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본질이 무엇인가. 소설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소설가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는 흔치 않다. 대부분 소설가는 작품으로만 이야기한다. 문학론은 평론가들의 관심사다. 하지만 이 책은 작가가 직접 들려주는 보기 드문 소설론이다. 그 어떤 평론가보다도 소설의 본질을 명징하게 꿰뚫고 있다.
밀란 쿤데라는 세르반테스에서 카프카까지, 자신의 작품도 포함하여 근대를 관통해온 다양한 작품을 경유하면서 소설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목은 '소설의 기술'이지만 이 '기술'은 'art'의 번역이다. 예술로서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면 되겠다. 단 한 장도 버릴 게 없는 소설에 대한 훌륭한 철학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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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각자의 작품에는 소설의 역사에 대한 어떤 함축적인 통찰이,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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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설)에게 있어 '유럽의'라는 관형어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더불어 탄생하여 지리상 유럽 바깥까지 펼쳐진(가령 아메리카 대륙 같은) 정신적 동질성을 의미했다. 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철학은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전체로서의 세계)를 풀어야 할 의문의 대상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 세계를 의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러저러한 실제적인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앎에의 열정이 사람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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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도약은 사람들을 전문화된 분야의 동굴로 몰아넣었다. 지식이 진보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시야에서 세계와 자기 자신의 총체성을 잃어버렸고, 이리하여 후설의 제자인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망각'이라는, 거의 마술적이고도 멋있는 표현 속으로 함몰되었다.
일찍이 데카르트가 말한 바처럼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성장했던 인간은, 이제 자연을 초월하고 능가하며 소유하는 (기술과 정치, 역사의) 힘들에 쓰이는 단순한 사물이 되어 버렸다. 이 힘들에 비해 인간의 구체적 존재, 그 삶의 세계는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않으며 아무런 관심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가려지고 잊힌 것이다.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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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저 두 현상학자들은 근대를 판단하는 데 있어 세르반테스에 대한 생각을 소홀히 한 것이리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철학과 과학이 인간의 존재를 망각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바로 이 망각된 존재를 찾아내려는 유럽의 위대한 예술이 세르반테스와 더불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 보인다는 것이다. (...)
세르반테스의 동시대인들과 더불어 소설은, 모험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새뮤얼 리처드슨과 더불어 소설은 '내면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와 같은 감정의 은밀한 삶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발자크와 더불어서는 역사에 뿌리내리는 인간을 발견한다. 플로베르와 함께 소설은 그때까지 미지의 세계였던 일상의 지평을 탐사한다. 톨스토이와는 사람들의 결정과 행위에 개입하는 비합리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시간을 탐색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와 더불어 붙잡을 수 없는 과거의 순간을, 제임스 조이스와는 붙잡을 수 없는 현재의 시간을 탐색하는 것이다. 토마스 만과 더불어서는 시간의 밑바닥에서 유래하여 우리 발걸음을 원격 조종하는 신화의 역할을 묻는다.
소설은 근대의 시초부터 줄곧, 그리고 충실히 인간을 따라다닌다. 후설이 서구 정신의 요체로 간주한 '앎에의 열정'이 이제 소설을 사로잡아 소설로 하여금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살피게 하고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세계'를 영원한 빛 아래 보존한다. "오직 소설이 발견할 수 있는 것만을 발견하라. 그것만이 소설의 유일한 존재 이유다."라는 헤르만 브로흐의 말을 나는 이런 뜻으로 이해하며, 그가 거듭 되풀이하는 이 말에 담긴 그의 고집에 공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존재의 부분을 찾아내려 하지 않는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이다. 앎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모럴인 것이다. p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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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우주와 그 가치의 질서를 관장하고 선과 악을 가르고 모든 사물에 뜻을 부여했던 곳을 서서히 떠나 버릴 때, 돈키호테는 집을 나간다. 이제 그에게 세계는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지고의 심판관이 부재하는 이 세계는 돌연 엄청나게 모호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늘의 유일한 진리는 인간들이 나누어 갖는 수많은 상대적인 진실들로 흩어져 버렸다. 이리하여 근대가 탄생했고 이와 더불어 이 세계의 이미지이며 모델인 소설 또한 탄생했다. (...)
