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에 출간된 우치다 타츠루 선생의 신간이다. 이분은 어쩜 이렇게 거의 매년 좋은 책을 써내는지 모르겠다. 우리 사회는 전세계적인 변화의 흐름 안에 있지만 서구 사회와는 사회의 속살도, 변화의 맥락도 조금 다르다. 그래서 일본 사회의 변화를 추적하는 우치다 타츠루 선생의 글은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는 가장 좋은 렌즈 역할을 해준다. 일본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 과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우리 사회를 앞서 예언하는 척도가 된다.
이번에 선생이 내어놓은 책은 일본 학계와 예술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한 꼭지씩 맡아서 쓴 공저이다. 주제는 '후퇴하는 사회'다. 인구 감소, 고령화, 신기술 혁신의 부재 등이 맞물려 일본 사회의 후퇴는 피할 수 없다고 선생은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후퇴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런 '용감한' 화두를 두고 각계 전문가가 이야기한다. 정치학자, 사회학자, 감염병학자, 예술가, 자영업자 등 다양한 사람들의 글이 실려있는데 하나같이 다 소중한 통찰을 담고 있었다.
우치다 타츠루 선생은 1950년생인데 공저자들은 60~70년대생들이 대부분이며 80년대 생도 있다. 정치, 경제적으로 일본의 위상은 갈수록 내려가고 있지만, 이런 담론적 환경을 보면 일본 사회가 아직 건강하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이것도 영속적이지는 않다. 일본 사회를 떠받쳐온 이 세대가 지나고 다음 세대가 오면 일본의 담론적 환경도 변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건재하며, 우리보다 훨씬 의미 있는 담론을 내어놓고 있다.
'후퇴'는 명백한 일이지만 어떤 정부도 정당도 후퇴를 말하지 않고 지방 소멸을 대비하지도 않는다. 우치다 타츠루 선생은 과밀지역과 과소지역의 격차가 자본주의가 연명할 마지막 수단이라고 이야기한다. 인구가 줄어도 지방이 소멸하면서 그 인구가 도시로 몰려오는 한 임금은 올라가지 않고 자본가에게 유리한 환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란다. 과밀을 만들어내기 위해 과소를 방치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지역색이 강하고 지방자치가 우리보다 훨씬 튼튼한데도 이러한 염려를 하고 있으니 앞으로 우리 사회의 지방 소멸은 더욱 심각한 결과를 갖고 올 것 같다.
다양한 영역들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의 저자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있다. 더 이상의 성장은 불가능하고 후퇴는 필연적이라고. 미개척지로서의 시장은 없으며 남은 시장은 우주 뿐이라고. 이대로 계속 가다간 기후 위기 등 각종 문제로 인류가 소멸할 것이라고. 코로나19 때의 강력한 조치와 같은 전시에 준하는 규제가 필요할 수도 있다고. 그러므로 후퇴를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후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인간 사회는 늘 사회의 안 과 밖, 문명과 자연 등 두 가지 원리에 의해 이루어져왔는데 지금은 한 가지 논리만 남아서 위험하다고. 자본의 논리에 모든 것이 잠식당했다고. 날것의 야생적인 감각이 사라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 후퇴하여 일본에 섹스리스 부부가 넘쳐난다고.
경쟁원리에서 내려선 삶의 원리를 상상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저자들도 인정한다. 그렇지만 탐색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 밖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회적으로 평가받는 가치와 상관 없는 삶의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것을 '토착'이자 '하야'라고 새롭게 개념 정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후퇴하는 삶은 직업이나 거주조건 등 개인의 선택지가 줄어들지 않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도 분명히 한다. 그런 선택지가 보장되는 사회를 목표로 하면서 후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후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민주주의의 가치다. 21세기는 선진국을 비롯해 어느 나라든 다수의 표를 얻기 위해 상대 세력을 적대화하면서 대립과 혐오가 확산되고 있다. 민주주의에 누구나 회의를 표명하는 시대기도 하다. 하지만 민주주의 없이 공산당이 효율적으로 의사 결정을 하는 중국의 경우 체제를 유지하는 공안에 드는 비용이 군사력과 맞먹는다고 한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참을 수 없는 타자를 참아야 하고 적대감을 갖지 말아야 하며 늘 긴장해야 한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그런 어려움은 민주주의가 붕괴한 사회가 겪는 폭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려움이므로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도.
