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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영화. 지극히 뻔한 내용, 뻔한 결말이었지만 노장 배우들의 카리스마 때문에 그럭저럭 볼 만했다. 브루스 윌리스,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지만, 이런 유치한 스토리에도 일종의 품격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역량 있는 배우임엔 틀림 없다. 요즘엔 꽃미남이 대세인지라 브루스 윌리스가 지닌 남성성이 예외적으로 다가왔다. 굉장히 남성적이지만 거칠거나 천박하진 않은, 독특한 매력이다. 그러니 배우가 되었겠지만. 젊을 때보다는 많이 부드러워서, 야성이 중화되고 절제된 느낌을 주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헬렌 밀렌도 멋있다.
<소셜 네트워크>. 페이스북 창설자 '마크 주커버그'의 실화라고 해서 대체 누군가 궁금해서 봤다. 페이스북을 둘러싼 재판 과정을 다루면서 하버드의 천재 주커버그와 그의 친구들이 페이스북을 만들어간 과정을 추적한 영화다. 주커버그 자신은 이 영화를 픽션이라고 한 바 있다. 페이스북을 만든 과정은 영화와 달리 매우 지루하며 자신과 친구들은 6년 동안 열심히 프로그래밍을 했을 뿐이라고.
영화 자체보단, 영화를 보고 나서 문득 드는 의문이 있었다. 과연 천재들이 만든 이런 신기술들이 이 세계를 움직이고 끌어간다고 보아도 좋은가. 장하준 교수는 지난 세기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기술은 인터넷 등의 정보통신기술이 아니라 세탁기 등의 제조업이고 말한 바 있다. 세탁기의 발명이 가정부라는 직업을 사라지게 하고 여성들을 집밖으로 이끌어 내었다고.
인터넷이 신대륙이고 그곳을 먼저 선점한 사람에겐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지만(주커버그는 억만장자로서 페이스북의 시가 총액이 26조라 한다) 그것이 그가 말한 대로 보다 열린 사회를 만들고 더 많은 것을 공유하도록 돕는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선 쉽게 답을 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미 인터넷 공간은 정보로 넘쳐나며, 뉴스라 할 수 없는 선정적인 포털의 가십 기사에는 눈이 아플 지경이다. 우리가 정말로 공유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무엇을 공유해야 할까.
정보통신기술에 의해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은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예전 같으면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을 만나게 하고, 연결되지 못했던 곳으로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 정신의 일부가 전자 기호로 전환되어 웹의 이곳저곳으로 전파된다. 인간성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인터넷, 핸드폰 등 각종 환경들이 우리 삶의 경험을, 우리의 인간성을 밑바닥에서부터 바꾸어내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는 우리의 경험이 양적으로는 훨씬 넓어지는 동시에 피상적이 될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경험이란, 체험이란, 이 세계의 사람 혹은 사물과 '직접' 다이렉트로 연결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계를 우리의 몸, 오감과 직관과 이성을 전부 사용해 만나는 것이고, 그 가운데 솟구치는 생의 열기를 느끼는 것이다. 웹을 통한 아이디어의 공유, 지성의 공유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지만, 그것이 실천적 성격을 지니기 위해서는 다른 요인들이 더 많이 필요해 보인다.
인터넷과 핸드폰 덕택에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다고도 하고, 오바마 당선 일등 공신인 무브온도 그렇고, 신기술이 사회 변화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바가 많다. 하지만 신기술이 처음 도입될 때의 반짝임의 시기가 지나면 그것은 유행을 지난 옷처럼 평범해져버리고 사람들은 또 새로운 유행을 찾게 된다. 아마 우리가 경험한 기술의 효과가 프랑스 68혁명처럼 시대를 뒤흔드는 커다란 물결이 아니어서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온라인의 물결은 한 번의 반짝임으로 끝나고 지속성을 담보하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이루어지는 기술의 급격한 변화에 비한다면 우리 삶의 변화는 의외로 초라해 보인다. 인터넷이 창출하는 연대의 끈도 그것이 없었던 68때와 비교할 만하지 않다. 물론 이제 변화의 시작이라 앞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신기술은 재미있는 착상이고 국가경쟁력이자 세상의 변화를 가속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지만, 기술이 만들어낸 변화의 성격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미 개발된 전기자동차가 석유재벌들의 압력으로 상용화되지 못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바꾸어내는 힘은 언제나 사람에게 있다.
