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heshe.tistory.com
책 이야기/에세이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by 릴라~ 2018. 11. 20.


##


현대의 희망, 현대의 윤리적 감수성에 중심이 되는 것은 비록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탈선이며, 비록 얻기 어렵긴 하지만 평화는 규범이라는 확신이다. 물론, 전 역사를 통해서 전쟁이 늘 이런 식으로만 여겨진 것은 아니다. 한동안은 전쟁이 표준적인 상황이었으며 평화가 예외적인 것이었다. pp114


##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러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pp167


##


오늘날 전쟁 소식이 전 세계로 퍼진다고 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타인들의 괴로움을 생각해볼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이 두드러질 만큼 더 커졌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뺏을 만한 것들이 너무나 많이 존재하는 현대의 삶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할 뿐인 이미지들을 외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듯하다. 어떤 보도 매체가 긴 시간을 할애해 전쟁이나 여타 파렴치한 행위들 때문에 사람들이 겪고 있는 특정한 고통을 보여줄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때보다 훨씬 더 빨리 채널을 돌려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이런 소식에 예전만큼 그리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주장은 틀림없이 사실과는 다르다.


사람들이 완전히 돌변한 것은 아니라고 해서,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거나 책장을 넘기거나 채널을 돌릴 수 있다고 해서, 사람들을 공격해대는 이미지를 둘러싼 윤리적 평가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런 이미지를 보면서 우리가 무감각한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 우리로서는 충분히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결점은 아니다. 사진에 찍혀 프레임에 담긴 고통의 역사와 원인을 우리가 잘 모를 경우 사진 자체가 우리의 무지를 교정해 주리라고 당연시할 수도 없다. 사람들이 겪고 있는 엄청난 고통을 설명하려는 기존 권력의 합리화에 눈길을 돌려보자고, 그 합리화를 성찰하고 깨닫고 꼼꼼히 검토해 보자고 권유하는 것 이상을 이런 이미지가 해낼 수는 없다. 사진에 담긴 광경을 일으킨 사람이 누구인가? 누구의 책임인가? 이 일을 용서할 수 있는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이 일에 문제를 제기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만한 상황이 지금까지 있었던 적이 있나? 이런 도덕적 분노를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마치 연민이 그렇듯이 이런 질문들이 이후부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까지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pp170


##


사람들은 저 멀리 떨어진 채 고통을 쳐다본다는 이유로 이미지를 비난해 왔다. 마치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 있기나 한 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이미지를 통하지 않은 채) 가까이에서 본다고 해서 그냥 보고 있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사진은 현실을 추상화하므로 뭔가 도덕적으로 그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저 멀리 떨어진 채 (그 고통이 지닌 날것 그대로의 위력을 없애버린 채) 타인의 고통을 겪어볼 수 있는 권리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지금까지 시각의 특징--이 세상과 거리를 둔 채 물러서 있다는 특징, 그래서 자유롭게 관찰할 수 있고, 무엇에 주목할지 고를 수 있도록 해주는 특징--을 찬양해 온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지나치게 인적(또는 도덕적) 대가를 지불해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렇지만, 이런 시각의 특징은 정신의 작동 방식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뒤로 물러선 채 사색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옛 선인들의 말을 빌려 말해보자면,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와 동시에 누군가를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pp171-172


##


결국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 화해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식은 '낡은' 것과 '새' 것이라는 오래된 대립을 더 많이 생가해 봐야 비로소 생겨날 겁니다. 본질적으로 '문명'과 '야만'이라는 대립은 만들어진 겁니다. 부정할 수 없는 어떤 현실이 제 아무리 많이 반영된 것일지라도, 이런 대립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독단적으로 말하는 것은 부도덕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낡은' 것과 '새' 것이라는 대립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경험이라고 이해하는 것 한가운데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그런 대립입니다.


'낡은' 것과 '새' 것은 이 세상을 인식하는 모든 정서와 감각의 영원한 양극입니다. 우리는 낡은 것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낡은 것 안에는 우리의 과거, 우리의 지혜, 우리의 기억, 우리의 슬픔, 우리의 현실 감각이 모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새 것에 대한 믿음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새 것 안에는 우리의 활기, 우리의 낙관 능력, 앞뒤 가리지 않는 우리의 생물학적 열망, 화해를 가능케 하는 치유 능력으로서의 망각 능력이 모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면은 새 것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강하게 발달한 내면은 새 것에 저항할 테죠. 우리는 낡은 것이냐 새 것이냐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만, 사실 둘 다 선택해야 합니다. 낡은 것과 새 것의 끊임없는 타협이 아니라면 도대체 인생이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사람들은 이런 뻣뻣한 대립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야만 합니다. pp205-206


##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작가는 이 세계에 눈길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어떤 사악함을 저지를 수 있는지 이해하고 살펴보며 연상해 보려고 노력하는 존재, 그렇지만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냉소적이 되거나 천박해지거나 타락하지는 않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문학은 이 세계가 어떠한지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습니다. 


문학은 언어와 서사를 통해서 기준을 제시하고 깊은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문학은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고, 발휘하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 아닌 다른 사람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에 감응할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자신을 잊을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뭔가를 배울 능력이 없다면, 용서할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인간이 아닌 뭔가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 


문학, 그것도 세계 문학에 다가간다는 것은 국가적 허영심, 속물 근성, 강제적인 편협성, 어리석은 교육, 불완전한 운명, 불운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은 광활한 현실로, 즉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었습니다.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특히 독서와 내면의 가치가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도 문학은 자유입니다. pp207-214



300x25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