세르반테스처럼 세계를 애매성으로 이해하고 유일한 절대 진리가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상대적 진실(가공의 자아를 구현해 내는 진실)들의 더미와 맞서야 한다는 것, 따라서 불확실함의 지혜를 유일한 확실성으로 지닌다는 것은 그에 못지않은 큰 힘을 요구한다. p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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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선악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세계를 원한다. 이해하기에 앞서 심판하고자 하는 타고난,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 욕망 위에 수립된다. 이것들은 소설의 상대적이고 애매한 언어를 자기네들의 명확한 교조적 담화로 바꾸지 않고서는 소설을 인정하지 못한다. (...)
이러한 '...' 에는 인간 현상의 본질적인 상대성을 감당할 수 없다는 무력감, 지고의 심판관이 부재함을 직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담겨 있다. 소설의 지혜(불확실함의 지혜)를 수용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 무력감 때문이다.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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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신의 영혼이라는 괴물하고만 싸워야 했던 평화로운 시대는 조이스와 프루스트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카프카, 하셰크, 무질, 브로흐의 소설에서 괴물은 바깥에서 온다.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이 역사는 모험에 나서는 사람들의 행렬과는 더 이상 비슷하지 않다. 비인격적이고 다스릴 수도, 예측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바로 이 순간(1차대전 직후)에 중부 유럽의 위대한 소설가들은 근대의 종말적 역설을 느끼고 체험했던 것이다. (...)
이 소설가들은 '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들은 종말적 역설이라는 상황 속에서 모든 실존적 범주들이 어떻게 돌연히 그 의미를 달리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K 같은 사람의 자유로운 행위가 완전히 공허한 것이라면 도대체 모험이란 무엇인가? (...) 사랑을 나누는 잠자리에서까지도 K가 성에서 파견된 두 사람과 떨어져 있을 수 없다면, 사생활과 공생활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 경우 고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믿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부담이고 고통이고 저주인가, 혹은 반대로 막강한 집단성에 억눌린 가장 소중한 가치인가? p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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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그때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소설은 근대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 현상의 상대성과 애매성에 기초한 이 세계의 모델인 소설은 전체주의적 세계와는 양립할 수 없다. 이 비양립성은 광신자들을 이교도와 구분 짓고 인권 운동가를 고문 기술자와 구분 짓는 비양립성보다 더 골이 깊다. 이것은 정치, 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일한 진리 위에 기초한 세계와 소설의 애매하고 상대적인 세계는 각기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전체주의적인 진리는 상대성과 의혹과 질문을 제거하고, 따라서 그것은 내가 소설의 정신이라 부르는 것과 어울리지 못한다.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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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어버린 19세기의 상상력은 돌연 프란츠 카프카에 의해 일깨워졌다. 그는 그에 뒤이어 초현실주의자들이 표방했으나 진실로 성취하지는 못했던 꿈과 현실 뒤섞기에 성공했다. 사실 이것은 이미 노발리스에 의해 예견되었떤 소설의 오랜 미학적 욕망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연금술적 기술을 요구하는 일이었고 백 년이 지난 후 카프카만이 이 기술을 터득해냈다. 이 엄청난 발견은 한 흐름의 완성이라기보다는 예기치 않았던 신천지였다. 이것은 소설이 꿈에서처럼 상상력이 발산되는 장소라는 것과, 그럴듯함이라는, 얼핏 보아 도저히 피해 나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명령을 소설이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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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라는 흰개미가 오래전부터 인간의 삶을 갉아먹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위대한 사랑조차도 종국에는 하찮은 추억의 잔해로 축소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특성은 이 저주를 흉악하게 강화한다. 인간의 삶은 사회적 기능으로 축소된다. 한 민족의 역사는 몇 개의 사건들로 축소되고 그나마 이 사건들까지도 편향된 해석으로 축소되어 버린다. 사회생활은 정치적 투쟁으로 축소되고 이는 다시 지구상의 두 강대세력만의 대결로 축소된다. 인간은 진정 축소의 소용돌이 속에 처했으며, 이 소용돌이 속에서 후설이 말했던 "삶의 세계"는 치명적으로 깜깜해지고 존재는 망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소설의 존재 이유가 삶의 세계를 영원한 빛 아래 간직하고 우리를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라면 오늘날 소설의 존재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필요한 게 아닐까? (...)
