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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이야기/여행 단상

시간이 '신'인 것일까 _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효창공원

by 릴라~ 2018. 9. 22.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서울역에서 멀지 않았다. 남영역이나 숙대정문역으로 한 정거장 더 가야 하지만, 지하철로 가나 걸어가나 총 20분 정도여서 걸어가기로 했다. 박물관은 숙명여대 제1캠퍼스 인근에 있는 5층 빌딩이었다. 일반 빌딩을 리모델링하여 박물관으로 개관한 것이라 처음엔 잘 찾지 못했다. 출입구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건물 벽에 붙어 있는 박물관 간판을 보고 알았다. 입구에는 성금을 낸 시민들의 이름이 동판에 새겨져 있었다. 민간에서 만든 박물관이기 때문이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시민들의 성금으로 세운 박물관이다. 올해 개관했는데, 경술국치일인 8월 29일에 맞춰 문을 열었다. 십여 년 전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했던 민족문제연구소의 두 번째 큰 성과다. 박물관 설립 위원장이 이이화 선생이고, 민간에서 자료를 많이 기증받았다고 들어서 어떤 자료로 박물관을 채웠을지 개관 전부터 무척 궁금했다. 국립박물관이 조선 시대까지만 다루고 근대사가 생략되어 있어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주제가 더욱 관심이 갔다. 

 

상설전시실은 박물관 2층에 있었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작은 규모다. 민간에서 주도한 일이다보니 정부 예산으로 추진하는 굵직한 사업과는 규모가 다르구나 했다. 전시는 4개의 섹션, 4개의 질문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질문은 "일제는 왜 한반도를 침략했을까"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오키나와를 합병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승리하면서 조선과 대만을 식민지로 삼고, 만주에 진출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당시 유행하던 브루마블 같은 게임판이 있었는데, 그 게임판의 그림이 조선과 청국의 지도였다. 한 마디로 제국주의 영토 확장의 시대였다. 일본이 각계각층의 내분을 수습하여 통일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외침을 통해서 사람들의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모아 국론을 통일했구나 했다. 메이지 유신의 성격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아쉬웠다. 근대 일본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가 메이지 유신이다. 

 

두 번째 질문은 "일제의 침략 전쟁으로 조선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이다.  1904년 한일의정서를 시작으로,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정미7조약을 거쳐 1910년 강제병합조약을 체결한다. 철도 주변 토지, 식량, 가축까지 마구잡이로 징발하여 세계에서 가장 헐값으로 건설된 경부철도가 1905년 개통된다. 이토가 탄 열차에 돌을 던진 한국인은 일본헌병에게 붙잡혀 무수한 구타를 당한 끝에 평생 불구로 살아야 했다. 정부의 고위직은 95퍼센트가 일본인, 중간직은 86퍼센트가 일본인, 하위직은 62퍼센트, 일용직은 35퍼센트가 일본인으로 채워진다. 이 와중에 을사5적, 정미7적, 경술국적은 10~30억에 상당하는 공채를 받는다. 일본 역대 총독에 대한 소개도 있었는데, 설명이 소략해서 아쉬웠다. 한 사람, 한 사람 더 많은 면을 할애해서 소개했으면 싶었다. 

 

식민통치가 점점 강화되면서 황국신민서사 암송, 황국신민서사탑 참배, 창씨개명, 강제 징용이 일어나고 한반도 전체가 숟가락 하나까지 공출되는 전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는 관련자들의 증언을 담은 비디오를 상영하고 있었는데, 동남아에서 전쟁중 '포로 감시원'으로 일했던 분들의 인터뷰가 특히 기억에 남았다. 1차대전 후 포로감시원이 모두 처형된 것을 본 일본이 포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조선인에게 맡겼고, 이들에게 전쟁포로의 인권은커녕 말을 안 들으면 때리고 죽이라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 결과 2차대전 후 포로감시원이었던 조선 청년들 상당수가 전범으로 사형되거나 징역형에 처해졌다. 말이 지원병이지 실상 강제로 끌려갔던 청년들이 내세웠던 깃발도 인상적이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죽으러 가는 길이라 하여 '청춘만장'이라 불렀다 한다. 

 

세 번째 질문은 "한 시대 다른 삶 - 친일과 항일"이다. 대표적인 친일파로는 일가가 모두 친일을 했던 윤치호 일가가 소개되어 있었다. 해방 후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도 윤치호 집안이다. 이광수, 최남선, 김성수, 김활란의 망언도 소개되어 있다. 1공화국에서 3공화국까지 파워엘리트 중 친일파 출신이 얼마나 많은 지도 보여주고자 했다. 이 부분 역시 조금 아쉬웠는데, 전반적으로 박물관의 크기가 작아서 한 주제에 많은 내용을 담지 못해서이다. 독립운동가 집안으로는 석주 이상룡 일가가 소개되어 있었다. 그리고 반민특위의 좌절과 '친일인명사전' 편찬 과정을 간단히 소개했다. 파일에 정리된 당시 신문 등의 자료도 있었다. 