'후퇴'라는 화두를 가져온 것도 멋지지만,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과제들과, 그 안에서 일본 사회가 겪는 고유의 어려움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서 좋았다. 미래에 대한 어떤 담론보다도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가 들어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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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조건이 있다. 뛰어들어 선점하려면 국민이 모르게 은폐할 필요가 있다. 지금 인위적으로 과소지역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일이 알려지면 '인위적으로 과소 지역을 만들어내는 일'을 돈벌이로 연결하려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은 바라보는 시각만 달리해도 확실한 기회라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철저한 비밀 유지가 일극 집중 시나리오의 필수조건이다.
인구감소라는 국가 위기 상황을 맞은 정부는 다가올 미래를 대비한 선택지 제시는커녕 논의조차 시작하지 않는다. 이처럼 합의 과정을 생략하는 모습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정치인이 무능하고 게을러서라면 분명 설득력 있는 이유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가설은 국민이 관심을 두지 않아야 수익을 끌어낼 수 있기에 비밀 유지 노선을 채택하려는 것이다.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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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골고루 흩어져 전국 방방곡곡에서 생업을 유지해 나 갈 수 있다면 꽤 살기 좋은 사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지배 층은 그런 사회를 이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어떤 정당이라도 공약으로 내걸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구 과밀 지역과 과소 지역 의 양극화는 자본주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이야기가 좀 길어 질지도 모르겠다).
『자본론』에는 '자본의 시초 축적'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다. 마르크스는 16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영국 농촌에서 일어난 인구 불균형이 그것을 초래했다는 가설을 내세웠다.
노동량은 일정한데 노동자 수가 늘면 임금이 내려가지만, 줄어들면 임금은 올라간다. 이런 이치로 작동한다. 그래서 자본가는 당연히 자신의 사업장 노동자가 과밀해지길 바란다. 하지만 과밀을 만들어내려면 어딘가는 과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울타리 치기(인클로저)'의 본질이다.
'울타리 치기'란 간단히 말해 조상 대대로 농사지으며 살아 왔던 땅에서 "앞으로 너희는 이곳에서 살 수 없다."며 농민을 쫓 아내는 것을 말한다. 쫓아낼 구실은 얼마든지 있다. 영국의 경우 종교개혁으로 교회 토지는 사유지로 바뀌면서 교회령 주민은 쫓겨났다. 또한 방적업이 번성하자 지주들도 농경지를 목장으로 바꾸고 농민을 쫓아냈다.
