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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교육 관련

가르침의 재발견 / 거트 비에스트 _ 학습에서 가르침 해방하기

by 릴라~ 2024. 4. 28.

요 몇 년 새 읽은 교육학 관련 책 중 최고다. 이런 책을 만나면 너무너무 행복하다. 오랜만에 한 구절 한 구절 감탄하며 읽은 책. 옆동네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비에스타 책은 사서 다시 줄 그으며 봐야지 싶다. 평소 내가 감으로는 느끼지만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던 부분을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 밝혀주고, 새로운 개념으로 보충해준 책.

 

우리는 흔히 교수-학습을 한 쌍으로 놓고 교수를 학습을 위한, 혹은 학습을 촉진하는 활동으로 보지만, 저자는 그것이 현재의 교육적 혼란을 야기한 주범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교수 즉 가르침을 학습과 분리하되 그렇다고 해서 학생을 대상으로만 보았던, 가르침에 대한 전통적 관점으로 회귀하지 않는다. 아렌트, 랑시에르, 레비나스 등 다양한 철학자들을 경유하면서 '세계와의 만남' 혹은 '사건'으로서의 가르침의 본질을 회복하고, 그러한 가르침을 통해서만 '성숙한 주체'가 출현한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울반 한 녀석의 하소연이 떠올랐다. 과학 시험 범위에 화성암, 변성암, 편마암 등 온갖 암석이 나오는데 대체 이걸 왜 외우고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당연지사다. 지구를, 땅을 암석을, 거대한 바위와 절벽을, 만나기도 전에 사진으로 이름 외우기만 하고 있으니, 의미가 와닿을 리 없다. 의미는 언제나 만남에 의해서만 파생되며, 학습 이전에 만남 혹은 사건이 선행한다. 지구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는 암석의 역사인데, 이 돌은 왜 중요한가,,, 자연에서의 돌과 구석기 등 문명의 도구로서의 돌... 석탄에서 다이아몬드까지... 인간의 삶과 함께 한 돌... 암벽등반하는 사람들... 호주의 에어즈락처럼 지구에서 제일 큰 바위, 하며... 이 모든 것과의 만남, 경이로움 등과 동반되지 않는 배움은 의미를 형성하기 어렵다. 

 

