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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시와 음악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 고정희

by 릴라~ 2007. 7. 17.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 두셨다

말씀보다 더 큰 여백을 걸어 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 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고정희

- 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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