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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이야기/schooling

자유를 찾아 떠난 새

by 릴라~ 2017. 6. 3.




다솔이가 학교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깜짝 놀랐다. 학교 생활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하던 성실하고 발랄한 모범생이 자퇴라니!


다솔이는 K고 2학년 문과반 학생이었다. 당시 나는 1학년 수업을 맡았기에 다솔이를 알지 못했다. 다솔이를 처음 알게 된 건 그 해 5월 교내 시낭송대회에서였다. 다솔이는 다른 고2 여학생 네 명과 한 팀을 이루어 시를 연극으로 발표했다. 다솔이는 할머니 역할을 맡았는데, 어찌나 구수한 연기를 펼치는지 깜짝 놀랐다.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세상에 대한 청소년의 신선한 시각과 배꼽 잡는 유머가 깃들어 있었다. 이렇게 맑고 고운 감성의 소유자가 있을까 싶을 만큼 눈빛, 목소리, 표정, 걸음걸이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 어여쁜 소녀였다.


다솔이를 다시 만난 것은 10, '저자와의 만남' 행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강사로 강은교 시인을 초대했는데, 문학 강연만 하면 밋밋할 것 같아서 다솔이 팀에게 10분가량의 시 연극을 부탁했다. 다솔이와 친구들은 공부로 바쁜 와중에도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시집을 받아가더니 그 중에서 네 편을 골라서 멋진 연작 이야기로 꾸며내었다. 무대는 청량한 음료수처럼 관객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다솔이의 연기력은 이때도 독보적이었다.


그리고 겨울방학을 앞둔 12월의 어느 날, 다솔이가 불쑥 교무실로 찾아온 것이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 다솔아,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선생님, 제가 학교를 그만두게 되어 이제 못 뵐 것 같아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잠깐 이야기하자고 다솔이를 자리에 앉혔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다. 무슨 일인지 얘기해 줄래?”


이 생활이 너무 답답해서요, 선생님.”


많이 답답하지. 나도 안다. 그런데 그 정도로 힘들어하는 줄은 몰랐네. 갑갑한 건 충분히 이해 가지만, 이제 일 년밖에 안 남았는데 졸업장을 따고 나서 하고 싶은 걸 하는 건 생각해봤어?”


나는 일 년만 참아보면 어떠냐고 지극히 상식적이고 교사다운 조언을 했다. 하지만 다솔이는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 제가 이 년을 버텼는데요. 이 생활을 더는 못 견디겠어요. 이미 부모님과 담임 선생님의 허락도 받았습니다.”


자신이 갈 학교도 벌서 정해놓았다고 했다. 전국을 뒤져서 자신에게 맞는 학교를 찾아냈단다. 자유학년제 형식의 학교였다. 일률적인 수업 대신에 멘토를 정해서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대안학교에 대해 조금 염려되는 바도 있었다. 간디학교처럼 기반이 잡힌 학교가 아닌 경우에는 재정적인 상황에 따라 부침을 겪는 학교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솔이의 의지는 확고했다. 나는 이 아이가 이미 마음을 정했으며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 확고함 때문에 더는 만류를 못했다.


다솔이에게 무언가 주고 싶어 책상을 살피니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 연을 좇는 아이가 있었다. 나는 그 책을 선물로 주며 학교를 떠나서도 꼭 연락하자고 했다. 이 아이와의 인연도 귀했지만 대안학교의 교육과정과 다솔이의 행로도 궁금했다. 다솔이는 감사하다며 책에 선생님이 좋아하는 글귀를 하나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My power is in my journey”를 적어주고 다솔이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다.


그렇게 그 해가 지나고 다음 해 여름, 다솔이로부터 연락이 왔다. 작은 화랑에서 그림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는 초대장이었다. 양옆으로 머리를 땋은 다솔이는 그 사이 한층 생기발랄해지고 예뻐져 있었다. 그때 다솔이로부터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학교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노라고 했다. 외모, 성적, 시험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게 되었단다.