그러나 애석하게도 세계의 의미뿐 아니라 작품의 의미까지 축소하는 흰개미는 소설마저 갉아먹고 있다. (모든 문화와 마찬가지로) 소설 역시 점점 매스미디어의 수중에 장악되고 있다. (...) 그것은 많은 사람들, 인류 전체가 받아들일 수 잇는 단순하고 상투적인 똑같은 내용들을 전세계에 퍼뜨린다. 그것들이 가진 서로 다른 기관지들이 상이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표현적 상이함의 이면에는 동일한 정신이 군림한다. 우익에서 좌익까지 널려있는 '타임'이나 '슈피겔' 같은 미국이나 유럽의 시사 주간지들을 훑어보기만 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것들에는 모두 삶에 대한 한결같은 비전이 있다. (...)
매스미디어가 정치적 다양성의 이면에 똑같이 감추고 있는 정신, 그것이 우리 시대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소설의 정신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p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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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정신은 복잡함의 정신이다. 모든 소설은 독자들에게 "사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라고 말한다. 소설의 영원한 진실은 이것이지만, 묻기도 전에 존재하면서 물음 자체를 없애버리는 단순하고 성급한 대답들의 시끄러움 때문에 점점 들리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정신에서 옳은 것은 안나 카레니나 중 한 사람뿐이다. 앎의 어려움과 잡을 수 없는 진실의 어려움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하는 세르반테스의 원숙한 지혜는 거추장스럽거나 쓸데없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소설의 정신은 연속의 정신이다. 모든 소설은 그에 앞선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며, 소설에 앞선 모든 체험을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정신은 현재에만 고정되었다. 이 현재는 너무 넓고 방대해서 우리의 지평에서 과거를 몰아내고 시간을 현재의 순간만으로 축소해버린다. 이 같은 체계에 휩쓸린 소설은 더 이상 작품(영속하게 하는 것, 과거를 미래에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건들과 다를 바 없는 시사적인 사건이며, 내일 없는 몸짓일 뿐이다.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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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에게 인간의 내면적 세계란 하나의 기적이었고 우리를 끊임없이 경탄케 하는 무한함이었죠. 그러나 카프카의 경이로움은 이런 데 있는 게 아니에요. 그는 인간의 행위를 결정짓는 내적 동기가 어떤 것이냐를 묻지 않습니다. ㅡ그가 제기하는 물음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그의 물음은, 내면적 동기가 더 이상 아무런 무게도 지니지 못하게 될 만큼 외부적 결정이 압도적인 것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아직 인간에게 남아있는 가능성이란 어떤 것이냐라는 것이죠. 정말이지 K에게 동성애적 충동이나 혹은 그 이면에 고통스러운 사랑 이야기가 있었다 한들, 무엇이 그의 운명이나 태도를 바꾸어 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p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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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몽 : 당신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지요.
(...) 쿤데라 : 제가 이른바 심리소설의 바깥에 있다고 하는 것은 제가 제 작품 속 인물들의 내면적 삶을 박탈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것들은 제 소설이 우선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수수께끼, 다른 문제라는 뜻이죠. 또한 제가 심리에 매료된 소설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프루스트 이후의 상황 변화는 저로 하여금 오히려 향수에 젖게 만듭니다. 프루스트와 더불어 큰 아름다움이 우리에게서 서서히 멀어져 간 겁니다. (...)