마르크스가 열거한 가장 눈에 띄는 예로는 스코트랜드 서덜랜드 지역 공작부인이 벌인 울타리 치기다. 공작부인은 공국을 계승하자 모든 땅을 목양지로 바꾸기로 했다. 우선 80만 에이커 에 달하는 땅에 살고 있었던 3,000세대 15,000명에게 6,000에이 커 땅을 빌려주고 옮겨 살게 했다. 그들 농민이 살았던 땅은 29 개의 방목지로 나눠 각 방목지당 잉글랜드인을 한 가족씩 이주 해 오게 했다. 방목지로 변한 땅에 사는 인구는 이전에 비해 100 분의 1로 줄었고, 농민이 옮겨간 곳의 인구 밀도는 100배가 됐다. 울타리 치기란 바로 이런 것이다. p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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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인구 불균형이 일어난 이유는 19세기 100년에 걸 쳐 인구가 1,100만 명에서 3,700만 명으로 3.4배 증가한 데 있다. 확실히 그만큼 인구가 늘어난 상태에서라면 "인력 교체 따위는 언제든 가능해."라고 장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는 세계의 많은 선진국이 인구 감소를 겪게 된다. 일본에 이어 곧 중국과 한국도 인구 절벽에 들어간다. 유 럽도 마찬가지다. 많은 나라의 출생률은 이미 1.3명을 밑돌고 있 다. 인구 감소가 전 지구적 규모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경제 성장 을 목표로 한 자본주의를 지속하려면 논리적으로 볼 때 대규모 '제2차 인클로저'를 벌이는 일 말고는 방도가 없다. 다시 말해 인구 감소라는 상황을 지렛대 삼아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을 단번 에 대규모로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남아 있는 소수의 사람을 (서덜랜드 농민처럼) 도시의 좁은 지역에 밀어 넣는다. 그러 면 자본주의는 한동안 "너 아니라도 일할 사람은 많다."고 계속 지껄일 수 있다. 그러다 다시 사람이 부족해지면 더욱 좁은 곳으로 이주시키고 그 이외 지역은 주거 불능 지역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노동자를 과밀 지역 울타리 안으로 가둘 수 있는 한('아 윌레스와 거북이 처럼) 프롤레타리아가 전부 사라지는 날까지 자본주의는 연명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따라서 인구 감소 국면의 일본에서 '자본주의를 연명시키기 위한 제2차 인클로저가 시작됐다고 진단한다. p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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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수고를 게을리 하면 야생의 자연과 인간 문명 사이에 완충지대가 사라져 직접 접촉하게 되는 상황이 펼쳐진다. 인수 공통 감염병이 야생의 자연과 인간 문명 이 직접 접촉하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생긴 결과라면 산촌 소멸 리스크는 역학 차원에서라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서서히 후퇴하려면 야생 영역과 인간 영역 사이 경계선을 지키는 파수꾼이 필요하다. 많이 없어도 된다. 경계선에서 '여기 는 인간이 살아가는 영역'이라는 표식을 내걸고 생업을 영위해 나가는 정도로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자연의 침입을 어느 정도까지는 막을 수 있다. 만일 경비업체에 맡기거나 철조망을 치 거나 혹은 콘크리트 벽을 세우는 방식을 쓴다면 야생의 침입을 막을 수 없다. 사람이 그런 환경 속에서 양식을 구하면서 살아가 야만 한다. 왜 그런지는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벌어지는 청년들의 지역 이주는 그들이 문명사 적 임무인 파수꾼의 역할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결과라고 생각 한다. 그렇지만 인클로저 주의자들은 이런 흐름의 근간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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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후 위기 시대를 맞아 스웨덴 마르크스주의자 안드 레아스 말름이 전시 공산주의라는 말을 다시 소환하고 있다. 말름은 코로나19 위기 대처에서 전시 공산주의의 흔적을 발견하 곤 '환경 레닌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물론 전시 공산주의라는 말에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 톱다운 방식의 조치는 전체주의로 변질할 위험성이 크다는 걸 말름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이라면 좋든 싫든 국가 개입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실제로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봉쇄와 휴업 명령을 비롯해 입국 제한 조치가 필요해졌고, 사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이제껏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과감한 조치가 이뤄졌다. 작은 정부로는 더 이상 긴급 사태에 대응하기 어렵다 보니 국가 권력이 강해져야만 했다. 그때만큼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멈춘 것이다.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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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건 민주주의의 잔해일까. 아니면 플라톤을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가 경고한 것처럼 민주주의란 원래 그런 것으로 현재 그 본질이 전면적으로 드러난 것뿐일까. 지금 성급하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사회에 내재한 대립이 어느 임계치를 넘으면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권력을 쥐려고 하는 자는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적 대감을 부추기고, 무지라는 기초 위에 거짓을 재료로 성곽을 쌓 는다. 그런 까닭으로 미국에서 일어난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은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혐오 범죄라는 형태로 이와 비 슷한 사건은 이미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민주주의 현실이 이와 같다면 이쯤에서 후퇴하고 싶은 사람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일본 정치인의 행태만 보더라도 그들은 국민이 민주주의에 관심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후퇴해주길 바 라는 것 같다. 실제로 최근 실시한 국정 선거 투표율로 추측건대 대략 절반의 유권자는 이미 후퇴를 마쳤다.
