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영화였어요. 1995년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를 보고 2004년 '비포 선셋(Before sunset)'을 다시 만났을 때의 감동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비포 선셋'을 보면서 십 년후에 이들을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 소망이 올해 실현될 줄은 몰랐답니다. 결국 이 영화들은 9년마다 하나씩 개봉하게 된 셈인데요. 운 좋게도 저는 이 영화들을 모두 개봉관에서 봤고, 그 사이에 20년의 시간이 흘러버렸네요.
이 비포 시리즈는 '사랑의 시간'을 보여주는 영화예요.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인류의 시간, 역사의 시간을 보여주는 영화라면, 비포 3부작은 개인의 각 삶의 단계에서 사랑의 시간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는지 보여주고 있어요. 그 시간의 '질적 깊이'는 배우들의 얼굴과 몸에 새겨진 주름으로도 드러나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소재의 차이를 통해서도 보여지지요. 같은 배우들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겪는 삶의 내용의 변화는 다른 영화가 결코 줄 수 없는 특별한 종류의 감동을 선사합니다.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의 시간 위에 펼쳐지는 동일하면서도 서로 차이나는 사랑의 무늬들을 영화는 잘 그려내고 있어요. 그래서 이 비포 시리즈는 인생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어떤 영화보다도 사랑의 '본질'을 훌륭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질이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좀 더 긴 시간의 호흡을 통해서,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전모가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비포 선라이즈'에서 연인들은 비엔나의 밤거리를 예쁘게 방랑하고 공원에서 밤을 지새우죠. 이들이 다시 만난 '비포 선셋'의 빠리에서 그들은 세느강 유람선에 오릅니다. 그리고 물결처럼 그들의 가슴에 밀려오던 추억들을, 그간 있었던 그들의 삶과 그들이 간직한 그리움들을 조곤조곤 이야기하지요.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에서 그리스로 휴가를 온 이들은 아이들을 태운 차를 직접 차를 몰아서 숙소에 도착합니다. 이들이 현실에 완전히 안착했음을 보여주는 공간이예요. 그들은 이제 땅에 닿았고 그 땅은 비상을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저녁에 모처럼 둘만의 시간을 내어 해변에서 호텔까지 걷는 그 길은 내리막길이예요. 그들이 아쉬워하며 바라보던 일몰 광경처럼 삶의 느린 하강을 보여주는 길이었어요. 그리고 도착한 호텔은 여행지지만 삶과 거리를 둘 수 없는 공간이었어요. 사랑은 일상의 시공간에서 살짝 거리를 둘 수 있을때 생겨나는 감정입니다. 그들이 사랑을 나눌 때 전화벨은 울리고 모처럼의 낭만은 순식간에 그간 오래 묵혀 왔던 갈등, 그들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었던 갈등을 드러냅니다(제시의 아들은 이혼한 전부인이 키우고 있어요). 결국 이들은 여행을 와서도 현실의 문제로 줄곧 싸우지요. 그만큼 그들에게 당면한 문제가 많았고 그들에게 중요한 현실이기도 했구요. 그래서 해뜨기 전의 낭만(비포 선라이즈)과 한낮의 그리움(비포 선셋)을 거쳐 자정 전에 그들이 치르는 싸움은 치열하기만 합니다.
이 결코 끝나지 않을 듯한, 파국으로 결론 지어질 것 같은 상황에 탈출구를 제시하는 건 제시예요. 제시는 그들이 놓인 현실의 시간 속에 '새로운 시간'의 시선을 초대합니다. 제시는 셀린느를 이렇게 달래요. 미래에서 편지가 왔노라고. 90세가 되어 돌아봤을 때 우리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밤은 바로 오늘이었다고. 그 작은 관점의 '열림'이 셀린느의 마음에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내죠. 셀린느는 비로소 제시의 말에 관심을 표합니다. 그들이 이 틈새를 통해서 지금 이 시간이 갖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까요? 영화는 우리에게 그 질문만을 남겨놓고 갑자기 막을 내립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 장면에서 '비포 선라이즈'의 비엔나 강변(호숫가?)이 겹쳐졌어요. 이 비엔나의 강변은 얼마나 낭만적인 공간이었던가요. 즉흥시인이 시를 짓고 집시 여자의 예언을 듣는 시간. 이때는 오히려 셀린느가 낭만적이었고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 제시가 오히려 현실적인 편이었지요. 그러나 육아의 어려움은 이 관계를 역전시키고, 그래도 삶에 좀 더 여유로운 시선을 초대할 수 있는 건 남자인 제시였어요. 그들은 이십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행지에서의 밤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그 밤은 낭만이 사라진, 낮의 연속으로서의 밤이예요. 현실적 시간의 포로가 되어버린 이들이 젊은 날의 애틋함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이 두 사람은 그때보다 한층 더 깊은 관계로 엮여 있고, 그때보다 서로를 더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을 하고 있지만, 서로의 존재를 그리워할 수 있는 삶의 여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해요. 비엔나와 빠리에서의 사랑이 서로를 일상 너머의 감정으로 초대하는 신호였다면, 지금의 사랑은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갈등을 겪는 사랑이지요. 사랑의 내용과 형식이 완전히 달라진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에서 시작된 비포 선라이즈의 질문은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의 비포 선셋을 거쳐 '우리 다시 꿈꿀 수 있을까' 라는 비포 미드나잇의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제시와 셀린느가 힘들어하는 건 그들이 그들에게 새로 닥친 지금 이 시간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예요. 아이를 키우는 것도, 직장에서 경력을 쌓는 것도 만만치 않지요. 그래서 셀린느는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해요. 지금 이 시간의 의미는 지금이 아니라 삶의 전모가 좀 더 보이는 미래의 시선을 통해서 확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루도 벅찬 셀린느에게, 더 이상 젊고 아리땁지 않은 셀린느에게 그 미래는 '80세가 되어도 여전히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는 불안으로 표출되지요.