달리 말하면 심리적인 방식 외에 자아를 포착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은 어떤 것이냐라는 게 될 수 있겠지요. 제 소설에서 자아를 포착한다는 것은 실존의 본질적 문제를 포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실존적 약호를 포착한다는 거죠. (...) 테레자에게 그것은 육체, 영혼, 현기증, 허약함, 목가, 낙원 같은 것들이죠. 토마시에게는 가벼움, 무거움이고요. 이해받지 못한 말들이란 제목이 붙은 장에서 (...) 프란츠와 사비나의 실존적 약호들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이 말들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의 실존적 약호 속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이 약호들이 추상적으로만 검토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행동과 상황을 통해 점차 나타나지요. (...)
현기증은 테레자를 이해하는 열쇠예요. 당신이나 저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어는 아니죠. 그렇지만 당신이나 저나 적어도 이런 종류의 현기증이 우리의 가능성이라는 것, 실존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알지요. 저로서는 이런 가능성, 이 현기증을 이해하기 위해서 테레자라는 '실험적 자아'를 만들어 내야만 했던 겁니다. p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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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몽 : 자아를 포착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행동에 의해서. 그리고 내면적 삶 속에서. 한편 당신은 자아라는 것은 그 실존적 문제의 본질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거죠. (...)
쿤데라 : 소설의 인물은 살아있는 존재의 모방이 아니에요. 상상적 존재지요. 실험적 자아고요. 이렇게 하여 소설은 그 시작과 함께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돈키호테를 실제 인물이라고 생각하기는 무척 어렵지요. 그러나 우리 기억에서 그보다 더 생생한 인물이 누가 있습니까? (...)
제게 테레자의 어머니에 대해 언급한 것은 테레자에 관한 정보 목록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가 소설의 주된 테마이기 때문이고 테레자는 "어머니의 연장"에 지나지 않으면서 이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 때문인 거죠. (...) 반대로 그의 남편 토마시의 경우 어린 시절이나 아버지, 어머니, 가족 등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의 생김새나 몸매도 전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건 그의 실존적 문제의 본질이 전혀 다른 테마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죠. 이렇게 아무런 정보가 없다고 해서 그에게 '생동감'이 덜한 것은 아닙니다. 인물에게 생동감을 부여하는 것은 그의 실존적 문제의 끝까지 간다는 의미이고, 또 이것은 여러 상황과 모티프, 심지어는 그를 이루는 몇몇 단어에까지 간다는 의미 외에 더 이상은 없으니까요. p5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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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는 인간 실존의 역사적 차원을 검토하는 소설과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고 특정한 시기의 사회를 묘사하는 소설, 즉 소설화된 역사적 연대기로서의 소설이 있습니다. 당신도 프랑스 혁명에 관한 소설이나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소설, 혹은 1914년이나 소련의 집단화, 또는 1984년에 대한 소설을 모두 아시겠지요. 이런 것들은 모두 비소설적인 지식을 소설 언어로 옮겨놓은, 대중화를 위한 소설이지요. 그러나 거듭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소설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소설만이 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겁니다.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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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원칙이란, 역사적 정황은 소설 속 인물에게 새로운 실존적 상황으로 이해되고 분석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 자신의 나약함에 도취된 그녀는 토마시의 곁을 떠나 프라하로, 즉 "약한 사람들의 도시"로 돌아오는 겁니다. 여기서 역사적 상황은 배경이나 그 앞에서 인간적 상황이 벌어지는 장식물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인간적 상황이고 확대되어 가는 실존적 상황이지요. p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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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기술이 많은 기적을 이루는 데 성공한 후로 이 '주인 겸 소유자'는 문득 그가 지닌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은 자연의 주인도 아니고(자연은 서서히 이 지구상에서 없어져 가니까요) 역사의 주인도 아니며(역사는 인간에게서 벗어나지요) 자기 자신의 주인도 아니라는 것(인간은 영혼이라는 비합리적인 힘의 인도를 받습니다)을 깨닫게 되었죠. 신도 사라져 버렸고 인간도 더 이상 주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주인은 누굽니까? 지구는 주인 없이 공허 속을 전진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죠.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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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지요. 