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안내로 공원 지하 추모공간으로 향하는 길을 내려갔을 때 그곳에는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벽면 가득히 새겨진 내가 전혀 모르는 타인들의 이름. 아이, 소녀, 청년, 어른의 이름. 그들의 몸은 사라지고 벽에 이름으로만 남은 이들... 80년 광주의 이름들이었습니다.
한나절 동안 광주 여러 곳을 둘러봤지만 내 마음에 가장 강한 이미지로 남은 건 5. 18 기념공원에서 만난 이 이름들이이었어요. 뒤에 들른 5. 18민주묘지에서 이 이름들 각각의 얼굴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내게는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이름들이 더 애틋했습니다. 그리고 이 낯모를 이름들로부터 새어나오는 희미한 빛의 정체를 알지 못해 더듬거렸어요.
이 이름들이 내 마음을 움직이고 내 눈을 아프게 하는 이유가 뭘까요. 이름들 앞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고통에 가까웠습니다. 이 이름 하나하나가 어떤 시선의 힘을 지니고서 나를 지켜보는 듯했지만 그 시선이 어떤 말들을 품고 있는지 분명히 이해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는 이 이름들을 응시하며, 이 이름들이 품고 있는 빛과 아픔이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볼 뿐이었어요.
야외 정원에는 학생기념탑이 있었습니다. 80년 봄날에 희생된 초, 중, 고등학교 학생들의 이름이 따로 또 적혀 있는 곳입니다. 사연들을 읽는데 ‘산이 되고 강이 되는 사무침’이라는 글귀가 가슴을 치고 지나갑니다. 그 존재는 이제 살아서는 보고 만질 수 없는 곳으로 갔으니 그 사무침을 어찌 말로 다할까요. 33년 전,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고 사는 이유가 되었던 이름들, 하지만 이제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곳에 있는 이름들이었어요.
이 세상 수많은 존재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이름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전하고자 합니다. 기록과 증언은 우리가 과거를 진실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물리적 시간을 '인간의 시간', '역사의 시간'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숭고한 행위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시간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인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미래에 어떤 시간을 살고 싶은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기도 해요. 이 공원의 기념물 또한 그러한 소망을 형상화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기억이 진정한 기억이 되기 위해서는 이름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이름들의 벽 앞에서 나는 어떤 불가능한 것들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만이 아니라 그 이름들 하나하나가 지닌 빛이, 그 개별적인 목소리들이 지금 이 시간 속에서 다시 부활했으면 하고 소망한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 돌아와서 그들 가슴속에 품고 있던 소중한 이야기들을 꺼내어 우리에게 고스란히 들려주었으면 했어요. 우리가 지닌 이야기들이 충분치 않고 우리의 기억 또한 풍부하지 않으므로, 나는 그 이야기들을 필요로 했고 그 이야기들이 그리웠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세계로 우리를 안내할 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일까요.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분명치 않지만,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어요. 죽은 자들의 세계에 건너갈 수는 없지만, 산 자들의 세계와 죽은 자들의 세계 사이에 있는 어떤 곳, 혹은 산 자들의 가슴 속에 감추어져 있는 그 어떤 곳에는 다다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어요. 비록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 빛이 사라지지 않도록 흐릿한 언어로 잠시 붙잡아두는 것밖에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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