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이라도 자유롭게 수업하고 싶다.’
K고에 온 지 두 달쯤 지났을 때의 내 심정이 이랬다. 사실 K고는 좋은 학교였다. 깨끗한 신식 건물에 주변 공원의 산책길도 일품이었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학생들이었다. 천방지축 중학생들을 보다가 인문계 고교로 오니 학생들이 어찌나 순한지, 가끔은 얘들이 천사가 아닐까 생각했다. 남녀공학이지만 한 반에 남학생이 서넛에서 많아야 일고여덟이고 다수가 여학생이어서 분위기가 더 온화한 것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복도에서 울리던 욕설이 귓전에 들리지 않아 처음엔 그 평화가 이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구상에 완벽한 세상은 없는 법, 내 생애 가장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목에 뭐가 걸린 듯한 불편함이 항시 나를 따라다녔다. 한 반에 일주일에 네 시간 있는 국어수업을 다른 교사와 나누어 들어가다 보니 시간표가 10개 반에 걸쳐 있었고 학생 파악도 다 안 되었다. 진도 나가기 위해 이 반 저 반을 시계추처럼 기계적으로 오가는 느낌이었다. 다른 교사들은 별 불만이 없어 보이는데, 정작 학생보다 내가 더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물론 학생들도 많이 졸기는 했다.
수업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즈음 교과서에 '대화하기' 단원이 나왔다. 대화의 가치, 의의, 방법 등의 이론만 다루기엔 아까운 수업 주제였다. 대화란 그냥 되는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화란 대화의 주제를 염두에 두면서 상대방을 배려하며 진행하는 고급의 말하기이다. 진도 나가느라 바빴지만 한 시간을 따로 빼내어 활동을 해보기로 했다.
먼저 제비뽑기로 각자 자신과 대화할 친구를 선택했다. 짝이 정해지면 대화의 주제를 함께 고른 뒤에 도서실 원하는 장소에 둘씩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K고 도서실은 공간 배치가 잘 되어 있어서 널직하면서도 아늑함이 깃든 공간이었다. 아이들의 표정은 편안하면서도 생기가 감돌았다. 중학생이라면 몇몇이 장난을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흐트러질 수도 있지만, 고등학생은 달랐다.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며 대화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모습이었다.
학급 정원이 홀수여서 짝이 없는 학생도 있었다. 그 학생들은 따로 담임 선생님과 대화하면 좋겠다고 하니 아이들은 왠지 부담스럽다며 국어 선생님하고 하면 안 되냐고 제의했다. 그래서 두 녀석은 나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처음엔 좀 귀찮기도 하고 해서 썩 내키지 않았는데 내게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 시간의 향기는 도서실 블라인드 아래로 비쳐 들어오던 그날 오후의 햇살처럼 은은하게 K고에서의 내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나와 짝이 된 녀석 중 한 명인 정수는 말수가 적은 음전한 친구였다. 평소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어서 정수와 대화가 잘 될까 싶었는데, 그야말로 편견이었다. 정수는 살짝 수줍은 태도로 내게 궁금한 것을 여쭤봐도 좋겠냐고 물었다. 그래서 정수가 화제를 꺼내면 내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또 녀석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대화를 진행했다. 우리의 주제는 책이었다. 내가 감명 깊게 읽은 책, 그리고 녀석이 관심 있게 읽은 책 이야기가 서로 오갔고, 책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17살 남학생은 대화의 상대자로 부족함이 없었다. 종 치기 10분 전, 각자 대화 소감을 글로 정리해야 하는 시간이 오자 우리 둘 다 시간이 빠르다고 아쉬워했다.
학교는 내성적인 학생보다는 발표력이 있는 외향적인 성향의 학생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다. 말없이 수업에 참여하는 조용한 학생들은 자기 안에서 차곡차곡 생각의 씨앗을 키워가는 경우가 많다. 정수가 그런 아이였다. 청중 앞에서 큰 소리로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것보다 둘셋이서 마주보고 작은 소리로 나누는 진심을 더 편안해하는 아이였다.
