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유명 작가라 해도(김영하, 김연수, 성석제 등) 타인의 여행기를 꼼꼼이 읽지 못하는 편이다. 내가 관심 있는 주제만 훑어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잘 쓴 글이고, 의미 있게 다가오는 부분도 더러 있지만, 여행기를 관통하는 철학이랄까 관점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개중에 그래도 괜찮았던 건 정여울의 에세이. 장소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어린 시선 때문이었다). 이 책은 예외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페이지도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저자는 이 시대의 수도승, 순례자라 불러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약 9년을 전국 방방곡곡을 두 발로 걸어다녔다. 게다가 매일 도심이나 마을에서 텐트를 치면서. 환경운동가의 입장에서 우리 삶을 아주 가까이에서, 그러나 거리를 갖고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수행의 삶을 산 것이다. 고생이야 이루 말할 것이 없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갗에 직접 부닥쳐오는 불편함을 헤치며 걸어다녔으니 에피소드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듯한 살아 있는 문장 속에 저자만이 포착할 수 있는 철학과 관점이 이야기 곳곳에 녹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곳곳에 유머와 아이러니가 번득인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산문을 쓰는 작가 중에 위트가 있는 이가 많지 않아서 더욱 재미나게 읽었다. 아마도 저자가 오랜 시간 고독과 고생의 순례를 이어갈 수 있었던 데는 저자의 그 유머 감각이 한 몫 했을 것 같다.
우리는 저자의 여정을 흉내낼 수 없지만(매일 텐트라니 끔찍하다 ㅎㅎ), 그 순례의 여정에서 보여준 저자의 삶의 태도와 방식, 문명을 비판하는 유머러스한 시선은 누구에게나 영감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중산층의 모럴'을 고수하는 한 창조적인 삶도 창조적인 글쓰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이 책에 사실적 오류가 하나 보인다. 인도 여행 중 한국인 실종자가 천여 명이라는 대목인데, 믿기지 않아 검색해보니 순수 실종자가 아니라 비자가 만료되었음에도 귀국하지 않은 사람들 숫자가 포함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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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뭐 '도' 하자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그간 살아왔던 것을 반성하고 세상을 배우면서 캠페인차 유랑 활동을 다니고 있기 때문에 그의 삶을 동경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세상사--핍박 받는 민중의 고통--에 대해서마저 초연할 수 있는 그의 '버릴 수 있음'에 대해서는 상당한 부러움이 느껴진다. 여기서 "세상사에 대해서 초연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도'를 한다는 이들(혹은 현실을 외면하는 종교인들)의 사회적 무책임감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도를 한다고 나서는 많은 이들이 사회 속의 구성원으로 살면서 그 사회가 주는 온갖 풍요와 이익을 탐닉하면서도 사회 문제에 대해서만은 무관심하다. 그러면서 그것을 '세상사에 대한 초연'이라 떠벌린다. 이는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사에 대한 초연함'에는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한 초연함'까지 포함되어야 하는데,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채우는 것은 당연시하고 타인의 그것에 대해서만 무관심한 것이다. 그것은 초연함이 아니라, 무지가 바탕이 된 무책임, 극단의 개인주의, 이기주의, 관념주의의 현현일 뿐이다. pp14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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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한다'고 함은 세상의 곳곳을 직접 자신의 발로 밟아 걸으며 가장 느리고 낮은 자세로 세상과 하나 되는 기회를 얻는 것임을 뜻한다. 이렇나 여행자는 이방인으로서 각 지역의 문화와 사회, 풍토를 접하고, 그곳 민중의 생활부터 자연 환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편견 없이 체험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그의 마음 속에는 바람직한 생존과 삶에 대한 어떤 가치가 형성될 것이다. 진정한 여행자의 미덕은 바로 이를 통해서 '인간과 자연이 존재해야 할 가장 긍정적인 원형'을 구축하고, 그 앎과 경험을 통해 얻어낸 에너지로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나서는 데 있다.
결국 진정한 여행자는 평화주의자이고, 인권운동가이며, 환경운동가인 동시에 사회개혁가여야 한다. 진정한 여행자는 그 경험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영혼을 살찌울 뿐만 아니라, 세상의 질병을 치유하고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이러하지 못한 이들은 기실 여행자나 유랑자이기보다는, 다만 구경꾼일 뿐이다. 그러기에 나는 내가 꿈꾸는 진정한 여행자가 되기 위해 서투르게라도 노력해 왔던 것이고, 내가 여행을 통해서 얻어낸 가장 중요한 통찰을 훼손하여 방송에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결단을 하며,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여행가를 떠올린다. 40킬로그램의 배낭을 메고 지구를 몇 바퀴 걸어서 탐험했다는 무용담을 부풀리는 것이 주요 임무인 듯 보이는 그는 허구헌 날 방송과 언론에서 마치 자신이 여행가의 진정한 표상인 것처럼 포장해왔다.
진정 그가 여행자로서의 미덕을 체득했다면, 이 땅의 수많은 부조리, 반인권, 반민주, 반환경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에 대해 한마디의 이야기라도 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용산참사, 4대강사업, 쌍용자동차 사태, 강정마을, 밀양과 청도, 촛불집회, 핵발전 정책, 세월호 등등 사회적 갈등 사안과 이슈에 대해 그가 사적인 장소에서라도 거론했다는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인터넷을 뒤져봐도 그러한 문제에 대해 단 한 줄의 사적인 푸념도 없다. 그러한 얘기를 입에 담는 즉시 방송과 언론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주가가 떨어지며, 섭외가 뜸해지다가 심하면 퇴출까지 됨을 그도 알았으리라.