세상을 굳이 바꿔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세상을 바꾸고자 한 이들 중에 끔찍한 독재자도 무지 많았다. 저마다 다 다른 우리가 다함께 동의할 수 있는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고통을 감소시키는 것이리라.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것.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는 강과 이 자연의 무수한 생명체들이, 우리 국민의 목숨이 희생되고 있으므로. 이 주제라면 그대도 나도 함께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세계화 경제 속에서 후발국들, 틀히 한국과 같은 자원이 없는 나라가 선진국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을 수 있는 '물리적 힘'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기술 경쟁에서 앞서는 길밖에 없는 것일까. 이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끝없이 신기술을 개발하여 앞서 나가야 하는 것일까. 이 문명이 이런 방식으로 발전을 거듭해서 결국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소셜 네트워크>. 페이스북 창설자 '마크 주커버그'의 실화라고 해서 대체 누군가 궁금해서 봤다. 페이스북을 둘러싼 재판 과정을 다루면서 하버드의 천재 주커버그와 그의 친구들이 페이스북을 만들어간 과정을 추적한 영화다. 주커버그 자신은 이 영화를 픽션이라고 한 바 있다. 페이스북을 만든 과정은 영화와 달리 매우 지루하며 자신과 친구들은 6년 동안 열심히 프로그래밍을 했을 뿐이라고.
영화 자체보단, 영화를 보고 나서 문득 드는 의문이 있었다. 과연 천재들이 만든 이런 신기술들이 이 세계를 움직이고 끌어간다고 보아도 좋은가. 장하준 교수는 지난 세기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기술은 인터넷 등의 정보통신기술이 아니라 세탁기 등의 제조업이고 말한 바 있다. 세탁기의 발명이 가정부라는 직업을 사라지게 하고 여성들을 집밖으로 이끌어 내었다고.
인터넷이 신대륙이고 그곳을 먼저 선점한 사람에겐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지만(주커버그는 억만장자로서 페이스북의 시가 총액이 26조라 한다) 그것이 그가 말한 대로 보다 열린 사회를 만들고 더 많은 것을 공유하도록 돕는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선 쉽게 답을 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미 인터넷 공간은 정보로 넘쳐나며, 뉴스라 할 수 없는 선정적인 포털의 가십 기사에는 눈이 아플 지경이다. 우리가 정말로 공유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무엇을 공유해야 할까.
정보통신기술에 의해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은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예전 같으면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을 만나게 하고, 연결되지 못했던 곳으로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 정신의 일부가 전자 기호로 전환되어 웹의 이곳저곳으로 전파된다. 인간성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인터넷, 핸드폰 등 각종 환경들이 우리 삶의 경험을, 우리의 인간성을 밑바닥에서부터 바꾸어내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는 우리의 경험이 양적으로는 훨씬 넓어지는 동시에 피상적이 될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경험이란, 체험이란, 이 세계의 사람 혹은 사물과 '직접' 다이렉트로 연결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계를 우리의 몸, 오감과 직관과 이성을 전부 사용해 만나는 것이고, 그 가운데 솟구치는 생의 열기를 느끼는 것이다. 웹을 통한 아이디어의 공유, 지성의 공유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지만, 그것이 실천적 성격을 지니기 위해서는 다른 요인들이 더 많이 필요해 보인다.
인터넷과 핸드폰 덕택에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다고도 하고, 오바마 당선 일등 공신인 무브온도 그렇고, 신기술이 사회 변화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바가 많다. 하지만 신기술이 처음 도입될 때의 반짝임의 시기가 지나면 그것은 유행을 지난 옷처럼 평범해져버리고 사람들은 또 새로운 유행을 찾게 된다. 아마 우리가 경험한 기술의 효과가 프랑스 68혁명처럼 시대를 뒤흔드는 커다란 물결이 아니어서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온라인의 물결은 한 번의 반짝임으로 끝나고 지속성을 담보하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이루어지는 기술의 급격한 변화에 비한다면 우리 삶의 변화는 의외로 초라해 보인다. 인터넷이 창출하는 연대의 끈도 그것이 없었던 68때와 비교할 만하지 않다. 물론 이제 변화의 시작이라 앞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신기술은 재미있는 착상이고 국가경쟁력이자 세상의 변화를 가속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지만, 기술이 만들어낸 변화의 성격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미 개발된 전기자동차가 석유재벌들의 압력으로 상용화되지 못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바꾸어내는 힘은 언제나 사람에게 있다.
세상을 굳이 바꿔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세상을 바꾸고자 한 이들 중에 끔찍한 독재자도 무지 많았다. 저마다 다 다른 우리가 다함께 동의할 수 있는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고통을 감소시키는 것이리라.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것.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는 강과 이 자연의 무수한 생명체들이, 우리 국민의 목숨이 희생되고 있으므로. 이 주제라면 그대도 나도 함께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세계화 경제 속에서 후발국들, 틀히 한국과 같은 자원이 없는 나라가 선진국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을 수 있는 '물리적 힘'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기술 경쟁에서 앞서는 길밖에 없는 것일까. 이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끝없이 신기술을 개발하여 앞서 나가야 하는 것일까. 이 문명이 이런 방식으로 발전을 거듭해서 결국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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