생활의 고단함 때문에 사랑이 일종의 사치가 되어버린 지금, 그들이 현재의 시간이 그들 삶에서 차지하는 진정한 의미를 알아보게 되는 때는 어쩌면, 황혼에 찾아올지도 모르겠어요. 황혼에 이르게 되면, 지금 힘들기만 한 이 시간이 여전히 꿈꾸는 것이 가능한 날들이었노라고 아름답게 회상하게 될 지도 모르지요. 그들이 비엔나에서의 헤어짐 이후에서야 그들의 짧은 마주침이 얼마나 가치 있는 순간들이었는지를 알아보았듯이, 그래서 빠리에서의 재회가 그토록 뜨거운 것이었듯이, 지금 이 시간의 본질 또한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거예요.
이렇게 이 두 사람의 사랑의 시간은 기다림과 그리움의 절정을 지나 점점 땅과 가까워지면서 사랑에 있어서 '지속'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셀린느가 그렇게 까칠한 것은 이 내려감이 단순한 몰락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일 거예요. 그들이 겪는 사랑의 하강의 결말을 우리는 보지 못하지만 저는 이 둘이 '우아한' 내리막길을 걸으며, 그들이 땅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출발했을 때보다 더 깊은 우정과 사랑의 결실을 얻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 중에서 가장 심금을 울린 것은 '비포 선셋'이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건 '비포 선라이즈'지만 '비포 선셋'은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놓쳐버린 것들에 대한 회한도 이해하는 나이면서 여전히 가슴 깊은 곳의 그리움을 순수하게 꺼낼 수 있는 어떤 '애절함'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예요. '비포 미드나잇'은 그들의 그리움이 채워진 이후의 시간이며, 그것은 서로를 선택하는 결단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의 사랑의 '지속'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에, 전 '비포 선셋'이 가장 좋았습니다. 아마 제가 비혼이며 여전히 자정이 아니라 비포 선셋의 '한낮'을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아마도 저는 그 누구보다 이 사랑의 '하강'을 참아내기 어려운 유형이 아니었나 싶어요. 제게 있어 열정의 대상은 언제나 일상 밖의, 일상과 차이나는 대상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이 하루하루의 일상적인 생활과 결부된 것들에는 특별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어요. 일상적인 삶은 동경의 대상은 아니었고, 언제나 그것들보다는 그 너머의 것들이 더 매혹적이었으며 제 정신에 더 많은 양분을 주었어요. 일상은 제게 어떤 새로운 의미의 해석과 묵상을 요구하지 않았기에 저는 그 일상 속에 담긴 많은 것들에 눈길이 가지 않았어요. 어쩌면 제게 있어 일상은 늘 거기 있는 것이고, 당연히 주어진 것이기에 저의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당연한 것들을 영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으며, 그 당연한 것들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애쓰며 살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이제 제가 이 사랑의 하강을 수용하면서 '미드나잇'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사랑을 선택할 지, '한낮'의 시간을 더 지속할 지는 알 수 없군요. 하지만 한 가지는 점점 분명해지고 있어요. 제게 있어 그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적인 마주침의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비포 미드나잇'으로 제시와 셀린느의 사랑 이야기는 완결되지만, 이 둘이 나누는 삶의 대화를 좀 더 듣고 싶은 사람은 저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이들이 펼치는 '끝없는 대화'야말로 사랑의 표현이자 삶의 표현이지요. 십 년 후 이들의 네 번째 사랑 이야기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어요.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들 각자의 삶에서도 '어떤 사랑의 대화'가 끝없이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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