반대로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아닙니다. 소설은 실제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탐색하는 겁니다. 그런데 실존이란 실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인간의 가능성의 영역이지요. 인간이 될 수 있는 모든 것,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소설가들은 이러저러한 가능성들을 찾아내 실존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죠.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세계-안에-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인물과 그의 세계를 '가능성'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겁니다. 카프카에게서는 이 모든 것들이 아주 명확히 나타납니다. 카프카적인 세계는 이미 알려진 어떤 현실과도 비슷하지 않습니다. 인간적 세계의 극단적인, 그러나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성이죠. 이러한 가능성이 우리의 실제 세계를 통해서 나타나고 또 우리의 미래를 미리 그려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카프카의 예언적 차원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설혹 그의 소설에 예언적인 것이 전혀 없다 하더라도 가치를 잃는 것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존의 가능성을 포착하고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누구인가를 보게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알게 해주니까요.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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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어떤 역사적 상황을, 표출되지는 않았으나 인간 세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가능성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할 것입니다. 역사적 현실에 충실하다는 것은 소설의 가치와 관련해서 볼 때는 어쨌든 이차적이죠. 소설가란 역사가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닙니다. 실존의 탐구자일 뿐이죠.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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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인간의 가능성이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우선 세계가 어떤 것이냐에 대한 일정한 견해를 필요로 한다. 즉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가설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카프카가 본 세계는 관료화된 세계다. 그 관료성이란 다른 여러 사회 현상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세계의 본질로서의 관료성이다.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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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는 자기 논리의 끝까지 가기를 고집하는 이성의 광기를 포착한다. 톨스토이는 그 반대다. 그는 비논리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의 개입을 드러내 보여준다. 톨스토이를 참조함으로써 브로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리는 결정에서 비합리적인 것이 맡는 역할에 대한 탐구'라는, 유럽 소설의 위대한 탐구의 맥락 속에 자리잡게 된다.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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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 철학은 소설을 포용할 수 없지만 소설은 시나 철학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더라도 소설의 정체성을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다른 장르들을 수용하고 철학적, 과학적 지식을 흡수하는 경향이 바로 소설의 특징이다. 따라서 브로흐의 시각에서 볼 때 '다주제적'이라는 용어는 '소설만이 찾아낼 수 있는 것', 즉 인간의 존재를 비추기 위해 모든 지적 방법과 시적 형식들을 동원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소설 형식의 심층적인 변화를 내포한다는 사실은 두말할 것도 없다.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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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몸으로 들어오면 성찰의 본질이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소설 바깥에서 사람들은 확인의 영역에 있죠.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 확신합니다. 경찰이건 철학자건 수위건 다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소설의 영역에서는 확인하지 않습니다. 놀이와 가설의 영역이거든요. 그러니까 소설적 성찰이란 본질적으로 의문적이고 가설적인 겁니다.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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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위대한 사상가인 것은 다만 소설가인 그를 통해서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가 인물들을 통해 범상치 않을 정도로 풍부하고 새로운 지적 세계를 창조해낼 줄 안다는 겁니다. (...)