그러나 여전히 민주주의를 폐지하고 다른 통치 형태를 도입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일당독 재 모델은 민주주의 절차(합의 형성 과정이 복잡하고 심지어 구경거리로 전락해가지만)를 생략하기에 일면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중국내 공안 유지를 위한 예산이 군사 예산을 웃돌 정도라고 한다. 너른 합의 형성도 없고, 동의도 구하지 않는 통치 형태는 민주주의와 다른 형태로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민주주의로부터 후퇴가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각오해야 할까. 명백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타자의 참기 어려움을 견 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보다 앞서 적대감을 갖지 않는 게 중요하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우리가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어려운 일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어려움은, 통치 권력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국가나 지역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직면한 그것, 즉 폭력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것 또한 알 아야 한다. p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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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 법학부 출신의, 선례를 중시하고 법무 감각이 있는 고 위 관료들이 일본의 급속 붕괴를 막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한다. 선례보다 권력자의 의중을 중시해 자의적으로 법 을 운용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젊은 세대 관료가 실권을 잡으 면 독재를 막는 최후의 방어선이 깨진다.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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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수주의화와 전체주의화는 서구가 세계에 뿌린 '민 족주의' '민주주의, 정확히 말하자면 '민족주의' '민주주의'와 '보편적 인권' '자유'의 이념 사이의 모순이 초래한 결과로 그 모순을 깨닫지 못하는 한 멈추게 할 수 없다. 일본의 진보 세력이 계속 패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국수주의화와 전체주의화의 진행 속도는 내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리고 있다. 그 원인을 최근에야 깨달았는데 의외로 일본의 쇠락 원인이 기도 한 관료의 무사안일주의와 선례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고이즈미 '개혁'으로 총리 관저는 관료 지배를 강화하기 시 작했고 2009년 하토야마 정권은 '사무차관회의'를 폐지했다. 2013년 아베 정권에 이르러서는 중앙부처 간부 인사를 일원화 해 관리하는 내각인사국을 신설했다. 21세기에 들어서 점점 관료의 힘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당시만 해도 고위 관료 대부분은 긍지가 있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전후 70년에 걸쳐 쌓아 온 선례와 판례를 지키며 저항해 왔기에 아베 정권은 결국 개헌하지 못했고, 일본을 전전의 치안유지법 체제와 같은 경찰 국가로 되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그런 에토스는 계승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요즘에는 젊은 관료의 이탈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공무원 종합직 합격자 중에서 도쿄대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이 최근 10년 동안 약 30%에서 약 15%로 절반 감소했다. 그것이 좋은 일인지 아닌지를 떠나 이제 관료에게서 자신들이 일본을 지탱 한다는 자긍심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일이 됐다.
2018년에는 모리모토 학원 문제가 터졌다. 아베 정권을 위 한 재무성의 공문서 위조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 공문서 관리 는 근대 이전 고대부터 관료제를 유지하는 기반이다. 관료가 정치에 제동을 거는 일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 2년도 지나지 않아 공문서 위조라는 명확한 형태로 실현됐다. p8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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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나의 여생은 패전 처리라고 언급했다. 여생을 패전 처리로 보낸다는 말은 다음 경기를 대비한다는 의미로 여기서 다음 경 기라는 건 다음 생을 말한다. 다시 말해 나는 이미 현생의 개인적 희망을 모두 잃었기에 다음 생의 희망을 위해 남은 생을 보내 고 있다.
