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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적성이나 능력이나 소명은 노동하는 인간이 '주관적으로 그렇게 되고 싶다'는 바람이나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떠한 '실재하는 객관적인 소산'을 이 세상에 내어놓음으로써 사후적으로 결정된다. 능력이나 적성은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 발견된다. 어떤 일을 '해냈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그 일을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본인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 대개의 경우 외부의 능력 평가가 본인의 가치평가보다 객관성이 높다.
예술창조보다는 노동 쪽이 완성도에 대한 판정 기준이 훨씬 '녹록하다.' 예술은 어느 정도 고도의 기술이나 숙련, 노력의 성과가 있다고 해도, 만들어낸 작품이 '다른 사람과 똑같다'면 가차 없이 '무가치'한 것으로 판명난다. 하지만 노동은 '다른 사람과 똑같다'고 해도 그것이 객관적으로 유용한 것을 생산했다면, 동등하게 높은 평가를 얻을 수 있다.
노동은 성취감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예술은 그에 비해 훨씬 가혹한 요구를 받는다. 그럼에도 정말 신기하게도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노동을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을 기피하고, 그것이 마치 자기기 바라는 자기실현을 위해 '창조'해야 할 것으로 멋대로 믿고 있다. 그렇다면 일을 하는 것이 본인에게 지극히 견디기 어려운 고역이라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pp0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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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하는 사람이 많은 듯한데, '현대인은 감정이 메말라서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가 빈곤해진' 것이 아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가 빈곤하기 때문에 감정이 메말라버린' 것이다. 순서가 거꾸로다.
언어의 현실 변용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것을 대다수의 일본인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언어에 대한 이해가 늦은 사람들이 현대 일본의 '국어'를 관리하고 있다.
내가 매스컴의 원고 의뢰를 거절하고, 그 두 배에 달하는 글을 블로그에 올리는 이유는 바로 '사용 어휘의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p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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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는 주지하다시피 영국의 식민지였던 화교국가인데, 동남아시아 경제의 중심지이자 국민 한 사람 당 소득이 3만 불을 넘어 옛 종주국인 영국을 추월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도 골치 아픈 일이 있다. '문화와 전통이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칼럼에 따르면 '가장 커다란 원인은 언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싱가포르에 온 화교들은 고향인 푸젠성이나 광둥성의 언어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중국어의 방언은 서로 통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비즈니스 회화는 영어와 베이징어를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가정 안에서조차 조부모와 손자 사이에 커뮤닠이션이 성립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조상 전래의 문화와 전통은 단절되고 있다.
고층 빌딩이나 고급 브랜드 상점이 늘어서 있따고 해서 그것을 문화라고 할 수는 없다. "싱가포르 정부는 문화진흥을 위해 높은 보수를 주고 연주가를 불러 오케스트라를 만들거나 하는데, 구미나 일본의 오케스트라에 버금가는 수준에 이르지 못할뿐더러 독자적인 분위기도 느낄 수 없다"고 <경제 관측> 필자는 말한다.
확실히 어떤 종류의 문화는 돈을 주고 해외에서 사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풍토에 뿌리내린 깊고 따뜻한 '친밀감'은 돈으로 살 수 없다. 그리고 국민국가인 경우 국민의 과잉 성취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종종 이 같은 (별로 근거가 없는) '친밀함'의 감각이다. (...)
싱가포르는 '한번 잃어버리면 그 어디에도 대신할 것이 없다'는 확신, 다시 말해 풍토나 문화, 전통의 '원점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국민적으로 공유하고 있지 못하다. 고층 빌딩이나 외국인만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 루이비통의 상점과 스타벅스가 없어진다고 해서 원점으로 돌아갈 싱가포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탓에 싱가포르 정부는 국민이 그다지 '애국적이지 않다'는 데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정부가 주도하여 '싱가포르를 사랑합시다'라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인다고 한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대상'을 찾아내기가 여의치 않다. '국민 한 사람당 소득이 3만 불'이라는 수치 자체가 국민 통합의 축이 되지는 않는다. 영어와 베이징어를 공용어로 삼고 있고, 거리에는 온통 세계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마당에 어디에도 싱가포르가 '어디에서 탄생했는지' 알려주는 '요람의 땅'이 없다. pp176-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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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리제이션과 '불만스러운 얼굴'은 거의 동시대적으로 등장했다. 여기에서 글로벌리제이션이란 미국의 국민통합 장치를 가리킨다. 미국은 이민 국가이기 때문에 국민마다 인종, 언어, 종교, 습속이 다 다르다. 이를 단일국가로 통합하려고 할 때 미국은 두 가지 '공통 기반'을 채용했다.