정수와의 대화를 마치고 지금껏 수업 시간과 상담 시간에 해온 수많은 이야기가 얼마나 '영혼 없는 대화'였을까 생각했다. 그 모든 이야기는 내가 '교사'라는 위치를 의식하면서 하는 '뻔한 말'이었고 나는 그런 말들을 너무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해온 것이다. 우리 안에서 뻔한 말 대신에 진심어린 몇 마디를 건져 올릴 때 대화는 신선한 활기를 띠게 된다. 아이들도 쉬는 시간에 떠드는 것과 달리 진지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대화 주제를 선택해서 이야기해보는 경험이 새로웠던 것 같다. 몇 줄 적으면 되는 소감을 A4를 덧붙여서 길게 적어낸 아이들도 있었다.
사토 마나부는 수업 시간에 발표가 활발하다고 해서 사고 과정도 활발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중요시한 것이 대화, 즉 큰 소리가 아닌 소곤소곤 작은 소리였다. 이 날이 그랬다. 도서실 서가 사이로 조곤조곤 울려퍼지던 고운 목소리와 그 소리가 담고 있는 넉넉한 평화의 기운. 그 어떤 열정적인 강의보다 그곳에 모인 우리 모두의 마음을 더 촉촉하게 채워준 그 시간의 감촉. 진짜 대화가 얼마나 부드럽게 우리 존재를 감싸주는지, 사람 사이의 만남을 깊게 만드는지 생각하게 해준 한 시간이었다.
국어 시간에 도서실에서 김비아 선생님과 대화를 했다. 시간은 20~25분 사이였고 대화 주제는 다양했다. 독서에 대해서, 학업하면서 어려운 점과 서로의 흥미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내가 선생님께 궁금한 점이나 대화 주제를 정하면 선생님은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계속 이야기를 진행하는 형식이었다.
대화를 하면서 좋았던 부분은 국어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독서에 관하여 질문을 할 수가 있었고 좋은 조언을 얻을 수가 있었다. 또 학업에 대해서도 질문을 할 수가 있었는데 이 부분은 선생님이랑 상담을 했으면 좋겠다는 부분이었다. 선생님이랑 대화하면서 평소에 생각 못했던 부분에 대하여 생각할 수가 있었다. 선생님에 대하여 새로 알게 된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선생님도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선생님도 힘들었을 때가 있었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힘들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대화를 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김정수)
담임 선생님과 대화하는 것이 조금 그래서 국어 선생님과 대화를 했는데 의외로 통하는 것이나 공감 가는 것이 많았고 이야기하다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고 하다 보니 끝을 맺기가 싫었다.
고등학교 생활은 마치 사람이 기계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느껴서, 차라리 이렇게 공부만 하기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자주 갖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새로 알게 되는 것이 있을 뿐 아니라 옛날 생각도 새록새록 나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보니 지금 이 상황이 싫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다음에는 또 한번 기회가 된다면 또 한 번 대화를 해보고 싶다. 그때는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다. 친구랑도 못해본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다. (이태석)
국어 수업 시간에 다영이와 둘이서 대화를 나눴다. 도서관 안 먼지 쌓인 비밀의 방은 밖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고 햇빛이 꽤 들어와서 조용하지만 분위기가 처지지 않고 얘기를 잘 할 수 있었다. 가족이나 취미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를 나눴다.
우리 반 실장인 다영이는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다재다능해서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진로를 정해놓은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고민이 많은 것 같았다. 자기 진로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을 텐데 내가 진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고 내가 생각했던 방법 외에도 자신이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해 얘기해줘서 너무 고마웠다. 나는 다영이의 고민거리를 줄여주거나 도와줄 수가 없어서 미안했다. 하지만 이번 대화를 통해 다영이에 대해 더 알게 되었고, 나중에라도 도와줄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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