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외국 영화에 나오는 학생들은 명찰을 달고 있지 않을까. 책에 등장하는 학생은 이렇게 질문한 뒤 답한다. 서로 이름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명찰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요즘 아이들의 심리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지금 어른들은 다수 학급에서 익명의 상태로 지내는 게 익숙했지만, 요즘 아이들은 반대다. 잘하는 몇 명과 말썽꾼 몇 명만 알아주는 학교에서 종일 존재감 없이 지내는 게 고역이며 무의미하다 느낀다. 요즘 아이들에겐 '존재감'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다.
후루룩 읽었지만, 종일 사춘기 아이들과 생활하면서도 내가 놓치고 있었거나, 느낌은 있어도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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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사춘기 아이들의 방황 또는 반항의 원인을 외로움이란 측면에서 봅니다. 요즘 아이들은 일상적으로 집에서 대화할 형제자매가 없고, 부모와의 대화는 어렵고, 함께할 가족이나 친구, 친척이 현저히 줄어든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최고의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코로나는 그 외로움을 몇 배 더 가혹한 고통으로 만들었고, 그 비명이 지금 학교 현장이나 지역 사회에서 다양하게 분출되고 있습니다. 학교 폭력, 은둔형 외톨이, 포기와 무기력, 우울, 자해 및 자살... 등등.
저는 그중에서도 사춘기 아이들의 외로움을 가장 중요한 고통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사춘기 우울, 반항, 일탈의 뿌리는 이 외로움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봅니다. (...)
요즘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외롭습니다. 정말 정말 외롭습니다. 그들의 외로움을 어른인 우리가 이해해주고, 잘 돌봐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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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갖고 싶어하는 선물이 핸드폰과 애완동물이라는 사춘기들의 소망 목록만 보아도 그들이 얼마나 외로운지 알 수 있습니다.
외동이, 두둥이로서의 가족적 외로움
여행도 모험도 불가능한 추억 없음의 내적 외로움
친구 아니며 적이라는 학교 교실 속에서의 외로움
도움이 필요할 때 찾을 어른이 없는 외로움
그들이 부모를 떠나서 걸어가야 하는 내적, 외적 여정에 함께할 동반자라고는 인터넷, 스마트폰, 그리고 문제집밖에 없는 길 위에서 아이들은 외로움의 절규를 몸으로, 마음으로 뿜어내고 있습니다.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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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혼자라는 것을 외로워하기도 하지만, 부모와 공생하거나 의존하는 상태를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그러니까 외롭지만 혼자인 셈이지요. 이모라도 있으면 다행이고 가까운 사촌이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이런 확대가족의 숨구멍이 없으면 아이들은 더 힘들기도 합니다.
네가 '너밖에 없어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이런 관계는 서로에게 서로를 가두려는 병적 의존 속에서, 어느 한쪽이 숨도 못 쉬면서 상처 받는 채로 지내는 부모 자녀 관계를 말합니다. 초등 저학년까지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모르고 지나가고, 또 알고도 넘어가지만, 사춘기가 되면 이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폭발적으로 무엇인가를 벌이게 됩니다. (...)
"나에게는 너밖에 없다." 이 말이 어느 순간 자녀에게 사랑을 증명하는 말로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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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무슨 공장인가요? 해야 할 일로 가득 차고 무언가를 생산해내야 하는. 가족이 무슨 주인과 노예 관계인가요? 부모가 생각하는 조건을 만족시킬 때까지 아이들이 소외된 노동을 해야 하는. 이런 불만이 축적되면 아이들은 정신적, 신체적으로 거부할 힘이 생겨나는 사춘기가 되면서 이런 강박적 요구를 거부합니다.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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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공부를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한 정서를 가르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미국의 대상관계 정신분석 이론가인 크리스토퍼 볼라스는 <대상의 그림자>에서 겉으로는 정상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즉 정서적으로는 무감동하고 공감하기 어려워하는 아이들을 '정상처럼 보이는 병'이라고 부른 바 있습니다. 속이 텅 빈, 과제만 해내면 다른 정서적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반영적 경청이나 성찰을 제공하지 않았던 양육의 결과로 빚어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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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돈으로 크나요? 사랑으로 크나요?"
둘 다 필요한 것이 맞지만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의 돈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종종 만나는 부자 부모를 둔 비행 청소년들에게 주로 이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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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세대야 학교를 다니면서 선생님이 쳐다봐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모릅니다. 그 시절에는 존재 자체가 중요했지, 존재감까지 바랄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의 아이들은 다릅니다. 존재감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학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말을 빌리면 선생님의 뇌 구조상 선생님들이 기억하는 아이들의 최대 수는 10명인데 잘하는 아이 5명, 말썽 피우거나 못하는 아이 5명, 그렇게만 기억한다고 합니다. 관심을 못 끄는 대다수의 아이들은 선생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거지요. 한 학교에 전교생이 600명이라 치면 100명은 예쁨도 받고 이름도 제대로 알리고 100명은 미움 받고 듣기 싫은 이름으로 취급받지만 400명은 희미한 존재, 잊힌 존재, 혹은 200명 아이들의 주인공인 무대의 엑스트라 배우 같은 존재들이 된다는 거지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아이들은 그런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자신들을 알아주길 원합니다. 왕자님, 공주님의 이름도 모르는 선생님들이 섭섭할 뿐입니다. 집에서는 주인공, 학교 가면 엑스트라! 이 역할의 전환에 아이들이 힘들 수 있지요. 그 마음, 짐작이 가시나요?
