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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에세이

영원의 시간을 여행하다/ 호시노 미치오

by 릴라~ 2018.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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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행은 나에게 한 가지를 가르쳐주었다. 이 세상의 끝인 줄 알았던 곳에도 사람들의 생활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인간의 삶, 살아가는 모습의 다양성에 매혹되었다. 어떤 민족이든 얼마나 다른 환경에서 살든 인간은 한 가지 점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누구나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세계는 그런 무수한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쉬스마레프 마을에서 보낸 석 달은 그 후 세월이 흐를수록 나에게 그런 생각을 심어주었다. 열아홉살(정확하게는 스무 살) 시절의 여름이었다. p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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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부의 주요 식량인 지의류는 환경오염을 측정하는 바로미터로 간주될 만큼 대기오염에 약하다. 그 생장 속도는 매우 느려서 한 번 파괴되면 부로가 몇 센티미터로 자라는 데만 50년에서 1백 년이 걸린다고 한다. 이는 카리부의 생존에 광대한 땅이 필요한 커다란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북극권에서 시작되려고 하는 거대한 유전개발 사업은 카리부가 혹독한 겨울을 넘길 수 있는 열쇠인 지의류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게 될까.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될 사태들은 북극권 생태계 전체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1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여행을 반복하며 북극권을 떠도는 카리부. 그리고 카리부를 사냥하며 살아가는 내륙 에스키모와 인디언. 카리부는 그곳에 사는 인간들의 생활을 비롯한 극북 생태계에서 핵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p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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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두 개의 소중한 자연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일상생활에서 관계를 맺는 주변의 자연이다. 이를테면 특별할 것도 없는 강이나 작은 숲, 혹은 바람에 쓸리며 반짝이는 길가의 풀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 발로 가보게 될 일이 없는 머나먼 자연이다. 그런 자연은 그저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상상력이라는 풍요를 준다. 그런 머나먼 자연도 소중한 자연임이 분명하다. p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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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활에서 중요한 환경 가운데 하나가 생물의 다양성이라고 나는 늘 생각한다. 그들의 존재는 우리 인간에게 안도감을 주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가르쳐주는 것 같다. 평생 한 번이라도 늑대와 맞닥뜨려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맞닥뜨리는 일이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같은 지구의 어딘가에 늑대가 살고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것, 또 그것을 의식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물론 늑대만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매킨리 산 기슭에 펼쳐진 이스트포크 협곡 안쪽에 반세기 넘게 사용되고 있는 늑대 굴이 있다. 그 광대한 계곡을 내려다볼 때면 나는 몸의 밑바닥에서 솟구쳐 나오는 신비한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p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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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오, 우리를 여기에 데려와 줘서 정말 고마워..."


실리아가 불쑥 꺼낸 말에 이것이 두 사람에게 마지막 브룩스 산맥 여행이 되리라는 것을 느꼈다. 실리아와 지니와 지난 몇 년간 나눈 대화 속에서 전과는 다른 기미를 느끼곤 했다. 누구나 자신의 노쇠와 여러 차례 만나게 마련이다. 쥐 죽은 듯 조용한 겨울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는 찾아왔다. 나는 문득 '추억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의 인생에는 추억을 만들어야 할 때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실리아도 지니도 인생의 그 '때'를 알고 있었다. p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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땔감으로 쓸 마른 나뭇가지를 주우며 해 질 무렵의 가문비나무숲을 걷는다. 촉촉한 대기가 느슨하고 따뜻하다. 숲 속 카펫에 떨어져 있는 무스의 똥이 한결 물러져 있다. 버드나무 새싹이 트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붉은다람쥐 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숲도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했다.