그러니까 도스토옙스키가 자신의 생각을 샤토프에게 투영하기는 해도 그 생각은 순식간에 상대적인 것이 됩니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서도, 일단 소설의 몸으로 들어오면 성찰의 본질이 달라지게 된다는 규칙, 교조적인 생각이 가설적인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는 규칙은 지켜지는 것이죠.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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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항상 소설을 두 가지 차원에서 구성합니다. 첫 번째 차원에서는 소설적 이야기를 구성하죠. 저는 그 위에다가 주제를 전개합니다. 주제는 소설적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에 의해 끊임없이 가공됩니다. 소설이 주제를 버리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 만족해 버리면 싱거워지고 맙니다. 반대로 어떤 주제는 이야기 바깥에서 독자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어요. 이러한 주제의 취급 방식을 저는 일탈이라고 부릅니다. 이 일탈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는 잠깜 동안 소설의 이야기를 포기한다는 거죠. 예를 들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키치에 대한 생각은 모두 일탈이죠. 소설의 이야기를 버리고 주제(키치)를 직접 공략하는 겁니다.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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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란 실존적 질문이죠. 그리고 저는 점점 더 그런 질문이 결국은 특정 단어들, 주제어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라는 것을 깨닫게 돼요. 이런 생각에 따라 저는 소설이 우선적으로 몇몇 기본 단어 위에 기초한다고 주장합니다. (...) 이 주된 다섯 단어들은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분석되고 연구되고 정의되고 다시 정의되어, 마침내 실존의 범주로 변환됩니다. 이 소설은 마치 집 한 채가 몇 개의 기둥 위에 세워진 것과 마찬가지로 몇 개의 범주 위에 세워진 것이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기둥들이란 무거움, 가벼움, 영혼, 육체, 대장정, 하찮은 것, 키치, 동정, 현기증, 힘, 허약함 등입니다.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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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초에 있어 유럽의 위대한 소설들은 재밋거리였고 진정한 소설가들은 모두 그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습니다! 재미라는 것이 진지함을 없애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는 '이별의 왈츠'를 통해 인간은 이 땅 위에서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들인가, 이 지구를 '인간의 발톱으로부터 해방'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지극히 무거운 문제를 지극히 가벼운 형식과 결합하는 것이 바로 제가 줄곧 매달렸던 문제죠.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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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이전에도 간혹 소설가들은 제도가 다양한 개인적, 사회적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하는 격투장이라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카프카에게 제도는 그 자체의 법칙만을 따르는 매커니즘이다. 그 법칙은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도 알 수 없고, 인간적 이해관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따라서 이해되지도 않는다.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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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콜리니코프는 무거운 죄의식을 감당할 수가 없어 평온을 찾기 위해 스스로 처벌받고자 한다. 이것은 잘못이 벌을 청하는 잘 알려진 상황이다.
카프카에게서 이러한 논리는 뒤집어진다. 벌받는 자는 자기가 왜 벌을 받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부조리함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벌받는 사람은 평온을 찾기 위해 자기가 당하는 고통을 합리화하고자 한다. 벌이 잘못을 만드는 것이다. p14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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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민주주의적인 사회 역시 비인격화와 관료주의화의 과정을 겪고 있다. 지구 전체가 이 과정의 무대가 되어 버렸다. 카프카의 소설은 이러한 세계에 대한 몽환적이고 상상적인 과장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그것의 산문적이고 물질적인 과장이다.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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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 사회, 특히 그 극단적 형태의 전체주의 사회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없애버리는 경향이 있다. 점점 더 불투명해지는 권력은 시민들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투명해지기를 요구한다. 이 같은 비밀 없는 삶의 이상은 모범적인 가정의 이상과도 일치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나 어머니 앞에서 어떤 것도 숨겨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민은 당이나 국가 앞에서는 어떤 것도 숨길 수 있는 권리를 갖지 못한다. 전체주의 사회는 선전을 통해 평화로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하나의 대가족'처럼 보이려는 것이다.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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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주 카프카의 소설이 작가 자신의 아주 개인적이고 사적인 갈등의 투영인지, 아니면 객관적인 '사회 장치'에 대한 묘사인지를 알고 싶어한다.
카프카적인 것은 내면 영역에만 제한되는 것도 아니고 공적 영역에만 제한되는 것도 아니다. 이 둘 모두를 감싼다.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의 거울이고,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의 반영이다.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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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카프카의 주인공들이 지식인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투영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레고리 잠자에게 지식인다운 면모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아침에 벌레로 바뀐 모습으로 일어났을 때 그의 유일한 걱정거리란 어떻게 이런 상태로 제시간에 사무실로 출근할 수 있을까라는 것뿐이다. 그는 고용인, 관료이며, 카프카의 인물들은 모두 이런 인물들이다. 관료의 모습이란 사회적 신분 유형(졸라 같은 작가라면 이랬을 것이다)으로가 아니라 인간이 한 가지 가능성, 근원적 존재 방식의 하나로 연상된다.