교사는 이 돌과의 만남, 만남이 낳는 혼란과 질문이 공존하는, 우리가 여태 경험하지 못했던 교육적 시공간, 저자의 말을 빌면 '중간 지대'를 창조하는 사람이며, 이 결과로 내용을 파악하는 학습이 이루어질 수는 있지만 그 학습이 일어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학생의 몫이다. 교수와 학습은 그래서 분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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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가 타인, 타자와 함께 '대화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타인과 타자에 노출되는 것, 이것에 의해 말이 건네지는 것, 이것에 의해 가르침을 받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우리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에 관한 우리의 바람이나 욕구에 의미하는 바를 숙고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바람desire이 바람직한지 아닌지를 묻는 질문에 참여하는 것이다.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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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의 임무는 다른 인간의 '성숙한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 혹은 더 정확한 문장으로는, 다른 인간 안에 세계 속에 성숙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싶은 바람과 욕구를 일으키는 것이다. (...) 성숙함은 발달이나 교육적 기획의 결과물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세계와 더불어 존재하는 방식으로 제시될 것이다.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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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생의 주체됨을 지향하는 가르침을, 그들이 주체가 될 수 있게 지식, 기술, 성향을 획득하도록 돕는 '구축'의 문제로 보거나, 혹은 '권한강화'의 문제로 보는 관점에 반대한다. 나는 랑시에르의 제안을 따라 가르침이 불화로 작동하는 다른 경로를 탐색한다. 불화는 합의의 부재가 아니라 기존 사태에 '통약 불가능한 요소'를 소개하는 것과 관련된다. (...)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불화로서의 가르침은 학생의 역량 부족에 관한 어떤 주장도 수용하지 않기로 하는 것으로 성립되며, 특히 학생이 스스로 그러한 주장을 할 때 더욱 그러하다.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불화로서의 가르침은 학생의 미래 존재 방식에 호소하는 것, 즉 교육자의 관점에서나 학생의 관점에서나 아직 보지 못한 존재 방식에 호소하는 것으로 성립된다.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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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만약 학생의 성숙한 주체됨에 관심을 둔다면, 가르침은 학생들에게 의미화의 자유 혹은 학습의 자유를 행사하는 자유의 공간을 창조하는 것과 별로 상관없다. 오히려 가르침은 학생들이 그들의 자유와 마주칠 수 있는 가능성, 주체로서 성숙한 방식으로 세계 속에 존재하라는 '부름'과 마주칠 수 있는 실존적 가능성을 창조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p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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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과업은 다른 인간이 세계 속에 세계와 더불어 성숙하게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 여기서 강조하는 한 가지는, 실제로 우리가 정말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세계 속에서 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에서 물러설 때 우리는 오직 자신하고만 함께 존재하고,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끝난다. 만약에 그런 식으로 존재하게 된다면 이는 매우 빈곤하고 자기함몰적인 존재 방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속에 세계와 더불어 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나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 그러므로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자신을 세계의 중심이자 기원, 토대로 간주하지 않고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다.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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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중심적 존재 방식은 전적으로 자기 욕구에 의해 발생한다. (...) 성숙은 욕구의 억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과 함께 살아갈 타자의 삶을 위해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질문함으로써 우리의 욕구가 그 실재성을 확인받는 과정이다. 이 질문은 언제나 우리 욕구의 중단 혹은 방해로 자리하며, 이는 교육적으로도 중요하다. 욕구의 중단 혹은 방해는 부분적으로는 저항의 경험을 통해 드러난다. 저항과 만날 때 세계와 만나는 동시에 세계와 관련하여 우리가 가진 욕구와도 만난다고 할 수 있다.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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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삶이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구조화되는 한, 우리는 욕구의 중단이나 제한에는 관심이 없고 더 많이 욕망하고 더 많이 구매하는 욕구 증대만 강조하는 환경 속에 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충동 사회'는 성숙함에는 관심이 없고 우리가 유아로 남아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거기서 돈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p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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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교육을 아동의 발달을 촉진시키고 학생의 재능과 잠재력을 최대한 발달시키는 것으로 여기는 풍조에 맞서 가장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세계 속에 세계와 더불어 성숙한 방식으로 존재하기 위한 교육의 주요 원칙은 중단이라는 것이다.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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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교육적 과업은 결코 아동의 발달을 증진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발달이 바람직하고 어떤 발달이 그렇지 않은지에 관한 질문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발달에개입하고 질문하는 것이 교육의 근본적 태도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교육적 과업이 단지 학생들의 모든 재능을 발달시키고 그들의 모든 잠재성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것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세계에 성숙한 방식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재능과 잠재성을 검토해 어떤 재능이 이롭고 어떤 재능이 방해가 되는지 탐색하는 것을 추구한다. 이것은 단지 학생들의 모든 것이 발현하고 성장하고 흐르고 번영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필연적으로 중단을 요청한다.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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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학생의 욕구가 바람직한지를 교육자가 결정짓는 한, 아이와 학생은 교육자의 의도와 활동의 대상으로만 남게 된다. 그러므로 교육의 핵심적 도전은 아이와 학생에게 그들의 욕구가 바람직한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학생의 삶에 이것이 살아있는 질문이 되도록 하는 데 있다. 이것은 직접적인 도덕교육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안에 욕구가 일어나는 것과 그것을 따르는 행위 사이에 틈을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아이와 학생이 자신의 욕구와 관계를 설정할 수 있도록 말 그대로 진짜 공간과 은유적 공간을 열어줄 필요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요청되는 교유적 원리는 유예, 즉 시간과 장소의 유예라고 할 수 있다. 유예는 욕구와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욕구를 스스로에게 가시화하고 지각해서 그 결과 욕구에 모종의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것이다.
 
