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에서 인생의 가을을 보다 | |
미리내 성지와 유무상통마을을 다녀와서 |
늙어서 아름다운 건 나무밖에 없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시곤 했다. 세월의 풍상을 이겨낸 고목의 의연한 자태, 그가 드리우는 그늘의 넉넉함을 보노라면, 사람도 저렇게 늙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늙어갈수록 고목만큼 넓은 정신의 그늘을 세상에 드리울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게 쉽지는 않은 듯하다. 경기도 안성 미리내 실버타운의 원장으로 계시는 방상복 신부님과의 인연으로 그곳에서 하루를 묵어갈 기회가 생겼다. 무의탁 노인들과 치매 환자들을 위한 시설을 운영해오시던 신부님께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분들도 노후를 거룩하게 보낼 수 있도록 6년 전에 세운 집이 미리내 실버타운. 바로 근처에 미리내 성지도 있어 순례차 함께 들르게 되었다. 오랜만의 기차 여행이었다. 오후의 햇살 아래 기차는 가을 들판과 크고 작은 도시들을 거쳐 평택역에 나를 내려놓는다. 수염이 성성하신 신부님께서 마중을 나오셨고 그 친절에 감사하며 미리내로 향했다. 실버타운의 이름은 유무상통마을. 있음과 없음이 서로 통한다는 ‘유무상통(有無相通)’은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가지는 기쁨을 실천하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가을이라 날은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도착하니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1층 식당에 들어서니 많은 분들이 저녁을 드시고 계신다. 여기에 약 240분 정도가 사신다고 하는데, 이렇게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한꺼번에 뵙기는 처음이라 내겐 낯선 광경이었다. 그러나 내게 스스럼없는 미소를 보내오시는 모습에서 다들 행복하게 지내고 계심을 알 수 있었다. 5층 숙소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할머니들께서 누구 만나러 왔냐고 아주 반갑게 물으신다. 그리고 유무상통마을은 모범 실버타운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여기 오면 이것저것 배우느라 더욱 바빠지고 함께 여행도 자주 가게 된다고 하셨다. 2층에는 각종 취미실이 갖추어져 있는데 늦은 시간이라 둘러보지는 못했다. 내가 하룻밤을 지낸 곳은 곧 어떤 분이 입주하게 될 방이었다. 내게도 그런 날이 찾아올까 궁금해졌다. 삶의 막바지에 이르면 무언가를 더 얻으려 하지 말고 내어주어야 한다고 신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할머니가 된 내 모습이 선뜻 그려지지는 않았다. 그때가 되면 나는 무엇에 자신을 바쳤노라고 말하게 될까. 유무상통마을의 아침은 종탑에서 울리는 은은한 종소리로 시작되었다. 그 소리에 잠이 깨어 미리내 성지로 향했다. 이른 아침의 산책은 해 지기 전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빛은 나타날 때와 그 빛이 사그라지기 전이 가장 찬란하다. 어쩌면 인생도 그러할지도 모른다.
쌀쌀한 공기 속에 미리내 성지에 들어서니 시비가 먼저 이 땅이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임은 가시고 진리는 왔습니다. 피로써 가꾼 땅에 무궁화 피나이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향기 가득합니다.'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를 피해 신자들이 이 지역에 숨어들어 여기저기 흩어져 화전을 일구고 살았는데, 밤이면 달빛 아래 초롱불들이 은하수처럼 보인다 하여 미리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미리내는 은하수의 토박이말이다. 당시에 이곳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고 한다. 병오박해(1846년) 때 순교한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안장되면서 미리내는 천주교 최대의 성지가 되었다. 신부의 순교 40일 후에 당시 열일곱 살이던 이민식이 관헌들의 눈길을 피해 그의 시신을 200여리 떨어진 미리내로 모셔와 자신의 선산인 지금의 자리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의 묘소가 있는 경당을 찾아갔다. 1821년 출생, 1845년 서품, 1846년 순교. 조선말, 격랑의 시대에 태어나 열다섯의 나이에 고국을 떠나 공부하며 시대와 백성의 삶을 고민했던 한 젊은이. 그의 뛰어난 학식과 빼어난 인품은 당대의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채운 스물여섯의 짧은 생애, 그 맑고 아름다운 영혼 앞에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오른편으로는 페레올 주교의 묘가 있다. 1808년 출생, 1853년 순교. 이역만리 타국 땅에 바친 마흔여섯 해의 삶. 삶에서 중요한 건 길이가 아닌 모양이다. 참된 정신은 시간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아남는 것….
