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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재미있는 책, 그러면서도 한 시대의 '진실'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는 책!
조선왕조 실록에 무려 삼천번이나 거론된 우암 송시열. 83세로 죽었으나 그 죽음의 사유가 사약이었던 인물. 그의 당인 노론에 의해 신화화되어 죽어서도 성인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이 책의 저자는 송시열을 둘러싼 삼백년 신화의 허구를 벗겨내고자 한다.
역사서라는 게 저자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낳기 마련이지만, 이 책의 논리는 실록과 각종 사료에 근거해 있어 설득력이 있었고, 저자의 역사관은 오늘의 정치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무척 컸다.
서인 정권이 등장한 비극의 뿌리, 인조반정에서부터 시작해서 효종, 현종을 지나 숙종조에 이르기까지 파란 많았던 당쟁의 한가운데 서 있었던 송시열이란 한 인물의 생애를 따라가는 것을 통해서 그 시대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서 특히 좋았다.
소현세자와 효종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지만 둘 다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소현세자의 진보성이 좌절되고 효종의 북벌의 꿈이 좌절되는 과정은 몹시 안타까웠다. 학교에서 북벌은 효종의 희망사항이었을 뿐 이룰 수 없는 일로 배웠는데,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로 보건데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북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바쳐 온 효종의 지사적인 생애는 깊은 울림을 주었다.
또한 1,2차 예송 논쟁을 중심으로 서인과 남인의 대결, 노론과 소론의 분열 과정, 송시열의 스승과 정적들에 대한 내용을 읽으며 조선조 당쟁사를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조선은 일종의 내각책임제의 국가로, 중국이 말했듯이 왕보다 신하들의 힘이 강한 나라였다. 송시열을 위시한 사대부들은 조선을 왕의 나라가 아니라 사대부가 다스리는 나라라고 생각했고, 왕은 제 1 사대부일 뿐이라고 여겼기에 왕권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선비들을 중심으로 한 이상적인 정치체제이지만, 문제는 사대부들이 천하를 농민과 백성들을 제외한 자신들의 것으로 생각한 데 있다. 그래서 송시열과 그의 당은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대동법에 반대하고 사사건건 개혁에 제동을 걸었으며, 주자와 다른 해석은 사문난적이라고 배척하고 중세적 가치를 옹호하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국익보다 당익이 우선이었다.
송시열이 살았던 16세기 말에서 17세기 말의 조선은 정치적 격변기였다. 정권이 뒤바뀌는 환국이 거듭되었으며 사회, 경제적으로도 큰 변화의 물결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앙법과 광작으로 부농이 생겨나고 상공업이 발달한 결과 신분제도 흔들리고 있었다.
주자학만으로는 사회를 유지해가기 힘든, 누구도 그 변화를 막을 수 없었던 그런 시대에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은 조선 초중기 사회 변혁 사상이었던 성리학을 수구 사상인 예학으로 변질시켰다. 율곡 이이의 개혁 사상이 예학으로 후퇴한 것이다.
또한 교과서에 나와 있는 것과 달리 송시열은 결코 효종의 북벌을 좇은 적이 없었다. 숭무주의자 효종과 달리 숭문주의자였던 송시열은 소중화를 외치는 명목상의 북벌만을 주장했을 뿐 실제로 청을 치는 위험은 감수할 뜻이 전혀 없었다.
사대부들의 지원 없이는 북벌이 불가능했음을 깨달은 효종은 북벌을 추진하는 대가로 송시열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송시열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효종은 의문사하고 만다. 현종 15년, 효종이 예견했던 대로 남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청나라의 정세가 어수선했을 때 북벌을 할 천우신조라고 강력히 주청했던 이는 송시열의 정적 윤휴였다.
양란 이후 변화하는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신분제를 타파하고 개혁이 절실했는데도 불구하고, 송시열은 오히려 이미 순기능을 다한 주자학으로 후퇴하여 사대부라는 계급의 이익, 자신의 당인 서인과 노론의 이익만 앞세웠다. 송시열의 개인적인 삶은 검소하고 철저했지만, 송시열의 예론은 철저히 사대부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당 노론은 숙종조에 재집권한 이후로 조선이 망할 때까지 집권한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나라일 뿐, 백성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래서 저자는 송시열에 대한 그간의 평가가 편벽한 소인에게 주어진 공허한 찬사라는 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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