요점을 분명히 하자만 이것은 욕구를 극복하거나 파괴하는 과정이 아니다. 결국 욕구는 중요한 추동력이 된다. 그 욕구를 선택하고 변형함으로써 욕구에 종속되는 것에서 벗어나 욕구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p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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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과 유예 모두 학생을 중간 지대에 두고자 하는 의도와 더불어 중간 지대에서 발생한다. 성숙은 오직 중간 지대에서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적 작업의 세 번째 차원은 학생이 이 어려운 중간 지대에 머물도록 지원해주는 것인데, 이것은 가장 중요하고도 불안정한 차원이다. 학생들이 세계 속에 세계와 더불어 존재하는 어려움을 견딜 수 있도록 상상 가능한 모든 형식의 지속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 지대에서 학생들이 세계와 만나기 때문에, 여기서의 교육적 작업도 이 만남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에 교수법이나 교육과정과 관련된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된다. 더 상세하게 말하면 저항의 경험에 형식을 주어서, 타자성과 고유성 속에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진짜 가능성을 주는 것이다.
 
여기서 저항의 경험을 중요하고 유의미하며 긍정적인 것으로 '시연'하는 것,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다양하고 많은 방식에 대한 안목을 가지는 것이 교육자의 역할이다. 이것은 그저 일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주체로 존재함이라는 질문 그 자체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과 관련된다. p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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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주체됨을 지향하는 가르침을 행하는 교사로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학생들이 훗날 어느 지점에서 우리를 향해 돌아서서 처음에는 원치 않는 중단이자 권력의 행사로 보였던 것이 실제로 세계 속에 세계와 더불어 성숙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 즉 성숙한 주체됨에 기여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오직 그러한 전환이 일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단선적이고 일방향적인 권력이 대화적이고 관계적인 권위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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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파괴와 자기파괴 사이, 어려운 중간 지대에서 존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를 통해 존재에 강조점을 둘 때 무엇이 뒤따르는지를 명료하게 하고자 했다. 나는 성숙이라는 개념을 발달 용어가 아닌 존재론적 용어로 보고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또한 가르침이 학생의 주체됨을 목표로 할 때 교사가 맡게 되는 특정한 과업이 무엇인지를 중단, 유예, 지속의 역할을 부각함으로써 보여주려고 했다. 이를 통해 가르침을 해방과 자유의 질문과 다시 연결 짓고, 학생의 성숙한 주체됨이라는 교육적 관심과 다시 연결 짓는 작업을 시작했다.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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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 중 하나는, 가르침을 학습의 원인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이 잘못된 생각은 개입으로서의 가르침이라는 개념과 결과로서의 학습, 교육의 복잡성에 대한 기계적 이해와도 관련된다. 이 생각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학생의 성취 여부를 전적으로 교사의 책임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학생은 교육과정에서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는 사고와 행동의 주체로서보다는, 단지 의지를 가진 개입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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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이 학습에 개념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후자의 주장은 쉽게 반박될 수 있는데, 가르침 없이도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기 대문이다. (...) 학습이 가르침에 개념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첫 번째 주장을 반박하는 것은 조금더 어렵다. p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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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배웠다고 말할 때 실제로 변한 것이 무엇인지는 더 정교화되어야 할 질문이다. 예를 들어 지식에서, 능력에서, 혹은 이해에서, 행동에서, 정서에서 등등의 변화일 수 있다.
 
많은 저자들은 그렇게 이해된 학습을 실제로 초래하는 것은 학생들이 하는 일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학생들이 하는 일을 지칭하기 위해 '학습'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가?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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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학습의 논의에서 상당 부분의 혼란은 학습을 활동과 활동의 결과 둘 다를 지칭하는 데서 야기된다. (...)
 
이 때문에 펜스터마허는 가르침이 학습을 초래한다고 말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 교사가 학생들에게 어떤 내용을 전달하거나 전수한다는 생각은 사실상 오류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교사는 "학생들에게 교사, 교과서 또는 다른 자원으로부터 내용을 습득하는 방법을 지도한다."
 
따라서 펜스터마허는 교사들이 목표로 삼아야 할 것, 그리고 가르침이 의도해야 할 것은 '학생화studenting'라고 제안했는데, 이는 스미스가 '제자화pupilling'라고 한 것과 유사하다. (학습자에게 학생의 역할에 대한 절차와 요구사항 가르치기, 학습할 자료 선택하기, 학습자의 수준에 맞는 적합한 자료 만들기... 학생의 진행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평가하기, 학습자에게 지식과 기술의 주요 원천 중 하나로서 서비스 제공하기...) 
 