관료들로만 구성된 관료주의 세계에서는 첫째, 자발성도 창의성도 행동의 자유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명령과 규율일 뿐이다. 그것은 복종의 세계다.
둘째, 관료는 거대한 행정 활동 중 극히 일부만을 담당할 뿐이다. 그에게는 거대한 활동의 목적과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행위가 기계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세계이며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세계다.
셋째, 관료들은 단지 익명의 사람들이나 서류하고만 관계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추상의 세계다.
이 같은 복종과 기계와 추상의 세계, 이 관청에서 저 관청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인간의 유일한 모험인 이 세계에 소설을 자리 잡게 하는 일, 바로 이것이 서사시의 본질과는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어떻게 카프카는 이 우울한 비시적 소재를 매혹적인 소설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을까? (...)
그는 관료주의적 현상을 통해 인간과 인간 조건, 인간 미래의 근본적인 중요성뿐만 아니라 관청의 유령 같은 성격에 내포된 시적 잠재성까지도 보았던 것이다. (...)
관청이라는 소도구를 거대한 세계의 규모로 확장해 놓음으로써 카프카는 뜻하지 않게, 그가 전혀 체험해 보지 못했던 사회와 오늘날 프라하 사회 사이의 흡사함을 통해 우리를 매료하는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사실 전체주의 국가란 하나의 거대한 행정조직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노동이 국가의 관리 아래 놓였기 때문에 모든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고용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고, 판사도 판사가 아니며, 상인도 상인이 아니고, 성직자도 성직자가 아니다. 이들 모두가 국가의 관료인 것이다. p16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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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최면적인 시선, 자신의 죄를 스스로 찾아내려는 절망적인 노력, 추방과 추방당하는 고통, 절대 복종에의 처단, 현실적인 것의 유령적 성격과 서류의 마술적 현실성, 사생활에 대한 끊임없는 침해 등, 역사가 그 엄청난 시련의 형태로 인간에게 자행해온 이 모든 실험들을 카프카는 (몇 년 앞서서) 자신의 소설에 현실화했던 것이다.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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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있어 쓴다는 것은 배후 그늘에 불면의 어떤 것('시')을 숨기고 있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다. 시가 우리에게 (놀랍고도 돌연한 폭로를 통해) 무엇보다 먼저 경탄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사실 시인이 "저 뒤쪽 어디에" 숨겨진 '시'를 찾아내려 하는 대신 이미 알려진 어떤 진실(그것은 저절로 주어지고 '앞'에 있다)에 봉사하기 위해 '참여'한다면, 그는 시의 고유한 임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상정된 진실이라는 것이 혁명이라 불리든 항의라 불리든, 기독교 신앙이라 불리든 무신론이라 불리든, 그리고 그것이 보다 정의롭든 그렇지 않든, 이런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발견(이는 곧 경탄이다)하는 진실 외 다른 진실에 봉사하는 시인은 가짜 시인이다.
내가 카프카의 유산에 이토록 열렬히 집착하는 것이나 그것을 내 개인적 유산으로 옹호하는 것은, 모방할 수 없는 것을 모방하는 것(그리고 카프카적인 것을 한 번 더 찾아내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의 소설들이 바로 소설(소설이라는 시)의 근본적인 자율성의 모범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에 의지하여 프란츠 카프카는 다른 어떠한 사회학적, 정치학적 성찰도 우리에게 말해줄 수 없었던(우리 세기에 입증된 그대로의) 인간 조건을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었다. p167-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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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바람둥이(이들은 모든 여자들에게서 자신의 이상을 찾는다)와 서사적 바람둥이(이들은 여자들에게서 여성적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을 추구한다). 이것은 서정적인 것과 서사적(극적)인 것 사이의 고전적인 분류와 대응한다. (...)
