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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에세이

언젠가, 아마도/ 김연수

by 릴라~ 2018.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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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한 스님이 쓴 책을 읽다가 불교의 팔정도를 설명하면서 '바를 정'을 흔히 해석하듯이 '올바르게'나 '똑바르게'가 아니라 '능숙하게'로 해석하는 걸 보고 동감했다. 예를 들어, 정견을 '올바르게 보기'라고 옮기면 그러지 못한 사람은 '그릇되게 보는' 게 된다. 반면에 이를 '능숙하게 보기'로 옮긴다면, 그러지 못한 이는 '서투르게 본다'는 의미다.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그릇되게 보는 사람보다는 서투르게 보는 사람이 낫겠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20대란 뭘 해도 능숙하게 할 수 없고, 그래서 어떤 일에 오래 매달리지 못하는 나이, 즉 서툴러서 쉬 싫증 내는 나이다. p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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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 많이 여행하라는 흔한 말을 뒤집으면, 여행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젊은이라는 말이 된다. 나이가 젊다면 당연히 육체적으로야 여행하기에 수월하게지만, 여행은 체력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지갑을 구경시켜주다가 여행 경비를 털리거나, 책만 믿고 깊은 밤 문을 닫은 호텔까지 걸어서 찾아가는 등 우리가 여행지에서 하는 멍청한 일의 리스트는 끝이 없다. 그런 일 앞에선 몇 년 동안 헬스클럽을 다니며 단련한 20대의 몸이라고 해도 속수무책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오직 정신력뿐이다. 낯선 지방을 방문하는 여행자는 구급약과 함께 이 정신력을 꼭 챙겨야 한다. 그것에 기대어 너무나 서툴러서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버젓이 저지르는 자신을 견뎌야 한다.


여행자란 바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건 젊은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여행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젊은이가 되는데, 이 젊은이란 사실 실제적인 나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낯선 도시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행자 또는 젊은이'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너무나 서툴러서 태연하게 황당한 실수를 저지르는 자신을 감당해야 한다. 만약 그게 힘들다면, 당장 여행을 포기하는 수밖에. 물론 예외는 있다. 잘 짜인 패키지 관광을 떠나는 방법도 있지만, 이쯤이면 왜 효도 관광은 예외 없이 패키지로 떠나는 것인지 알겠지. 여행은 그렇다 치고, 그게 인생이라면 어떨까? 서투른 자신을 보는 게  싫다고 패키지 인생을 선택한다면? 이번 여름 여행지에서는 이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자. p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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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여행하는 일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 옛말에 배고픈 처지를 가리켜 '민생고'부터 해결하자고 일컫던데, 혼자 여행하면 정말 먹는 일이 인생의 고난이 된다. 돈이 없어서 밥을 못 먹는다기보다는 혼자 밥을 먹으려니까 눈치가 보여서. 옌지야 단체생활이 몸에 밴 사회주의권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유럽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유리잔과 냅킨이 가지런히 놓인 4인용 식탁에 혼자 앉을 용기는 쉽게 나지 않는다.


하지만 혼자서 여행하는 일의 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 거기, 고단함에. 아침에 일어나면 또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막막하다. 책을 읽어도, 음악을 들어도, 걷고 또 걸어도 시간은 좀체 흐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관광지를 둘러보다 보면, 세상의 모든 관광지란 홀로 여행하는 자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혼자가 아니었어도 나는 그렇게 열심히 박물관과 미술관, 성과 대성당을 둘러봤을까? 어쩌면 이렇게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홀로 여행하는 일의 부작용일지도. 그리하여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앉아 슈퍼마켓에서 산 샐러드와 빵을 먹던 나는 스트레인저stranger라는 말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됐다. 그건 어떤 사회적 연결 고리도 없는 단독자를 뜻한다는 것을. 단과 독, 때로 여행은 그 단어의 뜻을 체험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 pp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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