는 다른 바람을 느낀다. 집 바로 근처에 성당이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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