(...) 비록 펜스터마허가 학생화라는 행위의 결과를 여전히 학습으로 기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학생화'의 개념은 가르침과 학습 간에 약간의 틈을 생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p7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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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가 구축하고자 했던 바는 가르침을 학습의 원인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며, 또한 가르침의 목표가 반드시 학습을 초래하는 데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또한 '가르침'과 '학습' 사이에 필연적으로 개념적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펜스터마허에 기대어 우리는 아마도 과업과 성취로서의 학습은 '학습자의' 것이며, 교사가 초래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은 학습 자체가 아니라 학생화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도에서 학습은 기껏해야 학생화라는 활동의 '효과'이지, 가르침이라는 활동의 효과는 아니다.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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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학습의 언어는 교육적 언어로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 가르침의 핵심, 보다 일반적으로 교육의 핵심은 결코 학생들이 '단순히' 배우는 것에 있지 않고, 언제나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 특정 이유로 배운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배운다는 것에 있다. 학습의 언어가 지니는 문제는 그것이 내용과 목적과 관련하여 '열린' 혹은 '텅빈' 과정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은 학습해야 한다거나 교사는 학습을 촉진해야 한다거나, 우리 모두가 평생 학습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뭔가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말하는 바가 거의 없다. p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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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구성의 과정으로 보는 관점에는 앞서 파악의 행위에서 언급했던 것과 유사한 인간 존재의 개념이 들어 있다. 구성은 인식자-구성자를 인식해야 할 세계의 중심에 둠으로써 자연적, 사회적 세계를 나의 구성과 나의 이해, 나의 파악을 위한 대상에 놓는다. (...) 이것은 또한 세계는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으로서, 세계는 내가 이해 가능하고 지식을 구성할 수 있는 대상이며 어떤 의미에서 내 손 안에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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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을 구성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수용의 '사건'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를 매우 다르게 위치지운다. 어떤 의미에서 인식을 수용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식을 구성으로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반대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인식을 수용으로 생각할 때 세계는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오는 '그 무엇'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인식은 지배나 통제의 행위가 아니며, 자연적, 사회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기술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에 귀기울이는 과정으로 서술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즉, 세계에 관심을 보이고 세계를 보살피며 아마도 세계를 운반한다고까지 할 수 있는 과정인 것이다.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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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과 수용은 우리가 세계와 관계 맺을 수 있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을 제시한다. (...) 즉, 어떤 의미에서 세계가 자아보다 '먼저' 존재하고, 그 자아는 이 '만남'을 통해 출현하는 방식이 있다. (...) 주체로서의 우리의 존재는 정확히 우리 수중에 있지 않고, 소위 말해서 우리 안에서부터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에서 포착된다. 이보다는 바깥에서부터 오는 언명에 대한 응답, 타인과 타자에 의해 말 걸어지고 언명되는 경험에 대한 응답으로 출현한다는 거이다. 여기에서 경청과 언명됨의 차이를 숙고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다. 경청은 듣기 위해 자신의 귀를 여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반면, 언명되고 말 걸어지는 경험은 '밖에서' 우리에게 오며,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응답할 것을 '요청한다'.p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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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는 가르침과 학습이 필연적인 관계는 아니며, 학습과 학습자라는 개념에 문제가 없지 않다는 점을 말하고자 했다. 이는 적어도 학습과 학습자가 된다는 것이 항상 좋고 바람직하다고 가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파악의 행위로서의 학습이 우리를 얼마나 세계와 매우 특정한 관계 속에 놓는지, 다른 관계들도 상상할 수 있고 가능하며 아마도 바람직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했다. (...) 문제는 이 중 어떤 것이라도 실제로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학생들과 함께 하면서 학습을 '밖으로' 빼는 것이 가능한가? 만약 학습을 목표로 하지 않고 가르친다면 이것은 여전히 교육적으로 유의미한 것에 이를 수 있는가?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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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육은 아마도 이해의 확장처럼 이미 있는 것을 성장시키고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 정확히는 학생들이 이미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의 마주침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상기시켰다. 우리는 이것을 아무런 이유 없이 오는 어떤 것과의 만남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정말로 그것이 새롭고 실제로 외부에서 오는 것이라면, 학생들은 아직 그들에게 오는 것과의 연결 지점을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들에게 오는 것의 이유를 아직 못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오는 새로운 것은 이미 익숙하거나 학생들이 이미 알고 이해하는 것에 쉽게 통합되거나 추가될 수 있는 통찰력이라기보다는, 짊어져야 할 부담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
 
