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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기록/충청, 강원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사람 _ 덕수궁 중명전에서

by 릴라~ 2017. 12. 11.

서울 답사 여행의 핵심은 광화문광장에서 경복궁, 창덕궁으로 이어지는 길이겠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인 곳은 덕수궁에서 시작해서배재학당과 경교장을 지나 사대문 밖 서대문형무소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근세사의 비극이 고스란히 담긴 현장이다. 특히 덕수궁 담장과 바로 붙어 있는 러시아 대사관, 역시 인접한 성공회 성당과 영국 대사관 등의 자리를 보면 아관파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실감이 나고 당시 외세가 왕의 바로 곁에서 어떻게 내정에 간섭하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원래 덕수궁은 지금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고 한다. 덕수궁 일대의 부속 건물을 다 허물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각국 대사관이었다. 덕수궁 바로 건너편에 미국 대사관이 있고 거기서 몇 블럭 더 가면 일본대사관이 있다.

덕수궁은 광해군 시대로부터 고종 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가 켜켜이 쌓인 곳으로 가이드투어를 통해 설명을 자세히 들은 바 있다. 이번에 방문한 곳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극장을 지나면 보이는 덕수궁 중명전. '난잎으로 칼을 얻다'라는 우당 이회영일가에 관한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덕수궁 중명전은 1901년에 세워진 근대식 건물로 2층의 벽돌 건물이 웅장한 느낌을 주었다. 처음에 황실도서관으로 사용되었던 중명전은 광명이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전시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설명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일제가 군대를 동원하여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했고 광무황제는 늑약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위임, 조인, 비준이라는 조약 체결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국제법적인 조약의 형식도 갖추어지지 않았고 한민족 전체의 의사와 아무 상관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완용이 20억을 받은 대가로 나라를 넘겨버렸으니 당시 백성들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이 날에 목 놓아 울다'라는 글의 제목이 당시의 심정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그리고 1907년 이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한 헤이그 특사의 머나먼 여정이 시작된다. 헤이그 특사와 고종의 망명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건석철회시호, 조선 최고의 가문이었던 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6형제는 전재산을 팔아 서간도에 이주하여 터를 잡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다. 김산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조선 청년들은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고 싶어 몸과 마음이 뜨거웠다고 한다.  당시 15세였던 그는 입학 최저 연령이 18세여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가 그의 기나긴 순례여행의 이야기를 들은 학교측의 배려로 특별히 3개월 훈련 과정에 입학하게 된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할 때까지 35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청산리대첩 등에서 맹활약을 한다.

이후 이회영 선생은 북경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순국한다. 광복 후 살아돌아온 사람은 6형제 중 단 한 명, 이시영이었다. 난 그림을 잘 그려서 그림을 그려 독립운동자금을 썼다는 이회영 선생, 그는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었기에 기록을 남길 수 없었다. 모든 기록을 그때그때 없앴기에 편지 한 장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회영 선생의 아내 이은숙이 그 고단했던 여정을

'서간도시종기'란 책으로 펴냈는데 철저히 기억에만 의존했다고 한다. 선생이 남긴 것은 단 한 장의 사진. 가로 4.5cm, 세로 6.8cm의 작은 사진 한 장과 난잎 그림, 그리고 순국할 때 입으셨다는 옷 한 벌 뿐이다.

다른 항일운동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시실에는 신흥무관학교 생도 452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82년만에 처음으로 새겨진 이름이었다. 아직 찾지 못한 삼쳔 여명의 이름은 빈 칸으로 남아 있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그 어둠을 거슬러간 사람들의 존재가 별처럼 빛난다. 조국 강토와 그 안의 모든 것을 팔아넘기고 거대한 토지를 하사받은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가진 것을 모두 바치고 한 장의 사진만을 남긴 이회영 선생과 이름 세 글자조차 남기지 못했던 신흥무관학교의 청년들이 있었다. 이 두 갈래 삶의 길 앞에서 우리 시대가 좀 더 명징한 대답을 내어놓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가. 자신을 다 바쳐서 남긴 것이 하나 없는 분들을 충분히 흠모하지 못한 세월이었다. 잊혀진 이름들을 모두 되찾고 그 이름이 역사에서 제대로 자리매김될 때가 잃어버린 나라를 온전히 되찾는 때가 아닐까 싶다.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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