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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에세이

정희진처럼 읽기/ 정희진

by 릴라~ 2018. 9. 15.



유명 작가들의 독서 경험을 쓴 책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지만 잘 읽히지는 않았다. 타인의 독서 경험이 내가 푹 빠져 읽을 만큼 공감의 여지가 많지 않아서이다. 끝까지 다 읽은 책은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정도다. 이 책 '정희진처럼 읽기'는 예외다. 그냥 한번 훑어보려고 집어들었다가 한 페이지도 빠짐없이 다 읽고 말았다. 저자는 책의 내용을 소개하지 않는다. 책이 자신에게 준 화두를 붙들고 그녀 자신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건넨다. 그것은 단지 개인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다. 모든 몸은 '사회적 몸'이듯이 그녀가 통과하고 겪은 삶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의 영혼을 울린 책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개성적인 글쓰기의 모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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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접하는 책들은 대개 서울 출신, 남성, 서양, 중산층, 비장애인, 이성애자, 건강한 사람, '학벌 좋은' 사람이 쓴 책이다. 사회는 모두 이들 '주류' 시각 안에 포섭되어 있다. 간혹 협상하는 자들이 있다 해도, 획일적인 시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대개 독자는 이 사실조차 모르고 읽는다. 사실, 나는 저자가 특정 인구 집단에 속하는 책은 거의 읽지 않는데,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진부한 관점의 지당하신 말씀으로 종이를 낭비하는 책은 킬링 타임을 넘어 지구 자원을 파괴하는 범죄 행위다.


나는 '주류'의 관점 밖에서 쓰인,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주로 읽는 편이다. 대단한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책들이 내게 실질적 이득을 주기 때문이다. 누구나 읽는 책에 줄을 서기보다는 한가한 길을 걷고 싶다. '모난 돌을 둥근 돌로 만드는 대열'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 나는 생각하는 이들을 질식시키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을 매우 싫어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 사회가 가장 문제적인 사회다. 모난 돌들이 둥글어지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모난 돌들의 대화가 가능한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다. pp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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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감정은 물질이다. 달리 해석될지라도, 크기가 작아질지라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몸에 있다. 가해자의 몸은 고통 경험이 없으므로 온갖 절대자의 이름으로 자기 마음대로 구원, 용서, 평화라는 관념의 향연을 주관할 수 있다. 초월은 득도가 아니다. 경험 없는 몸은 현실과 무관하므로 구원도 마음의 평화도 쉽다.


반면 피해자의 구원은 '고문하는 자'도 피해자도 지칠 만큼 고문의 노동이 지난 후, 잠시 들이마시는 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분노와 평화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누구의 분노, 누구의 평화인가가 의미를 결정한다. 따라서 나는 용서가 저주보다 바람직한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권력은 자기 회개와 피해자의 용서를 같은 의무로 간주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분노는 개인의 마음 상태가 아니라 구조적 권력 관계다.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피해자의 분노는 관리나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불가능에 가까운 타인에 대한 헤아림, 깊이 있는 지성의 영역에 놓여져야 한다. 나는 용서와 평화를 당연시하는 사회에 두려움을 느낀다. 2차 폭력의 주된 작동 방식이기 때문이다. p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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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즉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회적 위치성에 대한 분석을 제외하면 악에는 이유가 없다. 악은 간단하다. 어떤 '나쁜' 일을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있어서 한 것 뿐이다. 이는 보통 사람들이 행하는 소소한 악도 설명해준다. 사이코패스의 존재나 '어린 시절 학대' 같은 원인은 없다. 반례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악은 의도가 없다. 의지가 있을 뿐이다. 왜 죽였니? 왜 때렸니? 왜 그랬니? 악이 답한다. "그냥 그러고 싶었는데, 마침 그럴 수 있어서, 그때 그랬을 뿐." 이 영화(캐빈에 대하여)의 경우소년의 아버지와 모성 신화가 그럴 수 있게 했다.


인과론은 원인을 규명하여 문제를 개선하는 데 목적이 있다. 악의 정치에서 인과론은 잠시 피해자를 위로해준다. 원인을 알고 상대를 파악하면 덜 상처받고 미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애초부터 원인은 없을뿐ㄴ더러 있다 해도 대단히 복합적이다. 혹 인과 관계가 밝혀졌다 치자. 하지만 그 뒤에는 "왜 하필 나지?"라는 더 치명적인 의문이 기다리고 있다. 


