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일대의 온화한 기후 때문에 날씨 걱정을 잊고 있었다. 한라산 성판악으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볼 때부터 문제가 터졌다. 민박집 할머니가 가르쳐준 버스 회사에 전화하니 5.16 도로에 사고가 나서 오늘은 더 이상 운행을 못 한다는 것이다. 택시를 알아보니 5.16 도로로는 위험해서 십만원을 줘도 못 간다고 했다.
뉴스에는 한라산에 폭설이 내렸다고 나오고, 한라산 관리사무소에 전화하니, 정상까지는 못 올라가고 성판악 코스는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관음사 코스는 삼각봉 대피소까지만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혹시 사정이 좋아지면 정상 가는 길이 열릴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절대 장담할 수 없다는 거다.
민박집 할아버지가 말씀하신다.
"뭐 하러 힘들게 그까지 가? 요 옆의 제지기오름에서도 일출 잘 보여. 올라가면 보목교회에서 떡국도 주고 차도 준다고. 성산일출봉 가봐, 차 한 잔 안 줘. 영험해서 소원 빌면 꼭 이루어준다니까."
떡국 준다는 말에 특히 솔깃했다. 억지로 교통편을 구해 한라산을 갔다 치자. 눈길 힘들게 가서 정상까지 가지도 못하고 정상에 올랐다 하더라도 그 부근에는 구름이 많아서 일출 못 볼 확률이 높고, 겨울산의 위험도 걱정되고, 그냥 포기하고 가까운 데서 볼까 싶기도 했다.
K는 단호했다. 한 번 가기로 결정했으니 자기는 꼭 올라가겠다는 거다. 해를 못 봐도 좋단다. 대피소까지만 가도 좋단다. 자신은 거기가 목표였으니 올라가기만 하면 만족한다는 것이다. 올라가는 고생쯤은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거다.
K의 의지가 하도 확고하여 나도 함께 가기로 했다. 5. 16 도로로 가긴 글렀으니 성판악 코스는 포기하고 서귀포에서 버스로 제주시까지 가서 거기서 관음사 가는 택시를 알아보자 싶었다. 짐을 꾸려 일찌감치 출발했다. 보목리에서 서귀포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택시에서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기사분이 관음사까지 갈 수 있는 친구를 알아봐 주었다. 자기 차는 스노우타이어가 아니어서 안 된다면서. 결국 4만원을 주기로 하고 산업도로로 관음사까지 가기로 했다.
밤길은 평온했으나 한라산 근처로 접어드니 길이 살짝 얼어있더니 올라갈수록 빙판이 심해졌다. 그래도 강원도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이런 길을 못 올라간다니 이해가 안 갔다. 제주가 따뜻해서 눈길 운전이 익숙치 않아서 그럴까. 택시 기사는 길이 너무 위험하다고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고 결국 만원을 더 얹어주고 관음사 입구에 내렸다.
내리고 보니 절로 들어가는 커다란 일주문 말고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 국립공원 사무실은 대체 어디 있지 하다가 절 안으로 들어가는 분을 만나서 등산로는 어느 쪽이냐고 물어보니 여기가 아니란다. 한 삼십 분 더 걸어가야 국립공원 사무실이 나온단다. 순간 이 밤중에 아무 대책 없이 산길에 우리를 내려놓고 간 기사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 그는 공원 입구를 몰랐을 수도 있겠다 싶다. 여기에 몇 년만에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관음사라고 하면 당연히 관음사 등산로라고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절에 우리를 떨어뜨려놓고 간 거다.
다행히 시간은 넉넉했고 우리는 가로등은 당연히 없고, 차가 한 대도 다니지 않는 칠흙같이 어두운 도로를 따라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K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오래지 않아 국립공원 사무실과 고대하던 매점이 나타났다. 시간은 열 시, 등산로 개방 시간은 12시이므로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다.
매점에 들어서니 등산객은 우리 말고 아무도 없었다. 초행길인데 우리끼리 어떻게 올라가지 걱정이 마구 몰려왔다. K가 내 얼굴을 보더니 진정하라고 한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바깥에 차 소리가 나더니 한 중년의 등산객이 매점 문을 열고 들어선다. 공항에서 막 오는 길이라고 했다. 우리를 보더니 그런 차림으론 못 올라간다고, 아이젠과 스패츠를 사라고 했다. 한라산에 숱하게 왔을 뿐 아니라 눈길 야간산행도 많이 한 전문가였다. 이 분 따라가면 되겠다 싶어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다.
11시가 넘자 한 할아버지가 도착했다. 관리사무실에 전화해보니 세 명이 와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같이 출발하면 되겠다 싶어서 급하게 짐 싸서 오셨다 한다. 집이 제주시란다.
이렇게 해서 서로 모르는 네 사람이 함께 한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12시에 출발했으니 이미 새해 첫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 여행한 날. 2010. 12. 31
여행 이야기-국내/여행 단상
우여곡절 끝에 관음사에 도착하다 - 한라산 신년 야간산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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