작은 모닥불이 흔들리고 있다. 타닥타닥 하는 소리가 내 마음을 풀어준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 더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역시 묘한 거야, 사람 마음은. 아주 자잘한 일상에 흔들리지만 새 등산화나 봄기운에 이렇게 풍요로워질 수 있으니. 사람의 마음은 깊고, 또 이상할 정도로 얕다. 사람은 그 얕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p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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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안쪽은 작은 숲인데, 그곳에서 크랜베리 열매를 발견한 것이다. 왜 지금까지 그걸 몰랐을까. 우리는 즉시 그 빨간 열매를 따서 크랜베리 빵을 구웠다. 사람의 마음은 묘한 것이어서, 그 숲이 갑자기 우리와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사냥이든 열매 채취든 인간은 그 땅에 깊이 관여할수록 그곳에 사는 다른 생명을 자기 내부로 받아들이고 싶어지는 것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땅에 더 긴밀히 소속되는 느낌이 들 것이다. 이 행위를 그만두었을 때 사람의 마음은 그 자연에서 멀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꽃이나 채소를 가꾸는 것도 아마 인간의 공통된 행위일 것이다. p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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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이렇게 아름답지만 사람 마음을 왠지 초조하게 만듭니다. 짧은 극북의 여름이 어 하는 사이에 지나가 버리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길고 어두운 겨울이 바로 저기까지 다가와 있기 때문일까요? 첫눈이 오고 나면 좋든 싫든 각오가 생기고 마음도 차분해진다고 하는데... 그래도 나는 그런 가을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무궁한 저편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계절의 순환을 통해 확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자연은 얼마나 세련되게 배려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해에 단 한 번 아쉽게 지나가는 이 시기를, 죽기 전에 몇 번이나 맞을 수 있을까. 그 횟수를 헤아려보는 것처럼 인생의 짧음을 실감하게 하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알래스카의 가을은 나에게 그런 계절입니다. p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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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디언 마을에 가면 장식물 같은 토템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민들의 생활은 너무나 변해버렸다. 똑같이 생긴 토템폴이지만 아무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내면에서 이야기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고래도 곰도 독수리도 아주 멀리 가버린 것이다. p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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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무려 7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오른다고 한다. 그리고 신화의 시대를 지켜보았던 마지막 토템폴도 앞으로 50년만 지나면 흔적도 없이 흙으로 변할 것이다. 거기 새겨진 어디까지가 인간의 이야기이고 어디까지가 동물의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꿈 같은 온갖 설화는 그들이 자연과 교류하며 본능적으로 일궈낸, 깊이 살아남기 위한 지혜였는지 모른다. 아울러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힘이기도 하다.


인간의 역사는 목적지도 보이지 않는 안갯길을 브레이크도 없이 달리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앞으로도 계속 존재하고자 한다면 다시 한 번, 그리고 필사적으로 우리의 신화를 만들어야 할 때가 올지 모른다. p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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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씩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장대한 알래스카 북극권에 매료되고 내내 카리부를 추적해온 나의 여행에 하나의 종지부를 찍으려 하고 있었다.


전인미답의 대자연... 그렇게만 믿어온 이 거대한 땅이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조용히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추적하여 그들을 잠시 멈추어 뒤둘아보게 하고 그 목소리에 귀기울이자 풍경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뭔가를 말해주려고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이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곳이라는 외경심을 품고 내려다보던 벌판이 실은 많은 사람이 지나간 곳이었고 다양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새로운 여행이란 지금 눈앞의 침대에 잠들어 있는 하멜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노인의 정신 속에 있는 카리부를 추적하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여행인 것이다. 그 여행에서 나는 과연 새로운 풍경을 보게 될까. 


극북 인디언 마을은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하멜의 통나무오두막에서도 들리는 소리는 난로에서 장작 튀는 소리뿐이었다. 그 따뜻함이 마음에 번지는 것은 노인이 보낸 숱한 겨울을 그 온기로 느끼기 때문이다.


어느새 케니스가 낡은 인디언 북을 꺼내 가만히 리듬을 치며 끊어질 것 같은 작은 목소리로 먼 옛날의 카리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들려주려는 것도 아니었다. 우는 듯 외치는 듯 끝없이 흘러나오는 그 노래는 잠든 하멜의 마음에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그 노래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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