다음 경기가 있으므로 태평양전쟁의 패전 처리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음 경기는 아브라함교에서 말하는 유일신 천국이든, 불교나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든 상관없으며 반드시 개인의 내세일 필요도 없다. 신토나 유교 아니면 민족 종교처 럼 조상신이 되어 후손을 살핀다 해도 상관없다.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은 신토나 유교와 세속적 내셔널리즘은 닮은 듯하지만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근대 서구에서 생겨난 세 속적 내셔널리즘은 생육과 친족 같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신토나 유교가 가진 인륜 기반이 없다. 부국강병을 구호로 내걸면 서 안에서는 지배 계급의 착취를 은폐하는 동시에 민중의 헌신 을 유도하고, 밖으로는 다른 국가를 경쟁하는 적으로 간주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내셔널리즘은 인륜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칸트와 헤겔은 잘못 생각했다. 내셔널리즘으로는 동아시아에서 정치• 경제•문화적으로 억압된 민족과 공존공영을 실현하 기 어렵다. 아무리 교언영색을 늘어놓더라도 일본인을 위해 타 민족을 이용했던 대일본제국과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패전 처리의 주체는 국가로서 일본이 아니라 개인 자신이나 뜻을 함께하는 동료가 되어야 한다. 마음을 함께하는 자라면 어느 민족인지를 따지지 않는다. 거꾸로 같은 일본인이라 고 해도 뜻을 공유하지 않는 자라면 신경 쓰지 않는 게 좋다. 어 느 시대나 뜻이 맞는 사람은 소수였다. 의지가 없는 자에게 함께 하자고 말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쓸데없는 일에 자신을 소모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 책의 독자 대부분은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에 태어났기에 전쟁 책임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선대가 심은 나무와 개척한 농토, 닦아 놓은 도로와 철도 그리고 가스와 수도, 일으킨 기업과 공장과 축적한 재산 등을 누리며 사는 한, 지금의 우리가 일으킨 전쟁이 아닐지라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p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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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퇴는 하야에 단초가 있다. 원래 인간 사회는 두 가지 원리로 이뤄져 있었다. 사회의 안과 밖, 차안과 피안, 문명과 자연, 상식과 비상식 등. 그런데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는 전자의 원리에 빠져 갇혀버렸다. 세상은 자본의 원리에 따라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본의 포섭에서 늘 벗어나 있어야 한다. 어느 쪽이든 하나의 원리만을 따르지 않고 두 가지 원리 사이를 왔다 갔다하다 보면, 문제가 발생해도 일단은 '자연스레' 해결된다. 나는 이것이 발을 땅에 딛는 과정이며, 토착이라고 부른다.
토착의 첫걸음은 하야이다. 대개 하야는 중앙 권력에서 내려오는 일을 의미한다. 이를 테면 메이지유신 공신 중 한 사람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요직을 내려놓고 고향 가고시마로 돌아간 것이다. 정치 세계에서 여당이 야당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정권 교체의 순간에도 하야라는 말을 쓴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의 하야는 '사회 밖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재정의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하야는 두 가지 원리를 넘나드는 것이며 토착의 첫걸음이 된다. 하야는 영원하지 않으며, 한 번 하야했따고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하야의 포인트는 사회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는 것과 거리를 두고 잠시라도 그런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 생활을 경험하는 데 있다. 쉽게 말해 다른 사람의 '요구를 신경 쓰지 않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p1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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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그것은 어딘가에 표준이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현대 일본인의 신앙이다. 이런 표준 신앙의 문제점은 무엇으로 난국을 타개할지 그 수단' 을 먼저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표준이라는 해답'을 전 제로 놓고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바람에 왜 이런 사태에 빠지고 말았는지, 애초에는 어떤 사태였는지 되물을 틈이 없었던 것이 다. 전례가 없는 사태가 발생하는 요즘 같은 시대일수록 표준에 해법이 있다는 전제 자체를 의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표준 신앙은 메이지 이후 중앙 집권 국가 구상 안에서 만들어 졌고, 인구가 늘면서 굳건하게 뿌리내렸다. 국가는 목표로 삼아 야 할 표준을 만들어 제공하고 그 모델을 펼쳐나갔다. 그렇게 표 준 신앙은 국민과 사회 속에 정식으로 자리 잡았다.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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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 : 그럼 그 마음이란 건 오빠 거 아냐?