 

다 살펴보지는 못했고 몇몇 작가의 파일을 들추어보았는데 김동인이 특히 눈에 띄었다. 그가 당시 지면에 얼마나 많은 친일 논설을 쏟아내었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냥 친일 작가가 아니다. 자발적으로 작가단을 모집하여 만주 일본군을 위문했고, 얼마나 많은 글자로 한국 청년들에게 전쟁 참가를 독려했는지 모른다. 식민지 치하 지식인이 폭압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는 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일부러 나서서 자국의 젊은이들에게 전쟁 참가를 독려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남이 죽어도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극도로 출세지향적인 인물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다. 김동인은 해방 후에도 일말의 반성도 없었고, 여운형, 김규식 등을 공산주의자로 몰면서 민족주의자 행세를 한다. 작품에도 휴머니즘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내가 보기엔 그냥 쓰레기인데, 그런데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이 "동인문학상"이라니. 처음 동인문학상을 만든 건 진보적인 잡지 "사상계"이고(나중에 조선일보가 맡음) 사상계의 발행인은 장준하 선생인데, 일설에 의하면 장준하 선생이 서북 출신이어서 같은 동향의 작가 이름을 택했다고 한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지역주의인가 싶다. 

 

마지막 질문은 "과거를 이겨내는 힘,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다. 위안부 문제를 가장 먼저 알린 김학순 할머니를 기리는 작품이 있었고, 강제징용 피해자 할아버지들의 소송 과정도 다루었다. 올해 7월에 드러난, 2012년에 양승태 대법원의 만행이 마지막 섹션이었다. 양승태 대법원은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을 고의로 지연시켰고, 그래서 원고 9분 중 7분이 그 사이에 눈을 감았다. 그것이 우리의 오늘이었다. 

 

박물관 5층은 옥상이다. 남산 타워가 가깝게 보였다. 5층에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표지판이 있었다. 식민지 시대의 건물, 신사 등이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알려주는 표지판이었다. 20세기 초 서울은 일본 지배를 상징하는 건물이 주요 장소를 채우고 있었구나 했다. 

 

시민의 성금으로 세운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소중한 배움터였다. 전시 주제를 자유롭게 잡기 위해서 일부러 정부 기금을 받지 않았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약간의 아쉬움은 지울 길이 없었다. 이것은 민간단체가 아니라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하는 일 또한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이다. 자료도 더 풍부했으면 좋겠고, 예술적 미감을 살려서 그 시대 속으로 성큼 들어갈 수 있는, 총체적인 생활사 박물관이 되면 좋겠다. 독립기념관을 학생 때 방문하고 이후 가본 적이 없어서 두 박물관의 성격의 차이를 살펴보지는 못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독립기념관에 한번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박물관을 나와 숙명여대 캠퍼스를 지나면 바로 효창공원이다. 식민지시대에는 일본군 숙영지였다가 김구 선생을 위시한 독립운동가들의 묘소로 조성된 곳이다. 전에 방문한 적이 있지만, 그때 김구선생기념관과 그 뒷편에 있는 김구선생 묘소만 보고, 삼의사 묘는 빠트려서 가까이 온 김에 보러 갔다. 공원내 표지판을 따라가니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분 의사 묘 옆에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 가묘가 있었다. 사진으로 보는 것과 그 장소에 발을 딛는 것은 역시 전혀 달랐다. 관념으로 맴돌았던 역사가 튼튼한 물질성을 지니면서 내 머릿속이 아니라 피부와 가슴에 각인되는 시간이었다

 

평일 낮이어서 다른 참배객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삼의사 묘소는 야스쿠니 신사와 대조적이었다. 끊임없이 일반 사람들이 참배하는 야스쿠니 신사와 달리 삼의사 묘소는 한산했다. 이렇게 시내 한복판에 있는데 사람들이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장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들었다. 

 

이번에도 나는 잡생각을 하다가 들러야 할 곳을 또 빠트렸다. 효창공원 내에 있는 이동녕 선생 등 임시정부 인사가 모셔진 묘소다. 내 부족한 기억력 탓만은 아니었다. 이곳이 공원이다보니 이리저리 샛길이 있고 표지판이 보이지 않아 또 잊었던 것이다. 최근 정부가 효창공원을 독립운동 성지로 조성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늦었지만 반가운 기사였다. 국문학자 신동흔 선생은 '시간이 신'이라고 했다. 그 신의 걸음은 느리지만, 오고 있는 중이다. 백 년도 못 되는 삶을 사는 한 인간인 나는 그 '느림'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다. 

 

효창공원을 나와 길을 내려오는데, 상가도 아니고 뭔가 주위와 어울리지 않는 대규모 시설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효창운동장이었다. 효창공원을 재조성하기 위한 작업의 1순위가 효창운동장 철거라고 했는데, 이해가 갔다. 주변과 조화되지 않고, 효창공원 진입로를 떡 하니 가로막고 있는 것이 효창운동장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운동가 묘소를 훼손하려고 일부러 이 자리에 운동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70년이 지난 지금, 이승만의 흔적은 점차 지워지고 그가 애써 지우고자 했던 김구 선생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신동흔 선생 말마따나 '시간이 신'인 것일까. 

 

 

2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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