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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아파트와 서랍장

by 릴라~ 2014. 5. 4.

 

 

한 달만에 방 정리를 했다. 쌓인 물건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필요 없는 종이들을 버리고 걸레로 한번 훔치기만 했는데도 방이 말끔하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살짝 정리하기만 해도 기분이 산뜻해지는 것처럼 같은 방인데도 전보다 마음이 맑아진다.

 

정리하면서 오랜만에 내 방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 공간을 너무 기계적으로 써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리히가 아파트를 "노동자들을 밤에 잠시 보관하는 서랍장"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고 무릎을 친 적이 있다. 나 또한 내 방을 내 지친 몸을 잠시 보관하는 장소로만 써온 것은 아닌지.

 

산업사회 이후로 인간이 잃어버린 능력 중 하나가 환경과 교감하는 능력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집과 거리, 마을이 순간순간 우리와 대화하고 교감을 나누는 인격적인 공간이 아니라 쓰고 버리고 치우는 곳 이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루 해가 뜨고 어둠이 다시 우리 곁에 내려앉는 순간까지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사물 및 장소와 어떤 종류의 연결을 느끼며 살고 있는지. 삶의 근원적인 행복감은 지금, 여기,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이곳에 속한 존재임을 느낄 때 비롯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계발서에 등장하는  '자기 개조'에 관한 온갖 노력이 아니라 나와 환경과의 연결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스쳐가는 마주침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특정한 사람과 장소에 머무는 것, 그리고 그 머묾 속에서 삶의 이야기들이, 저마다의 독특한 시간의 질이 탄생하는 것. 그러한 시간을 통해 우리는 자기를 힘들게 밀어붙이는 무리한 자기 개조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내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강압이나 통제가 아니라 환경과 교감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우리의 '존재 감각'이 달라지는 그런 변화이다. 


우리 사회의 각박함과 황량함은 이러한 존재 감각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면이 많은 것 같다. 올해 학교에 새로 등장한 것이 '정의적 영역 평가'이다. 인지적 영역과 정의적 영역을 구분하는 이유는(이것이 서로 엮여져 있지만) 인간의 느낌은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과 경험은 근본적으로 질적인 것이기에 몇 가지 단순한 언어로 수량화하여 측정할 수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질적인 영역에 양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는 교육과정평가원은 뭐하는 사람들인지. 


질적인 영역에 대한 감각의 회복이 필요하다. 그것은 경험의 인격적인 면을 충분히 맛보고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시계의 눈금으로 잴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의식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시간만을 '인간의 시간'으로 간주했다. 하루하루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오늘날은 일상 속에서 이러한 인간의 시간을 창조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의미의 도전일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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