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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기록/광주, 전남, 전북

강진 사의재에서의 하룻밤

by 릴라~ 2017. 10. 3.


한 남자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명민했고 성균관에서 문재를 드날렸으며

과거 급제 후에는 임금의 총애를 받아 입신의 길을 걸었던 인물.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을 잃고

남해 바다 끝, 머나먼 강진 땅에 도착했을 때

그의 나이가 고작 마흔이었다.

 

정조가 승하한 후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지면서 

동생(정약종)은 이십대의 나이로 순교하고

그와 형(정약전)은 배교하여 간신히 사형을 면하여

형과는 살아서는 만나기 어려운 흑산도로 길이 갈라지고

그 자신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강진의 한 주막에 당도했던 남자,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강진에서 나는 정약용이 다산초당에서만 기거한 줄 알았는데

그의 첫 흔적이 남아있는 '사의재'라는 매우 인상적인 장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김영랑 생가 앞의 한식당이 4인상만 가능해서

부근에서 식당을 찾다가 우연히 '사의재' 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1801년 유배를 온 다산은 '동문매반가'라는 주막집 주모의 호의로

첫 4년을 그 집 방 한 칸을 얻어 생활했다고 한다.

그 주막 터가 고증을 거쳐 현재 '사의재'란 이름으로 복원되었다. 

 

 

복원된 장소지만 그곳에는 한 그루 오래된 나무가 있고

운치 있는 연못과 작은 정원이 어우러져

옛스러운 느낌이 있고 분위기 있는 장소이다.

엘리트로 살아왔던 그가 동기의 죽음을 겪으며

마흔에 이곳에 외따로 떨어졌을 때 그의 좌절과 상실감은 얼마나 깊었을까.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많이 메워졌지만 당시는 갯벌이 가까웠고

햇살 아래 엷게 빛나는 그 바다 또한 한없는 막막함을 전해주었으리라.

그런 그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며 종이를 사주고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칠 것을 권유한 사람이 주막집 주모였다고 한다.

 

그리고 정약용이 주모의 권유를 받아들여 방 이름을 '사의재'라고 짓고

새롭게 마음을 잡는 데는 약 8개월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사의재란 얼굴, 말, 행동 등 네 가지를 의롭게 가지는 것을 뜻한다.

내게 '사의재'는 그가 좌절감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보냈던 8개월의 시간과

그 우울에서 벗어나 마음을 잡도록 도와준 한 주모의 마음씀씀이를 전해준 공간이었다.

이후 정약용은 방황을 끝내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유배 생활이 길어지면서 많은 연구 저작을 내놓기 시작한다.

 

사의재에는 실제로 주막이 있어서 우리는 아욱된장국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사의재 바로 옆에는 사의재 한옥체험관이 있는데 마침 그 날 방 한 칸이 남아서

잘 지은 한옥집에서 하루를 머물다 갔다.

강진은 일정 없이 지나던 길에 들른 곳이라 숙소가 없으면 나가려고 했는데

기다렸다는 듯 사의재가 우리에게 쉬어갈 공간을 주었다.

사의재 한옥체험관 마당에는 주모와 그의 딸의 청동상이 있다.

마땅한 헌사로 여겨졌다.


어쩌면, 삶이 와르르 무너저버렸다고 느끼는 남자를 살려낸 건

배우지 못했지만, 숱한 고비를 넘겨왔고 넘길 줄을 알았던

억세게 살아왔던 한 주모의 지혜로움이었다.

살아있는 한, 아무리 험한 파고가 덮쳐와도

우리는 다시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걸

 

우리가 원하는 길이 아닐지라도, 잃어버린 길 위에서도

다시 길은 시작된다는 것을 사의재는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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