발길을 돌려 경당을 나서는데 산 위로 해가 모습을 드러내어 십자가를 비추었다. 푸른 하늘과 십자가가 잠시 걸음을 멈추게 했다. 오랫동안 나는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내가 고통을 이해할 만한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른 문턱을 넘자 십자가가 지닌 풍부한 상징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음의 패배이자 사랑의 승리이다. 삶에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있는 법, 저 십자가처럼 고난에 맞서 끝내 이기는 삶을 살고 싶다.
이른 아침이라 성당 문은 꼭꼭 잠겨 있었다. 아침 햇살이 비쳐오는 성모당, 빈 의자에 앉는다. 대체 몇 년 만의 순례인가. 이 아침의 고요와 평안을 맛본지 참 오래되었다. 삶을 깊게 음미하며 사는 게 목표였는데 어느새 온갖 걱정을 짊어지고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홀로 걷는 길에는 늘 가슴 가득한 만남이 있다.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는데, 세상의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다 내게 말을 걸어온다. 바람에 흩날리는 잎에 유독 눈길이 오래 갔다. 잎은 지는 모습도 저렇게 아름다운 것을. 나도 저렇게 질 수 있을까. 영혼의 무게를 줄인 자만이 그처럼 가볍게 떠날 수 있으리라. 잎은 지는 것을 슬퍼하지 않지만, 인간은 자신의 소멸을 슬퍼한다. 죽음이 슬픔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그것이 곧 끝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은 과연 끝일까. 잎이 져도 다음 해에 새 잎이 나듯이, 내가 세상을 떠나도 나보다 더 아름다운 이들이 이 세상에 올 테니 슬퍼할 필요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생명은 이어지고, 그 이어짐이 아름다운 것….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무명 순교자 묘지. 열여섯 분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잠들어 있다. 알 수 없는 평화가 거기에 있었다. 마음이 허허로워짐을 느꼈다. 나 역시 이름 없이 사라질 것이지만, 밤하늘을 채운 이름 없는 수많은 별들처럼 세월이 흘러도 언제까지나 꺼지지 않는 정신을 간직하기를.
다시 유무상통마을로 향했다. 아침 햇살 아래 산과 하늘과 호수, 가을빛이 가득한 대지의 아름다움에 취해 걸으며, 인생의 가을도 이처럼 고운 빛깔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을 입구, 한복을 입은 성모님께 인사드리고 문득 고개를 드니 보이는 글귀가 있었다. ‘놓아라’
방상복 신부님의 부친도 작년에 여기서 돌아가셨는데, 남은 재산을 모두 기부하셨을 뿐 아니라 시신까지 의대에 기증하셨다고 한다. 어느 것 하나 남김없이 세상에 주고 모든 것을 훌훌 버리고 귀천하신 것이다. 그 떠나신 모습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약 이주 전에 가톨릭 의대로부터 아버님의 시신이 화장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신부님께서는 아버님의 재를 무릎에 안아 모시고 왔다고 한다. ‘존재가 이렇게 가벼워서야’ 하는 탄식과 함께 ‘정녕 아버님은 바람이 되어 귀천하셨구나’하며 감사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신부님 당신은 언제 저런 걸림 없는 바람이 될까 생각하셨다고. 미사 시간이 되어 어르신들께서 속속 성당에 들어오신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까지 모두 일찍 돌아가셔서 나는 늙는다는 것을 바로 곁에서 느껴보지 못했다. 죽음을 두려워한 적은 없었는데, 나도 저렇게 늙어갈 거라는 사실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생로병사, 인생 참 무상하다 싶었다. 어쩌면 아옹다옹하다가 끝나는 게 삶이 아닐는지. 프랑스의 철학자 장 기통은 영원 앞에서 인간은 항상 젊다고 했다. 고목이 아름다운 까닭은 해마다 새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낡은 잎을 버리고 새파란 잎사귀를 피워내기 때문이다. 정신은 늘 새롭기 때문이다. 다시 마음 가다듬고, 버릴 것 버리고, 줄일 것 줄이고, 가볍게 짐을 꾸려 이 길 똑바로 걸어가야겠다.
|
|
|||||
|
300x25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