하나는 '성조기에 대한 충성심'이고, 또 하나는 '달러에 대한 신뢰'다. '신의 가호가 미국을 보호하사...'라고 함께 노래하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보다 미국사회에 적응을 잘한 인간'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미국의 시민권을 형성하는 한 쌍의 근거가 된다. 이는 '본래 공통의 도량형이 없는 집단'을 통합하기 위한 장치다. 다시 말해 목적은 어디까지나 '통합'이며, 그 수단은 비교 산정이다.
그런데 그런 미국 특유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글로벌리제이션은 일본으로 수입되었고, 곧바로 '히노마루에 대한 충성심'과 '부자는 위대하다는 가치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허참, 괜한 짓을 했다니까요!
이제와서 새삼 말할 것까지도 없지만, 일본은 다른 어느 국민국가보다 지극히 균질화된 사회다. 균질성이 높다는 공통의 기반이 있기 때문에 지방 특유의 습속이나 라이프스타일, 혹은 가치관을 풍부하게 전개해올 수 있었다.
그런데 원래부터 '균질성이 없는 사회집단'을 통합하기 위한 장치로서 도입한 글로벌리제이션이 일본처럼 처음부터 균질성이 높은 사회에 압력을 가했을 때, 과연 어떤 결과가 벌어질 것인가? 그것이 초래할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 생각한 사람이 정말 없었단 말인가?
그 결과 일본은 세계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균질화된 사회가 되어버렸다. 옛날에는 성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지역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사회적 입장이 다른 사람은 각기 고유한 에토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각각의 사회집단이 각기 고유의 에토스를 보유하고 있을 때 거기에 단일한 도량형을 꼭 맞추어보고, '어느 쪽이 사회에 더 잘 적응하고 있을까?' '어느 쪽이 더 잘 성공할 것인가?' 하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1억 3천만 명의 일본 국민을 '연봉'만을 기준으로 일원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다수자가 되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주제를 알라'는 규범을 잃어버렸다.
'주제'라는 말은 자신이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규범의 지역성과 특수성을 말한다. 자신이 채택하고 있는 도량형은 다른 사회적 집단에는 적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기와 같은 규범을 따르는 사람의 언동에 대해서는 좋고 나쁨을 말하지만, 자기와 다른 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예의 바르게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제를 알라'는 말이다.
지금 일본인들은 '권력, 재화, 정보, 문화자본을 추구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살아가는 목표'라고 믿고 있다. 그것이 일본적 글로벌리제이션의 귀결이다. 반복적으로 활용하던 비유를 다시 꺼내자면, 연휴에 디즈니랜드에 가서 '어째서 이렇게 사람이 득시글거리는 거냐?' 하고 화를 내는 인간을 떠올려보라.
다른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으로만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타인과 똑같이 행동한다'는 사실에 의해 그때마다 쾌락을 방해 받는다. '다른 사람이 갖고 싶은 것'을 원하는 식이 아니면 욕망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그는 탐욕스러운 얼굴이 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갖고 싶은 것'은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그는 구조적으로 원망스러운 얼굴이 된다.
그리하여 모두가 다 비슷비슷해진 일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원망스럽고 욕심쟁이'인 표정으로 획일화된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pp195-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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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이웃사랑'이란 말이 거의 사어가 되어버린 까닭은 우리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느라 이웃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어찌하여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일까. 이는 상당히 심오한 주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진정한 자신'이라는 환상적인 '중심축'을 세워놓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이에 종속해 있는 상태로 자아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렇다.
'진정한 자신'이라든가 '자기다운 순수한 자신'이라든가 '세계에서 유일하고 참다운 자기다운 나' 같은 것이 어딘가 자기 내부의 동굴 깊숙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모래알만큼) 많다. 그런 탓에 그들은 잡다한 인격적 요소가 하늘의 별처럼 빽빽하게 혼재해 있는 현실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가 좀처럼 안 되는 것이다.
누구든 자기 안에 약한 면이나 추한 면, 사악한 면을 갖고 있다.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욕망을 품지 않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안에 확실히 존재하는 사념을 받아들이는 일, 그 지점에 서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시작할 수 없다.
우리는 어째서 그런 요소가 내 안에 있는 건지 내력도 알 수 없고, 통제도 할 수 없는 인격적 요소를 갖고 있다. 그런 요소는 우리의 살이나 뼈에 박혀 있다. 그것을 떼어내기는 불가능하다. 어떻게든 요령 있게 맞추면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자기 안에 혼재하는 다양한 인격적 요소를 너그럽게 끌어안으면서 그것과 공생해야 한다. 자신의 약점이나 사악함, 혹은 어리석음과 '공생하는' 일은 자신의 약점이나 사악함, 어리석음에 '굴복하는' 일이 아니다. (...)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타자와 공생할 수 있는 능력, 아마도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 신을 사랑하는 능력으로 곧장 이어질 것이다. pp279-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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