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하늘은 흐렸다. 그저 구름이 아니라 스모그가 섞인 연무가 도시를 덮어서 10시가 넘어도 하늘이 트이지 않았다. 친구 말로는 한달 내내 이랬단다. 비가 내려도 스모그가 가시지 않더라 했다. 공장 지대도 아닌데 이유를 알 수 없노라고. 중국에서 날아온 매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앞으로 한국에서 맑은 하늘을 보기 어렵지 않을까 친구와 나는 염려를 주고받았다.
한낮이 되어도 연무는 가시지 않았고 그것은 무등산의 푸름은 물론 도시 전체를 희뿌옇게 삼키고 있었다. 모처럼 놀러왔는데 광주의 하늘을 못 보고 돌아가는구나 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던 청명한 하늘을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무등산 자락 아래 <해와 문화예술공간>의 "하늘방". 강운 작가의 초대전이 열리고 있는 작은 문화공간이다.
이분의 작품을 처음 알게 된 건 작년 무각사 개인전을 통해서이다. 가을비 촉촉히 내리던 어느 날, 친구와 무각사를 산책하다 우연히 전시장에 들어섰다가 그 공간을 채운 색채의 따사로움에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색이 그 자체로 치유의 힘이 있음을 이때 처음 알았다. 화선지 위에 한번에 그어진 파랑, 노랑, 초록, 빨간 빛의 굵은 획은 원색이지만 베네통 스타일의 강렬함과는 다른, 호수와 숲의 깊은 푸름과 노을의 붉음과 들꽃의 화사함을 담은 자연의 색조였다. 그 한 획 한 획이 품고 있는 작은 물방울과 추상적인 형상은 신기하게도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보다도 훨씬 더 자연의 느낌에 가깝게 다가서 있었다. 그것은 작가가 자기 내면으로 깊이 소화하고 인식한 자연에 대한 감수성의 표현이기에 그런 듯했다.
<해와>의 1층 까페에서 작년에 봤던 그 작품들을 다시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하늘방"은 까페 뒤에 있는 작은 전시 공간에 있었다. "하늘방"에 들어서니 연하늘빛과 짙은 파랑, 연두빛과 보랏빛의 하늘이 나를 반겼다. 그 하늘을 채우고 있는 건 한지 작은 조각을 하나하나 겹쳐 만든 구름이다. 한지로 구름 입자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형상화한 아이디어의 독특함에 놀라고, 한지 조각들이 미묘하게 겹쳐지면서 하늘빛이 입체적으로 표현되는 점에 또 한번 놀랐다. 가까이 다가가면 하늘 한복판으로 빨려들어가는 듯 신비롭다. 하늘 저편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구름이 뭉게뭉게 솟았다가 흩어지고 시간이 물결처럼 흘러간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각하는 하늘과는 조금 다른 하늘이 그곳에 있었다. 일상에서 우리의 지각은 다분히 시각에 치우쳐 있다. '시각'은 언제나 주체와 대상과의 거리를 전제한다. 그것은 주체가 일정한 시야를 확보한 뒤 대상을 자기 입장에서 규정하는 것으로서 이 경우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은 일상적 유용성이라는 잣대를 넘어서기 어렵다. 결국 시각으로 접근하는 하늘은 저 멀리 우리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이다. 가끔 올려다볼 뿐 우리와 상관 없는 하늘. 그리고 어느 순간 일상의 무게에 휘둘려 더이상 바라보는 일도 잊고 사는 하늘.
고단한 수고를 통해서 작가가 이 지상에 다시 펼쳐놓은 하늘은 고정된 시각적 이미지로서의 하늘이 아니라 '촉감적인' 공간으로서의 하늘이다. 멀리 바라보는 하늘이 아니라 우리 바로 곁에서 숨결처럼 바람처럼 느껴지고 움직이는 하늘. 그림 속에 빠져들면서 우리가 숨쉬는 이 대기가 하늘이고 우리가 매순간 하늘 속에서 숨쉬고 움직이고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콘크리트에 둘러싸여 망각했을 뿐 우리는 매순간 하늘을 호흡하며 하늘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하늘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지금 이곳이 통째로 생명 가득한 하늘방임을 말하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새들이라면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인간 또한 인간을 벗고 잠시 새가 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생존의 요구나 생활의 유용성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새가 되고 바람이 되고 나무가 되고 낙엽이 되어보면 좋으리라. 다른 존재의 눈을 빌어 세상을 본다는 것은 인간적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고 이러한 관점의 전환 속에는 언제나 인간 세상으로부터 다친 마음을 위무하는 힘이 깃들어 있다. 이 힘이 자연이 주는 위로이자 치유이다.
예술이 삶에 대한 질문인 동시에 삶에 대한 치유로 기능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예술은 기성의 질서와 관념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일상에 도전한다. 동시에 그 도전은 일상에 매몰된 우리의 부분적인 시각을 교정하고 삶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치유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작가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다르게 볼수 있는 기회, '진짜' 봄의 기회에 초대받는다. 그것은 새롭게 꿈을 꾸는 행위이기도 하다.
대구에 돌아와서도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연무는 이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흐린 하늘을 보며 그저 하나의 질문이 마음 한 켠에 자리잡았다. 작가가 이십 여년의 세월을 공들여 다른 하늘을 보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했듯이, 내가 다르게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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