토라 : 내 말은 그게 다르다는 거야. 말하자면 내가 다시 시바 마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생각해도 말이지. 있잖아. 마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라고. 어느새 나는 또 여기로 돌아오 고 있는 거지. 정말 괴롭다고.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다. 나는 이처럼 토라 같은 사람이 더 건전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지닌 날 것의 감각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날것의 감각이 제 대로 기능하면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 수 있다.
그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자본의 원리에 따라 점점 '머리' 쪽으로 획일화가 진행되고 있다. 일정한 직업 을 갖고 남과 같은 집에 살면서 똑같은 생활을 이루는 게 국가적 으로 권장됐다. 그 결과 확실히 경제는 발전했고 삶은 자유롭고 쾌적해졌다. 그러나 또 하나의 원리인 날것의 감각은 계속 소홀히 다뤄졌다. 날것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인간은 토라 식으로 말하자면, '어쩔 수 없는 인텔리'로서 현대를 살아가며 날 것의 부분을 취할 뿐이다. 이 지점에 우리가 하야해야 할 이유가 있다.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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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오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크게 두 가지 양태가 있다 고 말한다. 그중 하나는 진보하는 '문명의 시간'이다. 되돌아가 는 일이 없이 반드시 앞으로만 나아간다. 예컨대 문명사회가 이 룬 도구나 과학 기술은 절대로 후퇴하지 않고 어제보다 오늘 그 리고 오늘보다 진보한 내일을 맞는다. 2021년보다 2022년에 생 산한 컴퓨터의 성능이 좋아졌다면 아무도 놀라지 않지만, 기능 이 줄었다면 모두 놀랄 것이다. 이런 문명의 시간은 늘 일직선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앞에서 언급한 세상의 주류가 갖고 있 는 가치관과 친화성이 높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하나는 순환하고 회귀하는 '자연의 시간'이다. 이를 테면 지구는 하루에 한 번 자전하면서 1년에 걸쳐 태양의 주위를 돈다. 이런 사이클은 태양계가 생겨난 48억 년 전부터 변함없 는 것으로 전혀 진보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지구는 공전함으로 써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겨울로 바뀌고 겨울은 다시 봄으로 돌 아간다. 빙글빙글 회전할 뿐 앞으로 나아가진 않는다. 야마오가 말하길 생물로서 인간의 몸과 마음은 이런 순환의 시간에 속한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 성장하고 노화를 거친 후 죽는데, 이런 삶의 사이클 역시 진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p14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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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무, 풀, 곤충이나 물고기, 멧돼지나 사슴 모두 순환 하는 시간 속에서만 살고 있다. 직진하는 시간에 살고 있는 건 인간이 유일하다. 직진하는 문명의 시간은 오로지 인류만 갖는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왜 인류가 지구의 지배자처럼 오만하게 행동하고 내 것인 양 으스댔는지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 다. 직진하는 데 경쟁자가 없으니 독주할 수밖에. 동시에 인류가 진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들도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지구를 파괴해 온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직진하는 문명의 시간에는 한계가 없다. 순환하는 자연의 시간이라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 추위가 극에 달해도 다시 따뜻한 봄으로 회귀한다. 하지만 문명의 시간 속에서는 겨울 다음은 더욱 추운 '겨울 2.0'이 찾아오는 느낌이다. 늘 한 방 향으로 나아갈 뿐 흔들림이 없으므로 제동을 걸어도 소용이 없 다. 인류가 지금처럼 문명의 시간에만 매진한다면 머지않아 자 연은 파괴되고 멸종의 길로 들어서는 게 자명해 보인다.