그리고 답을 얻었단다. 그간 미대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늘 뭔가 불편했다고 한다. 그래서 미대 진학을 포기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고 한다. 학교를 자퇴하고 나서는 스스로 학비를 벌고 싶어서 안경 공장에서 일해서 6개월의 학비를 스스로 내면서 돈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깨달았단다. 급우들과 마라톤을 종주하고, 벽화를 그리는 재능 기부도 하고 스피치 대회에 나가고 그리고 전시회를 열었다. 다솔이의 그림은 문외한인 내게 보기엔 기술적으로 정교해보이진 않았지만 자유분방하면서도 온화한 느낌이었다. 그림을 판 수익은 모두 기부한다고 했다.


스물 몇 점 되는 다솔이의 그림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섀도나의 풍경이었다. 나도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 물어보니 직접 다녀왔단다. 자신이 미술에 재능이 없다는 생각으로 한동안 고민했는데 섀도나에 다녀와서 한번 실컷 그려보자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이 전시회는 섀도나 여행의 결과물이었다. 그림은 최근작 뿐 아니라 다솔이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의 작품도 있어서 이 아이가 그림과 오랫동안 함께 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전시회에는 다솔이의 대안학교 친구들과 안경공장 사장님을 비롯하여 그 사이 인연을 맺은 많은 어른들이 다녀갔다. 다솔이에게 반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누가 이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섀도나 그림을 한 점 사고, 여행 경비에 쓰라고 용돈을 조금 보태 주고 헤어졌다.


그리고 겨울, 나는 또 하나의 초대장을 받았다. 연극 '빛을 잃어가는 별'의 초대장이었다. 다솔이의 대안학교 연극 동아리 친구들이 함께 준비한 1시간짜리 연극이었다. 학생들이 직접 기획하고 광고지도 만들고 대본도 짜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자리로 만들었다고 했다.


"선생님, 그때 연극이 진화를 하여 지금 친구들과 연극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할머니 연기 실력이 많이 늘었으니 꼭 보러 오세요."


무대는 훌륭했다. 대한민국 고교생들의 우정을 다룬 재미있고 개성 있는 무대였다. 내신 경쟁으로 친구들끼리 서로 돕지 못하는 교실 풍경을 유머러스하면서도 아프게 그려나갔는데 학생들의 연기가 생동감이 넘쳤다. 대본을 다솔이가 썼다고 해서 그럴 만하다 싶었다. 한밤의 기억에 남는 무대였다.


다솔이의 전시회는 다음 해에도 이어졌는데 그 때는 일이 바빠 가지 못했다. 페트병으로 설치 미술에 도전한다고 하는데, 그 모습은 사진으로만 보았다. 다음 소식은 바다 건너 저 멀리 뉴질랜드에서 전해졌다. 뉴질랜드에 일하러 왔는데 그곳과 여러가지로 잘 맞아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난 달 스승의 날, 다솔이는 뉴질랜드에서 인사말을 영상으로 찍어 카톡으로 보내왔다. 뉴질랜드의 들판에서 건강미 넘치는 한 소녀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니임, 저는 지금 뉴질랜드에 있고 다음 달에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저 너무 잘 지내고 있고요. 선생님도 잘 지내시지요? 선생님, 항상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한국에서 봐요."


학교를 떠나고 그 아이가 되찾은 것은 시간이었다. 다솔이는 제도권의 스펙 대신 삶의 시간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자기만의 무늬로 채워가고 있었다. 다솔이의 의연함과 씩씩함은 자기 시간을 소유한 이의 당당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젊음'을 본래의 의미 그대로 소유하고 있는 다솔이가 부러웠다. 단지 숫자가 아니라 젊음의 모든 풍요로운 가능성을 그 안에 다 담고 있는 그런 젊음이었다.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은 스무 살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의미가 있는 시기이다. 이십대와는 다른 각도에서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자신의 몸과 마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적극적인 탐색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건 이후의 다른 나이 때의 경험으로 대체하고 보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실험이 충분히 이루어질 때 이후 삶은 자연스럽게 개성 있고 아름다워진다. 한국 사회의 획일성은 이 시기의 획일성에서 비롯되는 면도 있지 않을까.


다솔이의 실험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이 아이가 무얼 하든 그걸 지켜보는 이에게도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다솔이를 다시 만날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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