즉 서정적인 것은 자신을 고백하는 주체의 표현이고 서사적인 것은 세계의 객관성을 파악하려는 정열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내게 있어 서정적인 것과 서사적인 것은 미학의 영역을 벗어난다. 그것들은 자신과 세계와 타인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태도의 가능성을 표상한다. p18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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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란 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을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 형식.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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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발견해내는 실존의 모든 양상들은 아름다움으로 발견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덧붙여야만 한다. 최초의 소설가들은 모험을 발견했다. 모험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은 그들 덕분이며 우리가 모험을 사랑하는 것도 그들 덕분이다. 카프카는 비극적으로 유폐된 인간 상황을 그렸다. 예전에 카프카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연구하는 작가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느냐 아니냐를 놓고 많은 논쟁을 벌였다. 아니다. 희망은 없다. 있다면 다른 것이다. 삶을 부정하는 이 상황까지도 카프카는 기이한, 검정색의 아름다움으로 발견해낸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마지막 승리다. 예술에서 아름다움이란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이 갑자기 뿜어내는 빛이다. 시간은 위대한 소설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이 빛을 결코 흐리게 만들지 못한다. 인간의 실존이란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망각되어서 소설가들이 발견해낸 것은 아무리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니까.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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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 "구상에서 작품까지의 길은 무릎으로 기어가는 길이다." 나는 블라디미르 홀란의 이 구절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펠리스에게 쓴 편지들과 '성'을 같은 수준에 놓기를 거부한다.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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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 소설의 명상적인 줄거리는 몇몇 추상적인 단어들의 얼개로 지탱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풍조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 몇 개의 단어들을 더할 나위 없이 정확히 선택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정의하고 또다시 정의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종종 소설은 덧없이 달아나는 몇몇 정의들을 붙잡으려는 길고 긴 추적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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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주의는 비록 겉으로는 공적인 일을 관장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익명적이고 암호화되어 이해할 수 없다. 반면 사적 개인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건강 상태와 재정 상태, 가족 상황 등을 밝혀야 하고 또 만약 매스미디어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 내리기만 하면 그는 심지어 사랑, 질병, 죽음에서조차도 은밀한 순간이라곤 한순간도 찾을 수 없게 된다. 타인의 은밀한 삶을 훼방하고 싶어하는 것은 매우 오래된 공격성 중 하나인데, 오늘날 그것은 제도화되고(관료 행정 문서들, 언론 기관 보고서들) 도덕적으로 정당화되었으며(알 권리라는 것은 인간의 기본권 가운데 으뜸 가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투명함이라는 멋진 말을 통해) 시화되었다. p20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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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량기사 K가 절망적으로 찾는 것은 인간적 유대감이 아니라 획일성이다. 획일성 없이는, 고용인의 제복 없이는, 그는 '현실과의 관련'을 갖지 못하고 '비현실적인 느낌'만을 주게 된다. 카프카는 (하이데거 이전에) 이렇듯 변화된 상황을 포착해낸 최초의 사람이다. 예전에 사람들은 다양함, 즉 획일성으로부터 벗어남에서 이상과 기회와 승리를 찾았다. 미래에는 획일성의 상실이라는 것이 절대적 불행, 인간적인 것 바깥으로의 추방을 의미할 것이다. 카프카 이후로 세계의 획일화는 삶을 예측하고 게획하는 거대한 장치에 힘입어 엄청나게 진전되었다. 그러나 어떤 현상이 일반화되고 일상화되어 도처에 있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것을 식별할 수 없게 된다. 획일적인 삶의 행복감에 도취된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걸친 제복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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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우리에게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멋진 환상을 줌으로써 위안을 제공한다. 희극은 이보다 가혹하다. 희극은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나는 모든 인간적 사실에는 희극 요소가 내포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경우 그것은 지각되고 알려지고 사용되지만, 다른 어떤 경우에는 장막에 가려지기도 한다. 진정한 희극의 천재는 우리를 많이 웃기는 사람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았던 희극의 영역을 발굴하는 사람이다.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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