무엇보다 인류가 멸종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일은 오히려 자연계의 '순환하는 시간'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반증 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덧없으며 나타났다가도 사라 지고, 다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가 사라지 는 건 자연의 섭리이므로 한탄할 일은 아니다.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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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이 부족하면 만들면 된다. 실제로 많이 생겼다. 산모 와 아이에 대한 정책지원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육아세대 포괄 지원센터'도 만들어졌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고, 운영도 미숙한 면이 있지만 앞으로 나아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임신과 출산에 많은 돈을 들여야 하니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 아마 이것도 머지않아 정책적으로 지원해주지 않을까 싶다. 산모를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시무라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의 호불호나 기분, 성적 취향은 정치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섹스리스에는 손쓸 방도가 없 다. 업무에 쫓기는 젊은 세대를 위해 근무 시간을 줄이거나 휴가 를 늘려주고 급여를 인상하는 정책을 펼칠 수는 있겠지만 그렇 다고 섹스를 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건강 교육'이나 '성의학' 시간에 피임 강의를 한다는 게 헛발질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브라질 여성은 난관 수술을 원한다고 얘기했지 만, 일본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섹스하지 않는 부부가 많은데 난관 수술까지 하면서 피임한다는 이야기도 결국 아귀가 맞지 않는다. 지금 일본에서는 성적 행동, 성관계로부터 withdrawal, 즉 후퇴가 진행되고 있다. 가장 근원적 행동으로부터 후퇴인 것이다.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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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일본이 앞으로 '사회 전체적으로 후퇴' 할 때 어디를 목표 지점으로 삼아야 하는지, 또 그곳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인지 설명과 함께 제안하려고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기존의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먼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나 거주지역의 선택지가 선진국 수준' 정도는 되는 사회를 목표로 후퇴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 다시 말해 일본에서 태어나 살아간다는 이유로 개인이 인생에서 선택할 수 있는 중요한 선택지가 적어지는 방향으로 후 퇴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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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나의 체험에서 하나의 깨달음도 얻을 수 없다면, 그것은 현재 시스템이 만들어낸 말이 나 가치관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시스템의 전환을 이루는 게 어렵다고 생각하는 한 후퇴는 어렵다고 본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경쟁원리를 전제로 경제 성장이나 인구 감소 문제를 바라보면, 당연히 경제 성장은 반드시 이뤄내야 할 일이고, 인구 감소는 풀어내야 할 숙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복지국가? 한마디로 부드러운 공산주의 아냐? 아니면 약자 의 떼쓰기를 받아주는 거지.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 고!" 당연히 그런 기분도 들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경쟁원리 그 자체를 대신할 수 있는 원리가 어떤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인지, 거기에는 어떤 희망과 함정이 기다 리고 있는지,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이미지로 보여줄 수 있느냐 이다. 그렇지 못한 이미지라면 경쟁원리에서 봤을 때 그저 싸움에 진 개의 울부짖음이요, 이상론이자 탁상공론으로 여겨질 것 이다. 원리를 변경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경쟁원리에서 내려선 지점의 모습은 그 전까지 생각해왔던 것과 전혀 달랐듯이, 실제로 자유 경쟁, 자기 책임, 자 기계발, 세계 경쟁 같은 사고방식과 대척을 이루는 세계는 아마 생각했던 바와 완전히 다른 모습일 거라고 확신한다. 내가 서 있는 세계의 원리에서 벗어나 다른 원리의 언어로 생각할 수 있다면 이미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시인 다니가와 간은 "먼저 이미지부터 바꿔라."라고 했다. 이미지를 바꾼다는 건 단지 목표나 착지점을 변경하는 게 아니라 현재 유통하는 사고방식이나 말투 자체를 바꾸는 일이나 다름없다.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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