악의 활동, 피해가 발생하는 시간은 짧다. 그러나 악의 이유를 묻게 되면 영원히 피해자가 된다. "왜?"라고 질문하는 그 순간부터 '피해자 됨'의 진정한 의미, 불행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당하는 것을 넘어서 사로잡히는 것이다. 악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피해자의 자아 존중감을 파괴하는 악의 본질이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무관심으로 악의 기능을 중단시키자. 그럼, 누가 악과 싸우나? 그건 악 자신이 할 일이다. p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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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광해-왕이 된 남자>의 초반, 극중 도승지가 말한다. "그는 충신이옵니다. 죽이면 아니 되옵니다." 그러자 광해군이 이렇게 말한다. "누가 그걸 모르는가, 충신 중의 충신이지. 하지만 내가 그 정도는 내줘야(죽여야) 저들이 나를 믿을 것이네." 이 대사에 충격 받은 나는 이후 영화 감상을 망쳤다. (...)


강자는 자기 사람을 감싸는데 약자는 동지를 내줘야 한다. 약자 진영이라도 똑똑한 리더는 강자의 요구를 거부한다. 자기 사람을 보호하여 내부 단결을 도모하고 구성원의 신뢰와 존경을 얻는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삼아 힘을 키운다. 영화에서는 가짜 왕이 그런 리더십을 발휘한다. 훌륭한 리더는 내부 사람을 존중한다.


이 간단한 관계 원리를 모르는, 멍청하고 겁만 많은 부류가 의외로 많다. 자기 사람보다 강자에게 인정받고 싶은 리더는 '미래를 위해 하나 주고 하나 받는다'고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 이것은 강자의 전술이다. 이 전술에 따르면 약자는 두 배를 잃는다.(이렇게 살지 말자는 게 탈식민주의다.) 이는 우리의 일상이다. 경상도 리더가 경상도 사람을 중용했을 때와 비경상도 출신이 동향 사람을 기용했을 때, 여론은 천지 차이다. 후자의 경우 마치 '남침'이라도 당한 것처럼 난을 일으킨다.


정체성의 정치란 이런 것이다. 강자가 자기 사람 챙기는 것은 도리요 의리고, 약자의 그것은 비리다. 약자의 단결, 동료애를 좌시할 수 없는 것이다. 강자의 일이란 '경제 성장' '정치 개혁' 따위의 거창한 말과 달리 간단한다. 약자가 열등감, 자기 혐오, 자기 검열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도 '이상'할 정도여야 성공이다. pp10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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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상위?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 것이 아니라 역할(노동량)이 많아진 것이다. (...) 여성의 사회 진출이 남성의 가사 노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여성의 취업은 평등이 아니라 이중 노동이다. p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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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주의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스콧 펙)는 군대의 존재가 불가피하다면 모든 '국민'이 복무하는 국민 개병, 징병제가 '차악'이라고 주장한다. (...)


군인이 특정한 계층만으로 구성되고 전문화될수록 그리고 첨단 무기가 발달할수록 군대는 사회와 멀어진다. 그들의 어려운 임무와 노동은 은폐되고 존재는 비가시화된다. 어느 사회나 지원병 제도는 계급화, 인종화된다. 여성 비율도 높아진다. 말이 '지원'이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구조적 징병제다. 우리의 경우 이주노동자나 특정 지역민이 지원한다면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지원병 제도는 전쟁과 군대로 인한 제반 논의가 특정 소수 집단의 문제로 축소되는 체제다. 이에 반해 보편적 의무로 운영되는 징병제는 어쩔 수 없이 전 사회적인 관심사가 된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가족들은 이들의 안전을 걱정하고 군사가 자신의 문제가 된다. '바람직하지 않지만 불가피한 일'은 모두가 경험하는 것이 좋다는 역설이다. pp18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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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어원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평화의 여신, 팍스(pax)다. 한자로는 '범'에 가깝다. 그러니 무서운 말이다. 평화는 가장 당파적인 개념인데 보편적인 가치처럼 인식된다. 일단, '평' 자체가 일반화의 폭력을 뜻하는 글자다. 평등도 마찬가지. 평등 실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등의 기준이다.


평화는 수많은 재해석이 이루어지고 있고 의미도 다양하지만, 문자의 원뜻이 너무 강력해 논쟁적인 담론이 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평화는 군사력에 의해 지켜지는 것, 전쟁의 동의어 혹은 하위 개념이다. 사람들이 바라는 평화는 선하고 강력한 통치자가 세상을 평정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없다.) 중간 세력의 난립이나 무정부 상태는 혼란을 연상시킨다. 