학교라는 것이 여러 아이들이 번갈아가면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 시리즈였으면 좋겠지만, 학교가 연출하는 드라마는 3년 내내 주인공이 크게 바뀌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3년 내내 엑스트라로 다니는 아이들은 재미가 있을 리 없지요.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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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많았던 시절에는 역할 분담을 했지요. 기대를 더 많이 받고 후원을 더 많이 받는 형제는 공부로, 그렇지 않은 형제는 다른 방법으로 살기로 분담을 하고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외동이 아니면 두둥이 가정이니 공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성취해야 할 과제와 그 과제로 인한 스트레스가 증가하면서 아이들은 그동안 써보지 않은 덕목들을 새로이 요구받습니다. 인내심, 극기력, 주도성.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노력이겠지요. 노력하는 법을 배우지 않은 15세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이 기로에 섰을 때 노력하는 대신 가장 좋은 변명거리가 되는 것은 '나는 머리가 좋지 않다', '나는 공부 머리가 아니다'라고 하는 머리 탓입니다.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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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목표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며, 어떤 평가를 받느냐입니다. 반면, 학습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이고 흥미이며 교훈입니다. '지금 어떤 일을 잘 못한다'는 것이 불쾌하기만 한 경험이 아닙니다. 배우고 익히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뒤로 물러서는 태도를 취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p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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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의 위기'는 자신에 대해, 자신의 삶에 대해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길목에서 아이들은 전진하거나 후퇴합니다. 이때 과정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과 배움 자체의 가치와 자신을 극복해보는 수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아이들은 일시적이든 장기적이든 후퇴하게 됩니다.
중학교에 오면 많은 것이 바뀝니다. 학교 체제는 더 엄격하고 더 공격적입니다. 그야말로 적응하느냐 못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중학교라는 환경이 요구하는 변화를 민감하게 파악하고 잘 따라감과 동시에 이런 변화에 적응하는 것을 흥미로운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들과 그러지 않는 아이들 사이에서는 차이가 나타납니다. 노력을 강조하는 관점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 더 적응을 잘하기 마련이지요.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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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시기에 친구는 사회적 자아의 탄생을 알리는 필수적 대상이라는 것을 부모님들이 알았으면 합니다. 그러므로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친구 때문에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잔소리는 인생에 대해 정말 모르는 부모들이나 할 소리입니다. 친구는 정말 소중한 것이고 내 아이에게 아주 중요한 대상이며, 아이들에게 새로운 소속감과 정체성을 가져다주는 정말 필요한 환경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중학교 1,2학년 때 친한 친구 그룹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괴로운 일일 뿐 아니라 아이들의 존재감에 위협을 주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들이 해야 할 일은 좋은 친구를 사귀고 우정을 쌓아가도록 친구와 잘 지내는 지혜를 가르치는 일입니다. 부모를 떠나 사춘기라는 징검다리를 건널 때 물에 빠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첫 번째 동반자가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p19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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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배움의 본능을 타고납니다. 행복의 본능을 타고납니다. 무기력이나 불행은 그 본능적 추구를 가로막는 사회에서 나타납니다.
저는 그래서 요즘 결핍에 대항하는 말로 '충만함'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충분함이 양적인 표현이라면 충만함은 질적인 표현이지요. 한국의 부모나 교사들에게 "충분히는 하셨습니까?"라고 물으면 모두 "네"라고 답합니다. "그래서 충만함을 느끼셨습니까?"라고 한 번 더 물으면 갑자기 당황하면서 한참 있다가 "아니요"라고 합니다.
'충만함'이란 내적인 행복감과 만족을 이야기합니다. 충만함을 많이 경험하면 무기력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에너지가 '빵빵'해지기 때문입니다. "너에게 충분히 다 해주었는데 너는 어떻게 이럴 수 있니?"라는 말은 희망 없는, 무기력한 아이들에게 무기력한 부모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입니다.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도입되길, 이를 위한 사회적 운동이 전개되길 빕니다.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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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는 아이를 예뻐하는, 뿌리박힌 우리들의 속성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편을 가르는 본능적 속성에서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뇌세포에는 잘하는 아이들에 대한 긍정적 반응은 각인되어 있지만 소위 못하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분노와 혐오가 그득합니다. 교사들, 부모들도 그렇게 자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적 차원의 개혁을 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정과 교실에서 우리가 평상시 어떤 반응을 주고받는지를 성찰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내 아이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또래들 사이에서, 학교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상호작용하면서 무엇을 쌓아가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매일 칭찬받는 소수와 그것을 쳐다보는 다수 아이들의 심정을, 매일 사랑받는 소수와 환영받지 못하는 다수 아이들의 심정을 우리는 생각해보고 느껴보아야 합니다. 사춘기가 될 때까지 그들이 받은 총 칭찬 양은 총 꾸중 양, 총 무시 양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마음이 꾸중과 무시당한 상처로 가득할 때, 쿡 찌르면 터져 나오는 것은 분노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치심으로 누적된 마음에서 배출되는 것이 분노 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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