이러한 배경에서 나는 이 강좌를 위한 추가적인 구성 원리로 '입양'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입양'이라는 개념은 우리 외부에서 오는 낯선 것과 만나는 매우 생경한 경험과 가장 가깝기 때문에, 통제하거나 선택할 수는 없지만 유지하기로 결정하면 누구나 그것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느꼈다. p9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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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학생들은 그 개념들과 거처하는 것, 즉 그 개념에 거처를 제공하는 것이 다른 학생보다 더 쉬운 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들은 그 개념이 '단순히' 개념이 아니라, 많은 경우에 학생들의 삶 속의 실재로서, 그들이 소중히 여기거나 미워하는 것으로서, 그들을 호출하고 언명하는 것으로서, 그들의 삶 속에 장소를 가지고 싶어하는 것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례에서 일어난 것은 개념과의 마주침이나 그 개념을 입양하라는 요구가 학생들로 하여금 전통적인 학습자 정체성을 '넘어서도록' 했으며, 그들을 파악으로부터 벗어나 세계 속에 세계와 더불어 존재하는 매우 상이한 방식들로 안내했다는 것이다. p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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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적인 교육적 상상을 특징지을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은 로봇 진공청소기의 관점이다. (...) 로봇 진공청소기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자율적으로, 즉 스스로 방을 청소하는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시간이 지나면서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특정 방이나 공간에 지능적으로 적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일하는 것에 더 효율적으로 된다는 점이다. (...) 그러므로 로봇 진공청소기는 학습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고, 혹은 원한다면 그들이 지능적인 방식으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로봇 진공청소기가 외부의개입 없이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학습은 자율적이다. (...)
 