'팍스 로마나'도 로마 제국이 정복한 민족 통치 방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후 대영제국의 '팍스 브라타니카', 미소 냉전 체제의 '팍스 루소-아메리카나', '팍스 아메리카나'에 이어, 최근에는 중국의 부상으로 '팍스 시니카'가 등장했다. 이처럼 팍스는 단일 세력에 의한 세계 제패를 의미한다. '단일 세력' 이 말이 중요하다. p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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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무엇인지, 그리고 상처받은 인간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만이 늘어놓을 수 있는 '아름답고 한가하고 피상적인' 이야기들. 이 책은 한때 70만 권 넘게 팔렸다. 위로를 갈구하는 현대인이 안쓰러울 뿐이다. 아시아 출신 도인들은 서구에서 '증명'받은 뒤 다시 아시아 시장으로 온다. 그들의 내공과 관련 없는 오리엔탈리즘, 불쾌한 지식의 정치학이다. 틱 낫 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다 반전. 나는 단 한마디에 깊고 냉철한 위로를 받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시달렸던 개인적 의문까지 풀렸다. "내 행동만이 나의 진정한 소유물이다. 나는 내 행동의 결과를 피할 길이 없다. 내 행동만이 내가 이 세상에 서 있는 토대다."


내가 아는 한 이 구절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인류의 지적 성취를 요약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행위 뒤에 행위자 없고(니체), 행동은 사상의 기반이 되며(비트겐슈타인), 인간은 행동의 반복으로 구성되는 재현(주디스 버틀러)이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몸이 나다. 타인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면 그냥 그의 행동을 보면 된다. 행동이 그 자신이다. 이 말은 인간의 행불행은 개인의 결과라거나 부와 권력의 소유가 허무하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인간은 타인과 사물은 물론 자신도 소유할 수 없다. 가장 간단한 증거는 누구나 병들고 죽어간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무엇을 소유할 수도 없고 누구로부터 버려질 수도 없다. 인간은 행동일 뿐, 대상도 주체도 아니다. 그렇다면 버림받았다고, 모욕당했다고, 빼앗겼다고 분노할 이유도 줄어든다. 


'참나'는 내 행동뿐이다. 인간사에서 죽음과 더불어 유일한 진실이 있다면 이것이다. 유일한 진실이자 유일한 정의인 것 같다. 모든 인간 행동이 평등한 조건에서 행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상관없다. 빈부나 선악은 행동의 목적이 아니라 행위 자체이고 우리는 그 과정에서 희로애락, 분노를 경험한다. 알아야 할 것은 분노의 본질이 아니라 분노의 위치다. 행동만이 나를 말해주고 행동만이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이다. 이 부담스런 소유에 나는 안도한다. pp265-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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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독후감의 의미는 단어 그 자체에 있다. 독후감. 말 그대로 읽은 후의 느낌과 생각과 감상이다. 책을 읽기 전후 변화한 나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없다면 독후감도 없다. 독서는 몸이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통과할 수도 있고 몸이 덜 사용될 수도 있다. 터널이나 숲속, 지옥과 천국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딘가를 거친 후에 나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


독후감은 그 변화 전후에 대한 자기 서사이다. 변화의 요인, 변화의 의미, 변화의 결과....... 그러니 독후의 감이다. 당연히, 내용 요약으로 지면을 메울 필요가 없다. 독후에 자기 변화가 없다면? 왜 없었을까를 생각하고 그에 대해 쓰는 것도 좋은 독후감이 된다. 나는 왜 책을 읽고 아무 느낌이 없을까도 좋은 질문이다. 자기 탐구가 깊어진다는 점에서 더 좋은 독후감이 될 확률이 높다. 자신의 경험, 인식, 지식, 가치관, 감수성에 따라 여정의 깊이는 달라진다. 독후감의 수준은 여기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독후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책 자체라기보다는 독자의 처지와 조건이다. 어떤 이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책이 어떤 이에겐 지축을 흔드는 충격을 준다. 물론, 이런 책들은 개인에 따라 아무리 영향력의 차이가 있더라도 일정 수준을 갖춘 책들이다. (예외는 있지만) 독자의 위치성, 그 위치성을 의식하고 의심하고 사랑하는 읽기가 책의 위상을 결정한다. 영화든 드라마든 미술 작품이든 책이든 모든 텍스트는 철저히 읽는 이의 상황에 의존한다. "저자는 죽었다.", "책은 독자가 다시 쓴다."라는 말은 권력이 결국 읽는이, 듣는 자에게 있다는 뜻이다. 언제나 문제는 나 자신이다. 물론, 나(주체)는 사회와 대립하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몸(social body)이다. pp305-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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