하여 나는 그가 여행 전력을 자신의 유명세를 높이는 데에만 이용하는, '여행자의 미덕'을 조금도 갖추지 못한 이임을 확신한다. 대신 그는 교묘하게도 아프리카의 헐벗고 굶주리는 이들을 자신의 이야기에 끌어들인다. 헐벗고 굶주려서 밥 한 끼도 먹지 못해 죽어가는 아이들을 자신의 이야기 소재로 만들어서, 보편적인 인류애에 불타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한다. 참으로 대단한 기술이다. 그렇게 아무런 정치적 편향이 없고 위험 부담이 없는 보편적인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그의 주가는 끝을 모르고 상승한다.
그는 굶어 죽는 아이들이 발생하는 원인이 강대국의 패권주의와 식민지 전략, 신자유주의적 질서 때문이기에 "근원적으로 제3세계 아동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는 그러한 부조리까지 개선해야 한다"고 문제 의식을 확대하지 않는다. 그렇게 문제를 확대하여 조금이라도 정치적 편향(?)을 띠게 되면, 방송과 언론은 더 이상 그를 부르지 않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다.
그가 누구보다도 탐험심이 강하고 용감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게 장시간 여행을 다녔음에도 여행자로서의 미덕을 갖추지 못한 인물은 지극히 찾기 힘들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것은 이러한 인물이 최고의 여행가를 넘어 탐험가로까지 칭송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외계층에 대한 동정심을 최고의 미덕으로 아는 상당수 한국인들로부터는 성녀 비슷하게까지 취급받고 있다. 그가 구호팀장으로 있던 단체가 후원금 상당 부분을 선교 사업에 쓰고, 불교 국가에 선교하러 들어가 말썽을 일으켰다는 사실 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또한 OECD 최고의 노동 시간을 자랑하는 한국인들의 '떠나고자 하는 열망'이 이런 문제를 살필 수 있는 냉정함을 가로막은 탓도 있으리라. pp181-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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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천여 년간 인류는 종교적 광신과 봉건적 폭력으로부터 빠져 나오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끝에 우리는 "하나라도 더 갖는 것이 풍요를 준다"는 물신과 소유의 신화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이 신화는 과거의 것보다 더 강력한 주술과 폭력으로 무장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와 달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 그 적을 기꺼이 섬기며 찬양하고 있다.
이 주술로부터 우리는 스스로를 구해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갈등과 분쟁, 학살, 전쟁, 생태적 위기가 바로 그 소유의지의 무한한 증식 때문에 빚어졌기 때문에도 더더욱 그러하다. 그 거짓된 신화의 타파는 물신과 소유의 속도놀이에 제동을 거는 우리의 의지에서 시작된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스스로의 발로 대지에 서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서로를 학살할 것이다. p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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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성찰은 익숙한 자기, 규정된 자존의 껍질을 찢고 가없는 자유를 지향하며 자기를 확장하는 역동적 창조력의 원천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 성찰의 노력이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실천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면, 이는 궁극적으로 극단의 감상주의, 관념주의, 낭만주의, 개인주의의 아류일 뿐이다.
반대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 쉼없는 자기 성찰에 기반해 있지 않다면,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집단적 광신의 반복일 뿐이다. 따라서 자기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은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실천 속에서 체험적으로 다듬어져야 한다. 이것이 둥글이가 그간 도심 속을 홀로 유랑해온 이유이다. p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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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라도 더 갖고 더 높이 오르려는 욕망으로 세워진 세상에서,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유의 속담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읊으며, 학교에서는 좀 더 많이 갖기 위한 효과적 기술과 능력을 익히고, 집에서는 그 기술의 실질적인 응용 사례를 부모로부터 체험하며, '물질의 양이 인간의 존엄을 결정하는 자본주의 사회 체제'의 통념 속에서 살아왔던 터이다. 여태껏 내 삶이 이러한 번잡함에 있었음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에 '공허'가 몰려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집단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휩쓸려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리라.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공허'라는 이름의 바리케이드는 사람들이 그것을 뚫고 그 너머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마치 전기 철책을 대면한 가출마냥 그 공허를 조금이라도 맛본 이들은 이내 절망하고 돌아와 일상에 다시 매몰된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일상이 얼마나 야만적인 것이고, 그 일상의 너머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어렴풋이라도 예상한다면 그 위험을 감수할 용기를 얻을 것이지만, 그 너머의 것을 얘기해 줄 만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고 그것을 가늠할 만한 시야도 없으니 바리케이드를 넘을 필요를 결코 고민하지 않는 것이다. 결코 철저하게 일상에 안주하는 것이 이 사회에서 태어난 이들이 선택해야 하는 유일한 삶의 길이다.
물론 그 중의 하나가 둥글이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내 진실한 존재를 찾아 나선 이 유랑이 길. 둥글이는 종종 이 길에서 '텅 빈' 시공의 침묵을 대면하며, 그 너머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다. pp305-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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