이 상상은 교육을 학습자 중심의 노력으로 보며, 여기서 학습자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해를 구축하고 자신의 기술을 쌓는 것으로, 또 교사의 주된 과업은 그러한 과정을 초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과정에서 교사는 정말로 아무것도 전수하지 않고, 다만 학생들의 학습을 촉진하는 환경을 설계한다. 유사하게 학생들은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며, 이를 통하여 미래의 상황에 더 잘 적응하도록 돕는 기술과 역량을 획득하게 된다. 이는 또한 교육과정의 의미와 지위를 바꾼다. 교육과정은 더이상 전수되고 획득되는 내용으로 존재하지 않고, 학생들이 유연하고 개별화된 방식으로 자신의 고유한 학습 궤적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련의 '학습 기회'로 재정의된다. p117-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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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는 모든 의미형성, 모든 의미작용이 문화와 역사 내에서 일어나고, 또 그러한 문화적, 역사적 맥락이나 틀로서부터 의미가 파생되는, 전체적인 내재성의 상황을 묘사한다. 그는 이것을 반플라톤주의로 특징짓는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말하는 "의미화의 세계는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와 문화보다 선행하며" 그것은 "이 세계를 사유 속에 드러내기 위해 고안된 기호체계와 상관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즉 우리가 말하거나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현존하는 문화와 역사적 담론의 맥락 안에서 표현되어야 하고, 그러한 담론과 맥락으로부터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p12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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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의사소통은 의미 교환의 문제가 아니며, 그것의 기원은 언명, 말 건넴에 있다는 것이다. 의미화가 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그리고 의미화가 가능한 것은, 더 정확한 레비나스의 정식으로는 의미화가 스스로를 존재하도록 하고 그것이 현실화되는 것은, 언명됨이라는 윤리적 사건 안에서이다.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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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장에서 개진된 생각에서 드러난 사실은, 통제로서의 가르침에 대한 반발로 제기된 선택지도 그러한 의미화 행위를 통해 학습자는 주체로 출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동일한 문제의 곤경을 겪는다는 점이다. 왜 그런지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의미화의 행위는 자아에서 시작해서 세계를 '경유'하여 다시 자아로 회귀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의미화에서 자아는 결코 방해받지 않으며 이미 그 자체와 언제나 함께 있고 자기 스스로 충분한 자아로 보존된다. 이 문제를 보는 다른 방식은 항상 변화하는 환경 조건에 적응하고 조정하려는 시도 속에서, 자아는 적응하려는 환경의 대상으로만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창의적인 적응 행위는 아마도 자아의 생존을 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자아가 실존할 가능성, 말 그대로 자신의 바깥에 있다는 의미에서의 실존 가능성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절대로 제기되지 않는 질문은 자아가 적응하려고 애쓰는 그 환경이 마땅히 적응해야 하는 환경인가, 적응할만한 가치가 있는 환경인가 하는 것이다. p14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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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해석학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을 통해 레비나스가 보여주는 '열림'의 중요성을 본다. 우리의 주체됨은 해석과 적응의 행위를 통해서 안으로부터 밖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내재성의 중단, 나 자신과 함께 있음이나 나의 의식의 중단 혹은 균열을 통해 밖으로부터 호출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내가 보여주려고 했듯이, 이것은 내가 타자를 해석하는 순간, 혹은 타자를 경청하는 순간도 아니고 타자가 나를 이해하는 순간도 아니다. 이 점에서 그것은 전적으로 의미화 영역의 밖에 있다. 그것은 타자에 의해 언명되는 순간이며, 레비나스의 용어로는 타자가 "내 안에 있는 유일성을 호출하는" 순간이다. 그리하여 이 언명됨의 사건은 우리에게 가르침과 가르쳐지는 경험에 관해 완전히 다르고, 훨씬 더 중요한 설명을 줄 수 있지 않을가?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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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나는 새로운 대안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을뿐만 아니라 또한 그 대안은 가능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통제로서의 가르침이 의미화의 자유로 대체되어 버릴 때, 실제로는 학생의 부자유가 더욱 강화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의미화의 행위에서는 학생들이 그 자신과 함께 홀로 남아 있고 항상 자신으로 회귀하게 되어, 결코 세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신의 주체됨을 성취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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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바람이나 욕구는 무엇보다도 생존의 욕구인 한편, 성숙의 방식 즉 주체로서 세계에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는 자신만의 삶을 살고자 하는 특별한 방식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바람을 일깨우는 것은, 아이들이나 젊은이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자 하는 야망을 지나치게 추구하지 않도록 돕는 것을 의미하는 한편, 그들이 세상의 좌절을 만났을 때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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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로서 세계 속에 세계와 더불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세계가 자연적 세계이든 사회적 세계이든 우리의 환상으로 구성되거나 그것을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세계 속에 세계와 더불어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세계와 대화하려고 애쓰는 것을 의미하는 한편, 그 대화가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담소'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실존적 형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것은 주체로서의 우리 존재가 '파악으로서의 학습'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며(2장), 의미화의 자유로 주장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자(3장), 언명되고 말을 걸어옴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의 성숙한 주체됨이 출현한다는 관념을 향해 작업해 나가는 것임을(4장) 다루었다. 여기서 나는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바로 그것으로서 자유를 만난다. 이것은 '가르침을 받는' 경험과의 마주침, 즉 가르침을 만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4장에서 제시된 것처럼 가르침은 우리를 중단시키고, 자신과 함께 있기만 한 상태로부터 벗어나도록 잠재적으로 해방시키고, 주체로서 이 세계에 존재하도록 우리를 소환한다. 가르침이 해방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p20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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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선언문에서 교육을 위한 적절한 '자리'는 바로 '현재 존재하는 것'과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 간의 긴장에 있다고 제안했다. 교육적 전통은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긴장과 익숙한 한편, 이 긴장에 대한 가장 흔한 해석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시간적 관점으로 이해하는 해석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직' 지금 여기에 있지 않지만, 미래에 도래할 것으로 기대되는 것이다. (...)
 
그러나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것, 그리하여 교육을 미래 어느 지점에서 약속을 실행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의 문제는 자유의 문제가 지금 여기에서 사라지고 우리가 말했듯이 "영원히 지연되는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이다. 만약 자유가 교육에 적절한 교육적인 것을 표현하는 경우라면, 그러한 이해는 구조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위치에 교육적인 것을 두는 위험을 안고 있다. 항상 도착할 예정이지만 결코 완전히 거기에 닿지 않듯이,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결코 온전히 여기에 있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교육에 대한 시간적 이해에 대한 것이다. 교육을 기본적으로 시간에 걸친 일종의 발달의 관점에서 간주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우리의 교육적 관심을 충분히 포착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제 우리는 시간과 교육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교육적 논리의 가능성을 고려할 때 잠시 암시되었던 것으로, 교육적 논리는 근대 교육의 시간적 논리와 달리 명시적으로는 비시간적이다. 이것은 교육이 '현재 존재하는 것'과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 속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랑시에르의 표현을 차용하여 우리가 불화라고 언급한 바로 그 긴장이다. p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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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주체됨은 소유도 아니고 자아가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는 어떤 것이다. 레비나스가 우리의 주체됨을 '내재성의 균열'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우리의 역량, 능력, 혹은 수용력에 대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것은 오히려 '경험의 트라우마적인 대변동'으로서 우리의 지능이 그 자체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어떤 것과 마주치는 경험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해야만 한다'는 명령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 '명령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세상이 요청하는 모든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이 왔을 때, 언명이 도래했을 때, 내가 거기에 있으면서 그 명령에 응답할 것이라는 보장은 결코 없다. 혹은 덜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보다 분명하게 정식화하자면, 내가 거기에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리라고 보장하지는 못한다. 그 언명이 우리를 '마주치게' 하기 위해 혹은 주체가 우리에게 '도래'하기 위해 우리가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역량을 갖도록 하는 모든 지식과 기술을 동원하여 자아에게 권한을 주거나 자아를 구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무장 해제시키는 것이라고 매스컬레인은 매우 설득적으로 말한다. 이러한 식으로 볼 때 주체됨의 도래는 정확히 발달적 궤적의 결과가 아니라, 그리고 학습 궤도의 축적적 결과가 아니라, 어떤 나이든 아이들이 그것에 준비가 되어 있든 아니든 상관없이 이 모든 것을 돌파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p228-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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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의 표현을 다시  소환하자면, 학생이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 미래를 여는 것은 학생의 주체됨에 기초하여 작용하는 것이다. (...)
 
믿음의 도약은 이 모든 것을 돌파하여 모든 증거와 가식적인 모든 것에 반대하여, 주체로서 학생에게 접근하도록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학생들이 주체로서 등장할 수도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을 열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사가 불화로서 '작동한다'는 것의 의미이다. 또한 통약 불가능한 요소를 현재 존재하는 사태, 혹은 현재 존재하는 감각적인 것의 분배로 가지고 온다는 것의 의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교사로서 우리의 행위가 지금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 즉 학생의 주체됨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끄는 것이다. 학생의 주체됨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문제이다.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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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화의 자유는 학습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서, 의미형성, 이해, 그리고 파악의 행위이다. 나는 레비나스를 좇아 그러한 의미화는 항상 그가 말하는 문답/응답에 부차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언명되는 것, 말 걸어지는 것은 이미 의미 형성 이전에 우리에게 온다.
 
이러한 시각으로 볼 때, 가르침은 더이상 학생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 예를 들어 학습할 수 있는 자유, 의미를 형성할 수 있는 자유, 파악을 위한 자유의 공간을 창조하는 일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잠시 공간적 은유를 사용하자면, 가르침은 오히려 학생이 자신의 자유를 만날 수 있는 공간, 다시 레비나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다른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할 수 없는" 그것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성숙함의 자유를 목표로 할 때,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학생의 존재를 목표로 하는 가르침이 왜 불화로서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즉 학생들의 능력이나 역량을 단순히 축적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자유로 향해 나아가도록, 즉 불가능한 가능성, 하나의 가능성으로 예견할 수 없는 가능성, 그리고 주체로서 세계에 존재할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p24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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